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23화 (323/500)

323화. 그저 간단한 조사입니다 (4)

한울 회장의 막내아들 한대희.

그가 사무실에 들른 시간은 겨우 10분 남짓이었지만 후폭풍은 상당했다.

“가장 위에 있는 어, 저희 (주)한울이 모회사인데…… 일차적으로 갖고 있는 계열사의 지분이…….”

식은땀을 닦으며 설명을 이어가는 재무이사만 해도 그랬다.

그는 겉으로는 멀쩡한 척했지만 식은땀을 닦으며 했던 설명을 또 하고 가끔 더듬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혼란스럽기는 공무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재무이사의 설명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황민우 혼자였다.

한대희가 정신을 쏙 빼놓고 간 덕분에 다들 머릿속으로 아까 있었던 대화를 곱씹어보고 있었지만 황민우는 생각을 멈췄기 때문이다.

‘복잡한 경우의 수를 내가 따지고 있을 필요는 없어. 판단은 팀장님에게 맡긴다.’

황민우가 칭하는 팀장은 물론 신재현이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그때 실행하면 된다.

자질구레한 잡생각은 손발을 둔하게 만들고 상사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때문에 황민우는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들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팀의 정식 팀장과 자신이 모시는 상관인 신재현, 그리고 재무이사까지 정신이 어딘가에 팔려 있다는 것은 옆에서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들 한번 머리를 식히셔야겠군.’

황민우는 결정을 내렸다.

상사가 혼란스러워 할 때 시간을 버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황민우는 팀장에게 다가갔다.

“잠시 쉬었다가 하실까요?”

“음? 아…….”

중년의 팀장이 고개를 번뜩 들었다.

생각에 빠져 흐려져 있던 눈이 좌우로 훑었다.

“그럴까요? 집중이 흐트러진 것 같으니 10분, 아니 20분만 쉬겠습니다. 재무이사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예. 저야 괜찮습니다. 저도 마침 급한 일이 생각나서요.”

“그럼 20분 후에 다시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재무이사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팀장은 옆의 신재현에게 눈짓을 했다.

따라 나오라는 뜻이다.

팀장은 복도를 둘러보더니 끝으로 걸어갔다.

무엇을 찾는지는 신재현도 금방 알아차렸다.

둘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곳이 필요한 것이다.

복도 끝까지 가도 건물 외부에 난 비상계단 비스무리한 것은 없었다.

처음 와보는 대기업의 복도에서 헤매던 팀장이 낭패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자 신재현이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휴게실 겸 흡연실이었다.

안에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팀장이 엄지손가락만 펴서 안을 가리켜 보였다.

“사람이 한 명 있는데요?”

“담배가 짧잖아요. 거의 다 폈을 겁니다.”

신재현이 앞장서서 휴게실 문을 열자 마침 담배를 비벼 끄던 직원이 깜짝 놀랐다.

그녀는 순간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미친! 우리 층이었네!”

“예.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괴상한 소리를 신재현은 잘도 인사로 알아들었다.

긴 머리를 높게 틀어 묶은 여직원은 스스로 입을 틀어막더니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아, 넵. 안녕하세요.”

그리고 슬금슬금 피하는 몸짓으로 빙 돌아 문가로 다가갔다.

신재현이 그것 보라는 듯 팀장을 향해 어깨를 으쓱 했다.

팀장이 오, 하고 감탄하다가 눈썹을 꿈틀했다.

유리문 손잡이를 잡던 여직원이 훅 뒤로 돌아서 신재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죄송한데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을 수 있을까요?”

“……예? 사진이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된 신재현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여직원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둥절한 신재현이 팀장과 눈을 마주쳤다.

이번엔 반대로 팀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 음…… 제 사진을 어디다 쓰실지는 모르겠지만 네에…….”

결국 신재현은 어색한 얼굴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전면 유리창 앞에 서서 환풍기를 켠 팀장이 담배를 꺼냈다.

여직원이 돌아가고 난 후, 옆으로 다가온 신재현은 아직도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대체 뭐 좋은 일이 있다고 저랑 사진을 찍으려고 할까요? 가끔 길에서 저런 사람들 만나는데 이해가 안 가요.”

팀장이 불을 붙이다 말고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신재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습니까?”

“미친이라는 말에는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더니 사진 찍어달라니까 당황합니까? 뭔가 핀트가 이상한데요.”

“저 보고 기겁하거나, 도망가거나, 욕하는 경우는 많이 봐서요.”

“아, 예…….”

팀장은 더 이상 질문을 포기했다.

대신에 담뱃갑을 내밀었다.

“한 대 할래요?”

“끊었습니다.”

팀장이 입을 떡 벌렸다.

“그걸 끊어요? 독하네.”

“아는 상사 분께서 끊으라고 하셔서요.”

“끊으란다고 끊어요? 그게 가능한가?”

질린 얼굴로 다시 담배를 입에 문 팀장이 복잡한 얼굴로 연기를 뿜었다.

신재현 반대 방향을 향해서였다.

환풍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연기를 빨아들였다.

“황민우라고 했던가요? 눈치가 빠르고 끼어들 타이밍을 잘 재던데.”

어차피 아무도 집중하지 못하던 참이었다.

여기서 끊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황민우가 적절히 끼어든 것이다.

가려운 곳을 긁어준 셈이다.

“저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좋네요. 그런 건 분위기를 읽는 눈치도 필요하지만, 빠른 상황 파악과 판단도 필수거든요. 팀장은 항상 팀원들 상태를 파악하고 있어야 해요.”

팀장이 딱히 가르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신재현은 옆에 공손하게 섰다.

그 말을 끝으로 팀장이 연기만 뻑뻑 내뱉고 있자 신재현이 먼저 물었다.

“20분 안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음, 재무이사 뛰쳐나갈 때 표정을 보면 좀 더 늦어도 될 겁니다. 절대 20분 안에 돌아올 화제가 아닐 테니까요.”

신재현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무이사는 분명 회장에게 갔을 것이다.

한대희가 저지른 짓을 보고하고 그 지시를 받으러 간 게 분명하니 20분 내로 돌아오기는 어렵다.

“그래서 아까 그 한대희 사장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뭔가 느낀 것 같았는데요.”

한대희가 말했을 때 팀장과 신재현이 서로 눈이 마주친 것을 얘기한 것이다.

신재현은 뭔가를 얘기하려 했고 팀장은 그걸 막았다.

“잘 포장해서 리본까지 예쁘게 묶어 발 앞에 놓아 둔 선물상자 같습니다.”

신재현은 착잡하게 말했다.

팀장이 의아해했다.

“친절한 선물 같다는 느낌은 저도 받았습니다만, 왜 그런 얼굴입니까? 이용할 방도가 많은데요. 혹시 이런 권모술수 같은 방식은 싫어하는 성격입니까?”

TV에서 비춘 정의로운 성격이 사실이라면 이것이 불편할 수도 있다.

아직은 어린가, 하며 팀장이 필터를 깊게 빨았다.

그러나 신재현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저렇게 잘 차려준 밥상을 받는 게 처음이 아니라서요.”

신재현은 약 반년 전, 당시 중부청장이었던 손경진이 권현아를 눌러 버리려고 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 일은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멀쩡하게 일 잘하고 있던 사람을 별다른 이유 없이 쳐내려고 했던 손경진의 제안을.

그저 거기에 있었고 본보기로 처리하기 쉬우며 오낙현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짓밟아 버리려 한 일이었다.

그리고 악의 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충격이라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또한 그 일로는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라는 교훈도 얻었다.

과연 한대희가 차려준 밥상이 멀쩡할지, 독이 있을지는 모른다.

신재현이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태도도 좋네요. 잘하고 있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무작정 받아먹으면 탈이 나기 마련이지요.”

팀장은 계속 신재현의 의견을 이끌어내며 평가했다.

그리고 맞으면 맞다고 그 자리에서 답을 내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한대희 사장이 우리에게 이런 정보를 왜 줬는지 모르겠습니다. 본인에게 유리한 무언가가 있을 텐데요.”

순수한 호의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인척 관계라고 해봤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먼 사이다.

그가 뭐하러 친족의 피를 봐가면서까지 신재현에게 정보를 준단 말인가.

“그럼 생각을 해 보죠. 이유를 알면 그 이후 상대의 수도 예상할 수 있으니까요.”

팀장과 신재현은 생각에 잠겼으나 먼저 입을 연 것은 신재현이었다.

팀장은 신재현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 일부러 기다린 것에 가까웠다.

“한대희 사장 자신이 총수 자리에 앉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있죠. 한 엔터테인먼트는 설립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탈세도 없을 겁니다.”

“탈세가 없다는 건 가정인 거죠?”

탈세액을 이미 본 신재현에게 그것은 확정에 가까웠지만 팀장을 납득시키기 위해 돌려서 설명했다.

“그 태도를 봐서는 깔끔하게 관리한 건 사실이겠죠. 그렇게까지 말한 이상 우리가 오너 일가 조사 들어갈 건 확실한데요. 먼저 죽여 달라고 목을 내밀진 않잖습니까.”

이제 둘러대는 것도 물 흐르듯 부드러웠다.

팀장은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한대희 사장이 한울 회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 이겁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이제 와서 후계 경쟁에 뛰어든다 해도 그가 회장이 되기에는 너무 멀어졌습니다. 이미지도 철부지 자식 취급이잖습니까. 그가 회장이 된다면 임원들부터 들고 일어날걸요. 뭔가 대단한 업적이라도 쌓는다면 모를까.”

“그렇죠. 지분도 거의 없다시피 하니 경쟁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습니다.”

“그럼 뭐 따로 들은 거 없습니까? 사촌 분한테라든가…….”

어떻게 보면 의심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어서 팀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신재현은 매우 깔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결혼식 이후로 문자도 잘 안 합니다.”

“……원래 왕래가 없는 집안이에요?”

“아뇨. 소식이야 고모한테서 전달받으면 되니까요. 될 수 있으면 따로 연락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신재현은 더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제가 대기업 며느리랑 사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 자격을 의심하는 순간이 올 겁니다. 그때 통화기록이라도 제출하려구요. 원래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기는 쉽지만 그것을 바로잡으려면 그 10배에 달하는 자료를 제시해야 하잖아요.”

팀장은 질린 얼굴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7급 공무원이 정체 모를 무언가처럼 보였다.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과 어긋나 있었다.

그렇다고 상식이 비틀려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격도 그렇고 끈기와 상황 파악 능력, 일의 우선순위 처리 방식도 공무원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다.

‘이건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약간 피해의식이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가 팀장은 아차했다.

허송미 국장의 당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챙겨 줘. 평지풍파 다 맞고 있는 애야. 청장이랑 다른 사람들이 막아 주고는 있는데 어쩔 수 없이 얘가 때려 맞는 것도 상당해서.

국장의 말을 들을 땐 무슨 소린가 했는데 이거였구나 싶었다.

항상 공격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게 마냥 망상증이라고 치부할 일은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약 2년간 끊임없이 공격받고 시달렸으며 앞으로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그가 제주도에 있는 줄 알고 있어서 인터넷이 꽤 잠잠한데, 그런 지금에도 신재현의 이미지를 깎아내기 위한 비방글은 가끔 올라왔다.

만약 복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의도의 입김이 닿은 언론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까내릴 것이다.

6급으로 승진하여 국세청 본청으로 간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이고.

“하아…….”

팀장은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냈다.

마음이 답답해져서 피울 수밖에 없었다.

신재현이 주머니에서 얼른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담배 안 핀다면서 라이터는 갖고 다녀요?”

“끊은 지 얼마 안 돼서 습관적으로 갖고 다닙니다.”

팀장이 다시 연기를 신재현의 반대쪽으로 후, 불었다.

신재현은 버릇처럼 라이터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생각에 잠겨 있는 신재현을 바라보면서 팀장은 안쓰러운 눈빛을 했다.

이미 일반적인 공무원과 걷는 길이 다르다.

왜 윗선이 급작스럽게 특별 승진이라는 수단까지 써 가며 6급으로 올리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도 그냥 놔둘 순 없지.’

윗선에서 대기업 조사에 신재현을 끼워 보낸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그에게 지금 이 자리가 날뛸 판이 될 수도 있다.

화려한 복귀, 컴백 무대. 뭐 그런 것이다.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컸다.

팀장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그 끝으로 신재현을 가리켰다.

“그럼 선택은 신재현 씨가 하세요. 오너 가족,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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