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20화 (320/500)

320화. 그저 간단한 조사입니다 (1)

한울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작년 말의 종무식, 신정 휴가, 시무식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울의 분위기가 냉랭한 것은 비단 날씨가 추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한울 총수 자리를 둘러싸고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는 그 자리에 참석한 임원만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런 중요한 얘기를 일반 직원들에게 떠벌리고 다닐 리가 없으니까.

다만 어떤 방식으로든 소문은 퍼지기 마련이라 알음알음 후계 경쟁이 시작되었다는 얘기는 돌고 있었다.

후계 경쟁이야 어느 회사든 거쳐 가야 할 통과의례다.

어떻게 보면 회장이 건재할 때 후계를 정한다는 것만으로도 회사의 견실함은 보장받을 수 있다.

때문에 직원들은 그닥 걱정하지 않았다.

위층에서 직계끼리 피 터지게 싸우든 말든 회장이 알아서 조율할 테니 직원들에게 미칠 영향은 없을 것이니까.

한울의 직원들은 오히려 누가 3대 회장이 될까 추측하며 안줏거리로 삼았다.

문제는 그 후에 퍼진 소문들이다.

“국세청에서 나오는 조사단에 그 사람이 껴 있다면서요?”

“지산 다음은 한울이라니, 행보가 너무 파격적인 거 아니에요?”

“행보라는 말을 붙이니까 웃기긴 하네요. 정치인도 아닌데 공무원 한 명의 움직임에 이렇게 수천, 수만 명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니.”

“그만큼 영향력이 큰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은.”

“근데 교육원에 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대체 왜 오는 거래요?”

“대리님 같으면 대기업 조사하러 팀 보내는데 그런 사람을 제주도에 놔두겠어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데려와서 일하라고 시키지.”

직원들은 이름조차 입에 담기도 무서워했다.

이름을 부른다고 눈앞에 나타나는 것도 아닌데.

거의 공포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근데 엄밀히 따지자면 친족 관계 아닌가요? 좀 많이 멀긴 하지만…… 그거야 뭐 갖다 붙이기 나름이니까요.”

멀어도 가까운 척, 가까워도 먼 척하는 것이 정계와 재계다.

당장 어제 적이었던 사람과도 오늘 아침 웃으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직원들은 하나같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없었을까요?”

“그 뭐냐, 사촌 누나네 집이잖아요. 신재현이 우리 회장님 막내아들한테 매형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매부인가?”

“작년 여름에 그렇게 생각했다가 목이 날아간 사람이 하나 있지 않아요? 재계 4위나 되는 그룹이요.”

“음, 그러네. 하긴 형도 날린 사람인데 피도 안 이어진 매형이 얼마나 중요하겠어요. 척을 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걸요.”

“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던 직원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만약 공무원이고 친척네 사돈집 세무조사를 한다고 생각해보자고요. 그 집이 어마어마한 대기업이에요. 그러면 어떨 것 같아요?”

“당장 제가 재벌 막내 사돈이라고 하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는데, 신재현은 그런 상식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라니까요? 지산의 예가 있는데 왜 자꾸 그러실까.”

“주임님, 지산하고 한울은 상황이 달라요. 지산은 의절하고 나간 형 때문에 이를 갈고 있었던 거고 한울은 친하게 지냈잖아요. 결혼식에 신재현이 왔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럼 더더욱 세게 때리겠죠. 어떻게 보면 인척 관계로 맺어진 특수관계인데 여기서 봐주면 신재현 입장은 뭐가 돼요? 국세청이 온갖 욕 다 처먹을 텐데.”

직원들 사이에도 의견은 분분하게 갈렸다.

결국 말싸움을 지켜보던 팀장이 나서서 수습해야 했다.

“일이나 합시다, 일! 신재현이고 뭐고 얘기해봤자 우리한테 하등 도움 안 되니까,”

“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오너 일가 상속 준비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지분 조정하면서 탈세 일어날까 봐 국세청이 눈 부릅뜨고 주시하는 것도 당연한 겁니다. 지금 신재현이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이 난리가 난 거잖아요. 그놈이 우리나라의 모든 대기업을 깡그리 해체시킬 생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기업 구조 조사에서 지산처럼 오너가 갈려 나가겠습니까.”

“한울 주식 엄청 떨어지던데요.”

“말 한 번 잘 했네요. 안 그래도 손실 나서 지금 상태 안 좋으니까 잡담은 적당히 합시다. 오늘 야근하고 싶어요?”

야근 얘기가 나오자 격렬하게 오가던 토론은 쏙 들어갔다.

하지만 계속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이들은 조사 대상인 회사의 직원들이고 지산처럼 개박살이 나면 직원에게도 악영향은 오는 법이다.

‘제발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 미친놈이 어디까지 물어뜯으려나.’

걱정이 태산이었다.

***

기습적으로 쳐들어가야 하는 사안이 아닌 이상 공무원의 모든 파견은 공문이 선행한다.

한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식 세무조사라기보다는 사전 감시 차원의 조사였지만 공문이 먼저 날아왔다.

국세청 쪽에서는 세무조사 형식을 빌린 가벼운 기업 구조 점검이라고 했지만 마음을 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기업 오너의 지분 상속, 즉 재조정은 뉴스에도 나올만한 이슈이다.

국세청이 들여다볼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거기에 신재현이라는 괴물까지 껴있다는 것은 결코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쥐어패기 전에 알아서 깨끗하게 하라는 국세청의 메시지가 담긴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임원도 있었다.

본청의 조사팀이 한울 본사로 방문하기로 한 날짜가 되자, 임원들은 눈에 띌 정도로 긴장감을 뚝뚝 흘리고 다녔다.

“회장님, 저번에 지산을 보니까 오너와 임원진 모두 1층 로비에 내려가서 맞았다던데요. 저희는 어떻게 할까요?”

임원의 질문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지산이 그렇게 첫 단추를 끼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하고 재무이사만 내려가서 맞이할 겁니다. 다들 일하느라 바쁜데 뭐하러 시간 내서 일부러 그래요?”

“저, 회장님. 맞이하는 데 소홀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겠습니까.”

“보통 회사에서 세무조사가 나오면 어떻게 하던가요? 회계팀에 맡기고 보고만 듣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저희는 중소기업이 아니니까요.”

임원이 말을 흐렸다.

난데없는 불확정 요소에 다들 불안해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그냥 세무조사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을 것이다.

이삼십 년간 일하며 온갖 상황에 맞닥뜨려 본 임원진이 이렇게 긴장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번 조사에는 불확정 요소가 너무 거대했다.

“오히려 소수가 나가서 맞이하는 게 좋을 겁니다. 지산은 순수하게 환영하려고 나간 게 아니거든요.”

“세무조사를 순수하게 환영하는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회장님.”

“아뇨. 지산은 일부러 조사팀의 기를 죽이려고 한 거예요. 그때 국세청에서 백 명이 넘는 수가 파견되긴 했지만 계열사마다 나뉘어서 갔잖습니까. 한 회사당 5~10명이 할당된 셈인데 모든 계열사가 임원, 직원 할 것 없이 우르르 몰려 나가서 맞이했죠. 그게 정말 진짜 환영이라고 생각합니까?”

회장의 책상 앞에 선 임원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많아봤자 10명, 공무원이 줄줄이 들어온다.

딱히 대형을 만든 것은 아니다.

로비에 들어가자 수십 명의 임원, 직원들이 늘어서 있다.

이런 내성이 없는 공무원이라면 들어가자마자 기죽기 십상이다.

임원은 작게 혀를 찼다.

“지산이 초장부터 누르겠다고 숫자로 밀어붙였군요.”

“우리까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에요. 다만 예의는 보여줘야 하니 제가 나갈 겁니다.”

“아, 그래서…… 하지만 그럼 오히려 격이 안 맞잖습니까. 거기서 오는 책임자가 국장이나 과장급은 된답니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임원은 정색하며 회장을 만류했다.

“아뇨. 국세청에서는 최고의 선봉을 보냈잖습니까. 그 진심에 보답해 드려야죠.”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중대한 사태에 회장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없었다.

오히려 재밌겠다는 표정이었다.

임원이 그를 따라 복도로 나가며 물었다.

“회장님은 걱정도 안 되십니까? 무슨 친구라도 데리러 가는 것처럼 신나 보이시는데요.”

“최 상무님, 어렸을 때 말입니다.”

뚜벅뚜벅, 복도에 한 명의 발소리가 울렸다.

복도의 반대편 끝에서 짙은 감색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네모난 안경은 도수가 많이 들어갔는지 눈가의 얼굴 윤곽까지 굴절시켰다.

부회장이 아직 공석인 한울에서는 그가 2인자나 다름없었다.

재무이사가 도착하자 셋은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회장은 재무이사에게 별다른 설명 없이 상무에게 하던 말을 계속했다.

“누가 우리 반에서 급식비를 훔쳐갔대요. 당연히 반이 뒤집어지고 난리가 났단 말입니다. 선생님이 매를 들고 와서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벼르는데 거기서 겁먹은 애들은 없었어요. 다들 누가 범인인지 찾는데 재미 들려서 추리하고 그랬지.”

방금 온 재무이사 입장에서는 회장의 말은 앞뒤 문맥 없는 경험담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는 회장의 말뜻을 재빠르게 잡아냈다.

“강 건너 불구경 하셨군요. 내 일만 아니면 재밌죠.”

상무가 앞서 걸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말씀이신지는 이해했습니다. 잘못한 게 없으면 찔릴 게 없다는 말씀 아닙니까. 하지만 회장님, 상대는 그 신재현입니다. 시총 4위였던 그 지산을 8위까지 떨어뜨린 괴물 같은 전적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작정하고 회사 부수기로 마음먹으면 아작납니다.”

회장은 소리 내어 웃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왜 다들 그 사람이 대기업을 적대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기자회견이나 국감 같은 곳에서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탈세하는 사람이 적이라고. 우리가 탈세를 했습니까?”

옆에 있던 재무이사가 어깨를 펴며 칼 같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우리가 불법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까?”

이번엔 상무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떳떳합니다!”

“그럼 됐습니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올라탄 것은 회장과 재무이사 둘뿐이었다.

상무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회장님!”

“그래요. 걱정 말고 업무로 복귀하세요.”

“넵!”

상무를 뒤로 하고 엘리베이터는 멈추는 일 없이 1층으로 향했다.

로비에서 내리자마자 그를 알아본 직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해주고 나자 직원들은 각자 할 일을 하러 움직였다.

로비 한가운데에 회사의 1인자와 2인자가 서 있는데도 직원들이 신경 쓰는 기색은 별로 없었다.

회장이 정문을 보며 말뚝처럼 서 있자 직원들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인사만 건네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정문 앞에 자동차 여러 대가 멈춰 섰다.

올 것이 왔다.

단색의 정장을 입은 남녀 혼합의 공무원 무리가 우르르 유리문을 통과해 들어오자 직원들이 회장을 봤을 때보다 더 기겁했다.

회장이야 이 건물에 있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들어오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니까.

공무원들의 인원수는 약 열 명 남짓.

대부분 나이가 30대에서 40대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대기업 직원들과 비슷한 정장 차림인데도 이들에게서는 절도가 느껴졌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점점 커졌다.

로비에 있던 직원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유리문을 등지고 들어선 일단의 무리들은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잔뜩 겁먹은 직원들의 눈에 이들은 형을 선고하러 온 집행자처럼 보였다.

건물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그들의 뒤를 비추자 신비로움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걸음을 멈춰 선 직원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아는 얼굴을 찾았다.

다들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역시 딱 한 명, 절로 눈길이 가는 청년이 있었다.

이 무리에서 가장 어려 보이지만 주눅 든 기색은 없었다.

나이로 보면 여기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가장 어울리는 사람.

신재현이 자신에게 쏠리는 눈길을 느끼고는 직원들에게 가볍게 웃어 보였다.

“여유 있네…….”

“많이 다녀본 티가 나요.”

수군거리는 직원들 앞에서 공무원들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울의 한우렬 회장님 되십니까?”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울의 한우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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