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빈손으로 안 가요 (1)
원장실에서 나온 후 나는 전체적으로 모든 사무실을 한 바퀴 돌았다.
교육원에 있었던 기간은 길지 않고, 그나마도 중간에 제주세무서로 파견 가느라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 없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건 내 사정이고, 같은 지붕 아래에서 함께 생활했으니 적어도 떠나는 인사는 해야지.
처음부터 교육원은 내게 잠시 머물 곳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만남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고 사회생활이다.
내게 여유가 있었다면 뭐라도 돌렸겠지만 그건 조금 무리고.
교육원의 직원들도 내게 그런 거창한 것을 바라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황민우와 함께 일일이 사무실을 찾아다녔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벌써 가는 거예요? 하긴, 신재현 선생님은 여기 계실 분이 아니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거니 아쉽다는 말은 못하겠네요.”
이런 식의 인사가 주류였다.
다만 조금 의외였던 것은 내게 호의적인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교육원에 오고 나서 조용한 날이 없었을 텐데.
원장과 날을 세우며 싸우기도 했다.
아랫사람이 교육원의 책임자와 본격적으로 얼굴을 붉히고 싸우는 것은 다들 싫어할 줄 알았다.
“몸 건강하게 잘 지내요. 뉴스에서 종종 소식 볼 수 있으면 더 좋겠네요.”
뉴스에서 보고 싶다니 더 날뛰어달라는 뜻인가.
꽤 이상한 방식의 응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금 귀찮지만 모든 직원과 교수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남은 것은 심세광 교수와 이제학뿐이었다.
오늘 하루 떠날 준비와 인사만 하기로 작정했음에도 인사에는 시간이 꽤 잡아먹혔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 둘에게는 시간을 얼마 쏟아부어도 부족했다.
먼저 심세광은 겉으로 보기엔 수수한 노학자처럼 보이지만 교육원의 숨은 실세였다.
내가 교재 만드는 것을 도와준다는 명목 하에 교수 휴게실로 불러 다른 교수들이 보는 앞에서 시험을 한 사람이기도 했다.
파벌을 형성할 정도는 안 되지만 그 노교수를 은사로 여기는 사람들은 꽤 된다.
적으로 돌리면 앞으로 내가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나는 그가 원한다면 1시간이고 마주 앉아 대화라도 나누려고 했는데 그는 본론부터 꺼냈다.
“신 선생님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이걸 꺼냈습니다.”
심세광이 보란 듯이 책상 위에 올려둔 것은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수첩이었다.
옛날 어른들이 연락처를 적을 때 쓰던 전화번호부다.
그는 수첩 안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그 수첩을 어떻게 썼는지는 넌지시 알려주었다.
“꽤 오래 연락을 안 했는데도 제자들이 반갑게 받아주더군요. 제가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나 봅니다.”
심세광은 사람 좋게 웃더니 가느다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어디로 가실지 몰라서 현재 서울청과 국세청에 있는 제자들에게 모두 연락을 돌렸습니다. 정식 발령이 나오고 나면 다시 한번 수도권의 제자들에게 연락을 돌리겠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이상한 데서 훼방을 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뿐이군요.”
말은 쉽게 했지만 결코 ‘뿐’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가 아니다.
처음 만나는 한 명과의 관계도가 중립이라고 했을 때 그를 나의 편으로 만들기는 굉장히 어렵다.
때문에 보통은 약간의 호의를 가진 상태, 그러니까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에서 날 도울 수 있는 친밀도만 되어도 꽤 성공이다.
그런데 지금 심세광 교수는 그 작업을 나 대신 해준 것이다.
사실 그가 교육원에서 오래 지내고 덕망 있는 교수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부터 이렇게 되지 않을까 약간 기대는 했다.
그것 때문에 그를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심세광이 어디까지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니까.
이왕이면 날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좋겠지만 대놓고 요구하면 오히려 반감을 살까 봐 이렇게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던 건데.
그는 나에게 먼저 작별 선물을 준 것이다.
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숙였다.
“큰 선물입니다. 이렇게까지 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대는 했잖아요?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맨손으로 보낼 수는 없죠.”
부드러운 노교수의 말투에서는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단순히 지식이나 연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손에 쥐여 주면서도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그때는 교재 집필을 도와주시겠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것만 도와주셨다 해도 저는 쭉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안고 교육원을 떠났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연히 받아야 하는 성과가 아니니까요.”
내 노력의 결과로 받아야 하는 거라면 상대가 주지 않아도 받아간다.
상대에게 있는 것이 명확하게 내가 노리던 것이었으면 다른 수단을 써서라도 받아간다.
그러나 이번 그의 호의는 ‘기대’는 했지만 반드시 받을 거란 확신은 없었다.
“그러니 교수님께서 주신 것은 큰 선물입니다. 제가 어떻게 보답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호의는 고맙지만 혹시 계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넌지시 떠보았지만 노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 선생님이 생각한 것만큼 큰 선물은 아닐 테니까요. 저는 그저 이렇게만 말했거든요. ‘불필요하게 훼방을 놓지 마라’고.”
“그렇습니까.”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날 도우라고 하지 않았다.
‘불필요하게’ 훼방을 놓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여전히 개개인을 만나 호감을 사는 것은 나의 역할이고, 날 도울지 말지는 제자인 그들의 판단이다.
“이해했습니다만 그래도 교수님께는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그거면 한 계단 위에서 시작하는 거나 다름없죠. 요즘 세상에서 시작점이 다르다는 건 큰 이점이 됩니다.”
그리고 교수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그것이 한계였을 것이다.
자기 세력을 갖춘 사람도 아니고 제자들에게 자기 뜻을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은사가 신재현을 도우라고 한다고 해도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로서는 자신의 최선으로 날 도운 거나 다름없다.
그 뜻은 존중해줘야지.
“그렇습니까…….”
노교수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느닷없이 일어나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보다 약간 아래에 있는 시선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길은 따가웠지만 적의는 없었다.
“손경진 원장님이 왜 신 선생님에게 지고 나서 순순히 물러났는지 알 것 같네요.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어요.”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노교수가 빙긋 웃었다.
“본인뿐 아니라 상대하는 사람의 상황, 그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그 전력이 객관적으로 파악이 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합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이 이미 있군요. 그 어린 나이에.”
나에 대한 평가인가보다.
꽤 후한 점수였다.
“과찬이십니다.”
“원장님은 욕심이 많고 냉철하지만 속이 좁은 분은 아니니까요. 신 선생님 같은 사람과 적이었다고 해도, 결국 같은 국세청의 사람 아닙니까. 그걸 생각하면 분노도 허탈함으로 바뀌는 겁니다.”
심세광은 씁쓸하게 웃었다.
교수들도 손경진과 나의 기 싸움을 알고 있었구나.
하긴, 아무리 둔하다 해도 그렇게 서로 잡아먹을 듯 싸웠는데 이상함을 못 느낄 리가 없지.
그렇다면 교수들이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 데는 심세광의 존재가 한몫했을지도 모르겠다.
내 머리가 복잡하게 굴러가는 동안 심세광은 말을 이었다.
“열등감, 질투조차 들지 않죠. 까마득하게 어린 후배에게 추월당했는데 그런 감정조차 사치 아닙니까. 거기에 국세청의 미래가 밝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면서 만사 포기하게 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신 선생님의 상사되는 분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떠날 때가 되어서인지 심세광은 묻지도 않은 것까지 설명해줬다.
지금이라면 뭘 물어봐도 대답해줄 것 같아서 나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다른 교수님들께서 싸움에 끼지 않도록 언질 주신 게 교수님입니까?”
심세광은 환하게 웃었다.
이제야 알아챘냐는 표정이었다.
“교육생에게 안 좋은 모습 보여줄 수는 없잖습니까. 아직 세무서 문턱도 안 밟아본 새싹들인데 멋진 것만 보여줘야죠. 그리고 교육원까지 반으로 갈라지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홍 교수가 그렇게 나왔으니…… 제가 너무 무르게 말했나 봅니다.”
심세광과는 달리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혼란을 만든 건 나였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겨우 두어 달 남짓 있었는데 너무 시끄럽게 만들었군요.”
“손경진 청장이 원장으로 온 이상 한 번은 겪어야 했을 일입니다.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죠. 그래서 신 선생님에게 걸어보기로 한 겁니다.”
그가 왜 나를 돕기로 했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원장님이 부임한 순간 어쩌면 여기도 피바람이 불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 선생님이 내려왔을 때는 솔직히 국세청 쪽의 판단을 의심했고요. 하지만 훌륭하게 원장님의 미련을 잘라냈죠. 이제 교육원은 그 어느 때보다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제 예상이 빗나간 것이 이렇게 기분 좋았던 적이 없습니다.”
심세광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조금은 내 죄책감이 옅어져 갔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도 죄송하다는 말씀은 더 드리지 않겠습니다. 좋은 기억만 갖고 돌아가겠습니다.”
심세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정말 작별이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심세광이 뭔가를 떠올린 것처럼 덧붙였다.
“이번에 나간 우리 교육생들, 필드에서 만나면 잘 좀 가르쳐줘요. 이번 기수는 유난히 의욕이 넘치는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이 또한 내 업보다.
나는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들른 곳은 이제학의 방이었다.
그는 교육생들이 다 떠나 한가한 지금도 최신 판례를 인쇄해 들춰보고 있었다.
바쁘게 형광펜을 긋던 그가 우리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가 도로 시선을 내렸다.
“바쁘신 분들이 뭘 일일이 돌아다니고 계십니까. 할 말은 다 했고, 알려드릴 것도 전부 전수했습니다. 아니면 뭘 더 저한테 뽑아갈 게 남았습니까?”
장난스러운 그의 말에 우리는 피식 웃으며 테이블 앞에 앉았다.
자주 드나들어서 이젠 익숙해진 우리의 자리다.
그러자 이제학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저희 이제 갑니다.”
“네네. 가세요. 이제야 좀 조용해지겠군요.”
말은 저렇게 해도 섭섭해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나와는 눈도 안 마주치려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그러나 나는 떠날 사람, 더 깊게 얘기해도 어쩔 수 없기에 일부러 매몰차게 대하는 것이다.
관심 없는 척하지만 테이블에 앉아 말을 걸면 꼬박꼬박 대답하는 것부터가 이미 관심도를 온몸으로 티내고 있다.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내려던 생각을 바꿨다.
뭘로 화제를 이어갈까, 가만히 이제학의 연구실 안을 둘러보던 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흰색 바탕이 많은 다른 교재와 다르게 짙은 푸른색이 들어간 책이다.
익숙한 그 책등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저게 왜! 저깄습니까, 교수님!”
내가 가리킨 책을 본 이제학이 나와 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두 분이 쓰신 세무조사 실무교재 말입니까? 당연히 여유롭게 인쇄해서 모든 교수들한테 돌렸죠. 참고자료로.”
“모든 교수님들한테요? 도대체 왜 그런 짓을…….”
나와 황민우는 망연자실하게 자리에 늘어졌다.
이제학은 우리의 반응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시선도 안 맞추던 그가 웃음을 되찾은 거야 반갑지만 지금 상황은 마냥 반가워할 때가 아니다.
이제학이 아예 책장으로 다가가 거기 꽂혀 있던 우리 책을 빼려고 했다.
안 돼, 하고 황민우의 단말마가 들린 것 같았다.
그가 얼른 내게 턱짓했다.
이제학을 놀리려다가 오히려 우리가 놀림 받게 생겼다.
본전도 못 찾은 나는 그의 주목을 끌기 위해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이제학 교수님, 실무로 복귀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으엥?”
효과는 대단했다!
이제학은 자신이 뭘 하려던 건지도 까먹고 책장 앞에 우뚝 멈춰 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세무서로 복귀를 해요?”
“네. 물론 이제학 교수님이 원하셔야겠지만요.”
그에 대해 조사했을 때 민치호가 했던 말이 있다.
잡으라고.
교육원도 당연히 중요한 기관이지만 그는 아직 교단보다는 세무서가 어울린다.
그가 거절해도 나쁠 것은 없다.
그때는 손경진의 감시를 맡기면 된다.
절대 손경진과 손잡지 않을 사람이며 믿을 수 있으니까.
제안을 받아들여 실무로 돌아온다면?
더욱 좋다.
민치호의 휘하가 한 명 더 생기는 거다.
왔을 땐 빈손이었지만 갈 땐 뭐라도 들고 가야겠다.
아까 심세광 교수 때는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지만 지금은 의도한 행동이다.
나는 확실하게 그를 잡아 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