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그저 간단한 조사입니다 (2)
회장과 공무원 무리 간의 인사가 끝났다.
첫 만남부터 얼굴을 붉히는 사람은 없으니 둘 사이의 분위기는 나름 훈훈했다.
그리고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신재현은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손에 들고 있던 서류 가방에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미리 구분해 둔 것이다.
신재현이 팀장으로 있을 때는 주로 황민우가 옆에서 따라다니며 챙겨주던 바로 그 서류다.
공문과 청렴서약서, 납세자보호헌장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신재현이 서류 담당을 맡았다.
바로 뒤에서 황민우가 따라오고 있는데도 그랬다.
직급으로 따지자면 이 무리에서 신재현보다 낮은 사람도 꽤 있다.
앞으로 한 달이면 6급으로 올라갈 예정이니 이 무리에서 꽤 윗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그가 아랫직급을 놔두고 왜 직접 서류를 챙기게 되었는가.
지금 공무원 무리를 인솔하고 있는 책임자, 팀장이 지명해서 맡겼기 때문이다.
팀장의 소속은 자산과세국으로, 자산과세국장 허송미의 사람이었다.
신재현의 면접 자리에 참석했으며 호의를 갖고 있다는 그 사람 말이다.
그리고 팀장이 신재현에게 서류 담당을 맡긴 이유는 신재현에게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공문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팀장은 서류를 받아다 회장과 재무이사에게 건넸다.
그들이 절차를 밟는 동안 공무원들은 가만히 기다렸다.
아니 정확히는 신재현을 힐끗힐끗 쳐다보기 바빴다.
국세청에서 이름을 날리던 신재현과 함께 일하게 되었으니 그에게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신재현은 과거 지산 조사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은 바가 있었으니, 이번 한울 건에서도 뭔가 터트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공무원들의 눈빛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신재현이 갑작스럽게 한울 조사 건에 꽂혔을 때도 반발은 거의 없었다.
물론 모두가 신재현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이 자리에 모인 공무원들 역시 전국에서 거르고 걸러 본청으로 들어온 실력자들이었다.
개중에는 신재현의 소문을 과장된 것이라 생각하는 자도 있었다.
그래서 어설픈 모습을 보이면 바로 물어뜯을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팀장은 허송미 국장과의 지난 대화를 잠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멍청한 놈은 아니니까 한번 써먹어 봐.’
‘도움이 될까요?’
‘모르지. 지산 계열사 하나 털어봤다고 수십 개나 되는 대기업 계열사 전부를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건 보는 눈이 필요하니까요. 단시간에 기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한데 또 누가 알겠어? 의외로 활약이 있을지.’
국장은 철저한 실력주의자였고, 아무 이유 없이 남을 믿을 사람이 아니었다.
국장의 후한 평가는 팀장의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래서 팀장 역시도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눈빛으로 신재현을 보고 있었다.
다만 국장의 말도 있었겠다, 기회를 줄 겸 기본적인 것만이라도 가르쳐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한편 쏟아지는 눈빛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신재현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청장님이 괜히 보냈을 리 없어. 배워갈 건 배워야 해.’
재무이사가 공문을 살펴보고 공무원들이 하나하나 서약서에 사인을 마쳤다.
“그럼 본사부터 둘러보시겠습니까?”
“가장 먼저 기업 지배구조부터 보고 싶습니다.”
“일단 사무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시죠.”
사무적인 절차가 끝나자 회장은 손수 일행을 안내했다.
지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회장이 데리고 간 곳은 따로 마련해 둔 자그마한 사무실이었다.
사무기기도 다 있고, 마실 것도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공무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신재현과 황민우 역시 한 번 지산에서 겪어본 적이 있어서 헤매는 일 없이 바로 세팅을 시작했다.
바쁘게 손을 놀리던 본청의 직원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순서는 알고 있나 보네.’
‘지산에서 해봤다 이거군.’
‘한번 해보면 익히는 건 빠른 타입인가?’
공무원들이 준비 작업을 하는 동안 문 바로 옆에서는 회장과 재무이사가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사람을 평가하고 다루며 배치하는 것이 일인 사람들이다.
회장과 재무이사는 지금 이 방 안에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공무원들이야 손에 익은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다들 무언가 이상했다.
한 남자는 양손에 들고 온 커다란 상자들을 세우면서 시선 끝은 신재현에게 향했다.
또 한 남자는 테이블을 끌어다 배치하면서 신재현이 랜선을 갖고 책상에 통과시키는 것을 보았다.
한 여자는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늘어놓으며 신재현이 노트북에 선을 연결하는 것을 보았다.
다들 손으로는 무언가를 하면서도 눈은 어딘가를 신경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보면 명백했다.
“흐음.”
재무이사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회장이 돌아보며 눈총을 주자 재무이사가 헛기침을 했다.
외부인인 이 둘이 눈치챌 정도인데 팀장이 모를 리가 없다.
팀장은 둘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그럼 일단 지배구조부터 보겠습니다만, 필요한 자료는 어디다 요청하면 되겠습니까? 연락책은 하나 제공해주시죠.”
신재현은 복합기에서 무선 출력 설정을 하다 말고 팀장을 보았다.
앞으로 될 수 있으면 팀장 옆을 따라다니고, 그가 하는 것을 볼 생각이었다.
신재현이 곁눈질로 팀장을 훔쳐보자 그를 지켜보던 수많은 눈동자가 따라서 움직였다.
황민우가 선을 정리하다 말고 한숨을 푸후, 내쉬었다.
이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도 회장은 애써 모르는 척을 했다.
다들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는 모습이다.
“저희 전재윤 재무이사가 옆에 붙어 있을 겁니다.”
공무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특히 신재현은 아예 대놓고 재무이사를 쳐다보았다.
지산에서도 한 명 붙여주긴 했지만 직급이 낮았다.
그런데 한울은 재무이사를 붙여준다고 하는 것이다.
재무이사면 말 그대로 회사의 돈 관리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대출, 자금조달, 장부 관리, 재무분석에 이르기까지 재무 분야의 책임자였다.
어떤 회사든 돈이 가장 중요하다.
자금을 손에 쥔 자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더불어 그룹 본사의 재무이사라면, 계열사에 무슨 일이 생길 경우 구원투수처럼 계열사 CEO로 취임하기도 했다.
그런 책임자가 직접 여기에 남는다는 것이다.
“CFO께서 직접 협조하시겠다고요?”
팀장도 다시 되물어볼 정도였다.
회장이 당당하게 말했다.
“지배구조가 궁금하다고 하셨잖습니까. 다른 누구도 필요 없이 우리 재무이사가 완벽하게 알고 있습니다.”
어느 회사든 재무이사가 재무의 제반 사항을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산에서는 회계팀과 전략팀이 대응했다.
뻔한 일이다.
무언가 이상한 점을 추궁받았을 때 재무이사가 모른다고 잡아떼고 넘어갈 수는 없으니까.
지금 한울은 자신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팀장이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저희는 그저 간단한 조사만 하러 온 건데요.”
순간 회장과 재무이사가 정색했다.
“간단한 조사인데 구성원이 이렇습니까? 설마 별명을 모르시는 건 아니죠?”
주어는 없었지만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고개가 약속한 듯이 일제히 한쪽으로 돌아갔다.
복합기의 인터넷 설정을 만지던 신재현이 머쓱하게 웃었다.
팀장과 복합기를 번갈아 바라보며 못 들은 척하고 있었지만 시선이 이렇게 몰리는데 시치미를 뚝 뗄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는 못했다.
“정말 간단한 조사입니다. 한울이라는 회사가 작정하고 털려고 나왔으면 10명 갖고는 어림도 없는 규모 아닌가요?”
신재현이 얼떨결에 입을 열었다.
팀장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회장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자연재해 본인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설득력이 없는데 말이죠…….”
알음알음 퍼져 있던 별명이 회장의 입에서 나오다니.
공적인 자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도 회장에게 쓴소리를 하지 못했다.
오히려 공무원들이 납득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팀장마저도 아, 하고 신재현을 보았다가 도로 회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재무이사님께서 직접 나오신 거로군요. 이거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것 같습니다.”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니잖습니까. 공무하러 나온 건데 저희가 불평할 수야 있나요.”
사실 한울이 피해를 입고 있긴 했다.
그러나 의도한 것이 아니라 서로 덮고 넘어갔을 뿐이다.
신재현이 나온다는 소문에 주가가 휘청였으니까.
지산이 그랬듯 한울도 버티지 못할 거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직원들의 동요도 상당했다.
그렇다고 이게 신재현이 일부러 한 건 아니잖은가.
오는 걸 막을 수도 없고, 왔다고 해서 본인이 부작용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별명이 자연재해인 이유가 그것이었다.
회장과 재무이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이 괜히 미안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
나는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한울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회사는 지주회사를 합쳐서 40개다.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이고 상장된 회사다 보니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계열사의 정보가 이미 공시되어 있었다.
다만 전체적인 구조도를 보자면 재무이사에게 확인받는 게 확실하다.
지주회사인 A가 B의 지분을 소유하고, B가 또 C를 소유하고, C는 또 D를…….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보니 우리도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
한울은 깔끔한 편에 속했기 때문이다.
꼭대기에 위치한 주식회사 한울을 중심으로 계열사가 아래에 위치한 피라미드식 구성이었다.
상호출자제한이라는 법 때문에 서로 자본을 엮지 못한 이유도 있고, 한울이 대기업치고는 깔끔하게 구조를 정리한 탓도 있다.
팀장이 이 점을 거론하자 그것이 칭찬으로 들린 모양이다.
어깨를 으쓱한 재무이사는 냅다 옆 사무실에 쳐들어가서 커다란 화이트보드를 빌려왔다.
그리고 아예 본인이 보드마카를 잡고 구성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부분도 있었고, 모르는 부분도 있었다.
아예 의자를 당겨다 맨 앞자리에 앉은 팀장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내게 손짓했다.
‘저요?’
나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켜 보였다.
팀장이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뒤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지 않도록 허리를 낮춰 팀장 옆으로 다가갔다.
내가 옆으로 갔는데도 팀장은 정면의 화이트보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게는 관심도 주지 않았다.
여기 가까이 와서 보라는 뜻이었나 보다.
서 있자니 내가 화이트보드를 가리게 된다.
나는 옆에 굴러다니는 의자를 가져다가 앉았다.
맨 앞에 팀장, 그 옆에 나.
그리고 그 뒤에 공무원들이 재무이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런 구도를 어디서 많이 봤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각선에서 쏘아지는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함께 온 공무원들인가 했더니 범인은 따로 있었다.
사무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가 복도 창밖에서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쑥하고 고개를 숙였다.
약 10초 후, 다시 창밖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여전히 복도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였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한울 막내 아드님이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