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17화 (317/500)

317화. 어느 대기업의 혼란 (2)

“다른 분들은 나가시고 한 엔터테인먼트 대표는 남으세요.”

회장의 말이 떨어졌을 때 임원진들은 다들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회사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는 중대한 시점에 회의 내내 실실 웃던 막내아들이다.

본인은 숨긴다고 숨겼지만 입술을 꽉 깨문 채 올라가는 입꼬리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덕분에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임원진은 막내아들 한대희를 한 번씩 흘겼다.

‘된통 혼나겠군. 아무리 회사에 관심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저런 반응을 하나.’

그러나 오너 가족 모두와 임원진이 회의실을 나간 후에도 그들이 예상했던 호통은 없었다.

오너 가족에게 배치된 자리 중에서도 말석에 앉아 있던 막내아들은 지금도 웃음을 참고 있었다.

회장 한우렬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너는 인마, 왜 거기서 웃고 그래? 심각한 얘기 중인데 웃음이 나오냐?”

회장이 아닌 어디까지나 아버지로서 나무라는 말투였다.

상대가 장남이나 차남이었다면 사적인 자리에서도 경영자로서 꾸지람을 했겠지만 막내아들에게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만큼 막내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회사 경영이야 아버지랑 형들이 알아서 하실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게 정말 위기긴 해요?”

이젠 아예 참지도 않고 피식 웃는 막내에게 회장이 질문했다.

“뭘 알고나 말하는 거야?”

“회사에 관심도 없는 제가 뭘 알겠어요. 제가 아는 건 그분에 대해서죠. 아니, 그렇다고 잘 아는 건 아닌데…….”

한대희가 갑자기 생각에 빠지더니 뒷머리를 긁었다.

회장은 어이가 없어져서 소리를 질렀다.

“좀 진지하게 해라! 오늘 일부러 부른 건데 그렇게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어떡하냐…….”

“한울 계열사도 아니고, 한울에 비하면 코딱지만 한 기획사 하나 갖고 있는 절 부른 이유가 이거였어요? 아버지, 혹시 제가 회장 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회장이 미간을 모았다.

“네가 능력이 있다면 막내여도 상관없지. 생각은 있고?”

“아뇨. 당연히 없죠. 저는 지금 누구 하나에 꽂혀서 다른 걸 생각할 틈도 없거든요.”

“그래, 아직 신혼일 때지. 며늘아기가 예쁘고 참하긴 하더라. 그렇다고…….”

“음? 우리 여보님이 사랑스러운 건 당연한 거고요. 0순위 말고 다른 사람 얘긴데요.”

“며늘아기가 0순위야? 그럼 누구에 꽂힌 건데?”

“있어요. 크흐흡!”

다시 기묘한 웃음을 흘리던 한대희가 입을 틀어막았다.

회장의 기세가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놈의 자식이! 혹시라도 길 안 터줬다고 불평할까 봐 시작점 잡아주려고 했더니! 정말 경영에 관심이 없다고? 나중에 와서 한울을 갖고 싶다고 해도 그땐 안 봐줄 거다!”

“됐어요. 싸우는 것도 싫고. 아버지 보면 여러모로 고민하는 것도 많아 보이고. 3대 회장을 합의로 뽑겠다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이는데…… 그분을 너무 쉽게 본 건 아니죠?”

회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막내아들을 바라보았다.

가출이나 해서 난데없이 며느릿감을 데리고 들어온 철부지인 줄 알았더니 지금 말투는 어쩐지 이상했다.

“그분? 네가 말하는 그분이 누군데.”

“아버지가 끌어들이려는 사람이요.”

“너, 너 뭘 알고 하는 말이야?”

회장이 미간을 좁혔다.

그동안 자신이 아는 아들은 철부지 어린아이였다.

부모가 마련해준 계열사 사장 자리를 걷어차고 집을 나가서 사업체를 차린 철부지 말이다.

그런데 지금 하는 말이 의미심장했다.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글쎄요. 단순한 공무원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잖아요. 이건 조금만 생각하면 다들 아는 얘기 아닌가?”

회장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몇 달 전 있었던 전국경제인연합회.

재계 인물들이 모여서 술이나 먹고 잡담하는 자리다.

거기에는 한울의 회장도 있었다.

그리고 지산의 회장 지창태와 성화의 회장 성주림이 하는 말을 들었다.

다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으니 재계 서열 10위인 한울의 회장인 한우렬이 모를 리가 없긴 하다.

-우리는 그저 거대한 장막의 끝부분만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재현은 그 장막의 칼날이죠.

거기서 나왔던 말이다.

응당 대기업은 상황을 분석하는 기획실을 다들 갖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재계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에 대해서도 분석한다.

각 기업의 기획실들이 그렇게 입을 모아 말했다는 것은 신재현이 단순한 공무원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지원실에서 말해줬냐?”

“거기 친구들은 아버지에게 충성하잖아요. 아버지 허락 없이, 아버지 몰래 제게 정보를 줬겠어요?”

진지하게 후계를 노리는 장남이나 차남이라면 회장 몰래 지원실에 자기 사람을 심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회장의 용인 하에 가능한 것이다.

누가 장남의 사람이고 누가 차남의 사람인지 회장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지원실에서 나가는 정보도 회장이 허락한 선에서만 가능했다.

그러니 둘 중 하나다.

정말 다른 곳에서 정보를 얻었거나, 회장 몰래 전략실을 구워삶았다는 말이 된다.

어느 쪽이든 말이 안 된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그분을 끌어들였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근데 어차피 그분이 오시기로 한 이상 못 피하니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죠. 자연재해는 피할 수 없으니까요.”

“……내가 일부러 끌어들인 건 아니야. 나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대기업은 사전에 상속 준비 작업에 들어가면 국세청이 귀신같이 알고 대비하잖아.”

아마 상속에서 가장 큰 탈세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한울도 그 사전 조사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거기에 신재현이 끼어 있다는 통보가 온 순간 회장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임원들의 말이 맞다.

이 이야기가 퍼지면 바로 주가가 폭락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다른 대기업들도 신재현의 방문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 또한 회장의 진심이었다.

임원들에게 말한 것처럼 단순히 신재현이 젊고 앞날이 창창해서는 아니다.

그는 장막의 바로 앞에서 움직이는 칼이니까.

금력을 견제하기엔 딱인데 가만히 놀게 놔둘 리가 없다.

뒷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까지 생각이 가능하다.

그런데 정보통도 없고 재계인연합회에 참석하지도 않았던 막내아들이 의뭉을 떠는 것이 혼란스러웠다.

“이놈아! 제대로 말해! 혹시 며늘아기가 말해준 거야?”

“그 사람이 뭘 말해요? 그분이 친척이라고 그런 중요한 내용을 오너 직계 가족에게 말해주실 것 같습니까?”

“그야 그렇지. 아니, 그러면 대체 어떻게 알았냐니까?”

“깊은 관심이 있었다고만 해 두죠. 그리고 아버지가 잘못한 것만 없으면 딱히 걱정할 건 없을 거예요. 그분이 없는 일을 만들어내서 터는 분은 아니잖아요. 잘못한 만큼만 때리는 분이지. 저는 아버지를 믿습니다. 부끄러운 짓은 안 하셨죠?”

“애비를 뭘로 보고! 당연히 당당하지! 그래, 말해주기 싫으면 더는 묻지 않으마. 근데 딱 하나만 말해라.”

회장은 새삼 진지한 눈빛으로 아들에게 물었다.

“대체 왜 신재현을 그분이라고 부르는 거냐?”

“아, 그거요? 되게 간단한데. 제가 여러 스타들을 보고 느낀 거예요. 간혹 어떤 사람들은 빛을 품고 있더라고요.”

막내아들은 매우 당연한 이치라는 것처럼 대답했다.

“그분은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습니다. 장담하는데, 그분은 더 먼 곳으로 올라갈 겁니다. 수많은 재벌 회장들이 고개를 조아려야 할 정도로요.”

***

한겨울의 교육원은 조용하고 추웠다.

나는 관사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멍하니 바닷바람을 맞았다.

할 일이 없어서 나와 있는 거라기보다는 어쩐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나는 손에 든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소나무 위에 쌓인 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보고 있는 것은 눈이었지만 나는 좀 더 먼 곳을 떠올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며칠 전 서울의 한 술집을 떠올렸다.

도수가 40도는 훌쩍 넘어가는 술을 연달아 비우면서도 나는 필름이 끊기지 않았다.

그날의 대화만큼은 절대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술판이 벌어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부산청장이 신이 나서 본인이 원하는 술을 시켰다.

민치호가 구박을 하면서도 시원하게 카드를 긁었고, 우리는 귀가를 포기한 채 근처 모텔을 잡았다.

다음 날 민치호와 이선균은 곧장 서울청으로 출근했다.

우리를 약 올리는 것은 덤이었다.

‘직장이 가까우니까 좋구만. 이래서 집은 회사 근처에 구해야 되는가 봐요.’

부산청장은 분노해서 소리쳤다.

‘나도 부산청 근처에 살아요! 집이랑 직장이 10분 거리라고! 다음부터는 부산에서 만나! 민 청장이 부산으로 내려오라고요!’

나도 교육원 관사에서 살고 있으니 실제로는 출퇴근이 걸어서 10분도 안 걸린다.

그걸 알면서도 민치호는 얄밉게 웃으며 서울청으로 떠나갔다.

이선균은 술 마신 티는 일절 나지 않는 반듯한 모습으로 손을 흔들었다.

‘금방 또 봅시다.’

진짜 작별이 아니니 인사는 짧았다.

당장 내일 볼 사람처럼 우리는 헤어졌다.

오히려 날 놔주지 않으려 한 것은 부산청장이었다.

‘나중에 또 같이 술 먹어줘야 합니다. 귀찮은 아저씨라고 따돌리면 안 돼요. 알았죠?’

그러면서 전날 술집에서 산 웬 양주 한 병을 선물로 안겨주었다.

평소 받은 것은 작은 병이었지만 이번 것은 명실상부한 700ml짜리 한 병이다.

나는 이번엔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그렇게 비싼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술 땡기는 날, 딱 한 잔씩만 마셔요. 간은 소중하니까.”

그렇게 가져온 술은 지금 제주도 관사의 짐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아쉽게도 봉인조차 못 뜯었다.

도로 서울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삐비빕!

요란하게 새들이 난리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하도 조용하게 있었더니 풀숲에 새들이 몰려와 있었다.

눈을 헤치고 뛰노는 저 초록색 새는 동박새다.

그러고 보니 교육생 중에 새를 좋아하는 친구가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 겨울에 흰머리오목눈이를 못 봤다고 통탄하던 친구였다.

버스를 타는 순간까지도 제주도에만 있는 귀한 새, 그러니까 제주오목눈이를 못 봤다고 한탄하며 돌아갔다.

제주도에만 사는 귀한 제주오목눈이는 아니지만 저기 붉은 동백꽃 근처로 총총 다가가는 동박새도 꽤 예쁘다.

특히 눈가에 흰색 띠가 둘러져 있는 것이 매력적이다.

새를 보고 있자니 두근거리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민치호는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다.

그는 날 절대 버티지 못할 곳에 보내지 않는다.

민치호는 종합적인 판단이 꽤 정확하다.

그가 날 보내기로 마음먹었으면 나는 그의 칼로서 결과를 내 주면 된다.

뒤에 어떤 계획이 있든 결국 나중엔 다 설명해줄 것이다.

지금 말하지 않는 것은 내가 잡생각에 한눈팔지 않고 일직선으로 나가길 원하기 때문이다.

“좋아, 생각 정리 끝!”

나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고민은 끝났다.

한가하던 일상도 끝났다.

마지막으로 교육원을 한 바퀴 돌며 인사하면 올라갈 준비는 끝난다.

나는 가장 먼저 교육원장에게 향했다.

***

손경진은 내가 들어가자마자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까지 기뻐하면 섭섭한데.

“드디어 가나? 내 목에 칼 들어온 기분이라 답답해 죽는 줄 알았는데. 이제 좀 발 뻗고 잘 수 있겠군.”

“그래도 가장 먼저 인사드리러 온 건데 너무 대놓고 내쫓으시려는 거 아닙니까?”

“당연히 대놓고 해야지. 그럼 뒤에서 암약해줄까?”

“그건 절대 아닙니다.”

내가 정색하며 답했다.

이 양반이 모든 걸 내려놓고 홀가분해진 건 좋은데 간혹 저런 민감한 내용을 갖고 농담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얼른 대답하는데, 그러면 손경진은 재밌다는 듯 웃곤 했다.

“저는 교육원에서 즐거웠습니다. 원장님께서도 상사의 모범을 보여주신 덕에 저도 많이 배웠구요. 앞으로도 좋은 분으로 계셨으면 합니다.”

정중하게 말하긴 했지만 경고라는 건 우리 둘 다 안다.

손경진은 에이, 하고 손을 흔들었다.

“재미없게. 어차피 교육원 안에 사람 심어놨잖아. 맞지?”

“제가 어떻게 감히 교수님들을 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교수를 구워삶았단 뜻이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교수들이 내 편이라는 것을 살짝 내비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눈이 뒤집힐 때가 있어. 분노, 욕심 뭐 대충 그런 게 이성을 좀먹을 때지. 나도 분노가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닌데, 막상 제주도 내려와 보니까 풍경도 좋고 은퇴지로는 딱 좋더라고. 그래서 여기서 분노 좀 삭혀보려고. 여기가 내 종착지라고 생각하니까 생각보다 할 만 하더라.”

나는 조심스럽게 손경진을 살폈다.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내 눈을 피하려고 속마음을 숨기는 것이라고 해도 교육원의 교수들은 절대 파란의 징조를 가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놈의 민치호한테는 나 건들지 말라고나 전해. 가만히 냅두면 나도 그냥 여기서 은퇴할 테니까.”

확답은 들었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정중하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였지만 내 상사였으며, 이 교육원의 책임자이자 까마득하게 높은 고위공무원에게 하는 인사였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작별의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손경진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재밌었다. 앞으로 네가 어디까지 갈지 즐겁게 지켜보마. 적어도 나보다는 멀리 가야 해.”

그다운 격려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