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16화 (316/500)

316화. 어느 대기업의 혼란 (1)

한울 그룹 본사 회의실.

회장과 그 직계 가족, 그리고 상무와 전무 등의 주요 임원들이 참석한 자리였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지산과 비슷했으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여기는 사촌, 즉 방계혈족도 끼어 있었다.

지산 같은 경우엔 철저하게 직계만 놔두고 모조리 쳐내 회장 단 한 명에게만 모든 결정권이 모이는 철옹성 같은 구조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재벌이 그런 식으로 기업을 지배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조그만 것 하나만으로도 다툰다.

그것은 피를 나눈 부모 자식, 형제간이어도 마찬가지였다.

그 옛날 왕의 자리를 두고 혈족 간에 피를 튀기고 싸웠듯이 현대에는 권력과 돈을 두고 싸운다.

그것이 기업 총수 단 한 명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재벌의 형태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대부분의 재벌이 후계자만 놔두고 나머지 아들딸은 조그마한 회사 하나씩 들려서 내보내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형제끼리 싸우다 회사를 말아먹는 경우도 생기니까.

한울은 그런 의미에서 조금 특수한 경우였다.

1대, 그러니까 창립자였던 한울의 초대 회장은 딸 셋밖에 없었다.

그는 고민 끝에 한울을 제외한 다른 재벌가 쪽에 초청장 형식의 제안서를 넣었다.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세 딸이 평생을 함께할 배필을 찾고 있습니다. 첫째 조건은 딸을 아끼고 사랑해줄 것. 둘째 조건은 회사를 경영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것. 셋째 조건은 저희 한울의 사람이 될 것. 이상의 조건에 거리낌이 없으시다면 부디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으면 합니다.

초청장을 받은 재벌가들은 생각했다.

한울을 먹을 좋은 기회라고.

조건이 셋이나 됐지만 그건 사실 뜯어보면 별것 아니다.

재벌끼리 결혼하는 일은 그 당시에 흔했고 자녀끼리 사랑은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같이 살다 보면 사랑이 생기는 법이니 으레 아버지로서 넣어둔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조건도 사실 당연한 것이다.

한울에 아들이 없다는 것은 다들 아는 일이었다.

그런 한울에서 사윗감을 구한다는 것은 곧 경영권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구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셋째 조건도 기실 당연한 것이다.

한울을 물려줘야 하니까.

이 당연한 조건을 보고 재벌가들이 파격적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 방식에 있었다.

좋게 말하자면 사윗감 간택이다.

그러나 욕심으로 가득 찬 재벌가들 입장에서는 경매를 열겠다는 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비싼 값을 부르는 사람에게 딸과 한울을 넘기겠다.

다들 추악한 속내를 갖고 보니 당연히 한울도 그런 속셈일 것이라 여겼다.

그렇다면 몰래 매파를 보내 조용히 혼담을 진행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저렇게 공개적으로 구혼을 진행하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한울은 당시 대기업으로 쑥쑥 성장해가던 견실한 회사였다.

한울의 딸이 셋이니 남아도는 아들 하나만 보내서 한울을 찢은 후 셋 중 한 조각만 먹어도 이득인 장사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큰 회사에서 이제 막 상장한 작은 회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업에서 혼담이 왔다.

수 백 명이 이력서를 넣듯 맞선 제안이 왔다.

장장 3년에 걸친 면접과 연애 끝에 세 딸은 각각 자신의 맘에 드는 남편감을 골랐다.

이제 남은 것은 한울이 셋으로 쪼개지기만을 기다렸다가 한입에 삼키는 것뿐이다.

그런데 상황은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초대 회장은 사위가 아닌 세 딸에게만 지분을 나누어주었다.

회사의 지분은 딸이, 경영은 사위가.

단, 가장 능력 있는 자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회장의 선언이 있었다.

그렇게 세 팀이 경쟁했다.

아들을 보낸 세 재벌가는 당황했다.

딸을 구워삶아 세 조각으로 찢어먹는 건 쉬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울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 딸과 세 사위가 경쟁하며 점점 한울은 커졌다.

재계서열 20위에 들자 사위를 향한 본가의 닦달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세 사위의 생각은 점차 변해가기 시작했다.

세 사위는 어찌 보면 본가에서 밀어낸 버림 패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본가의 명령대로 한울을 쪼개려 왔지만 함께 살다 보니 한울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한울을 쪼개서 들고 가봤자 회사는 후계자인 형이 먹을 것이다. 내가 생고생해서 남 좋은 일 시키는 것 아닌가? 차라리 여기 남아서 한울의 정식 후계자가 되는 게 좋지 않을까?

한울의 행운이라면 초대 회장이 오래 자리에서 버틴 것이었다.

사위들이 진짜 한울의 사람이 될 정도의 시간 동안 총수로 있었으니까.

그들은 사랑도 없는 정략결혼을 강요한 본가에 학을 뗐고, 어차피 이렇게 된 것 한울에 남아 아내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세 딸이 수백 명의 신랑감 후보 중 골랐으니 그 셋의 눈이 꽤 정확하다고 볼 수 있겠다.

한울의 회장이 노쇠하여 물러날 때쯤에 세 사위는 말 그대로 한울의 사람이 된 후였다.

그의 뒤를 이어 둘째 사위가 총수가 된 후에도 그는 첫째와 셋째를 내칠 수 없었다.

같은 처지였기 때문에 생긴 동질감인지, 아니면 나머지 두 딸이 갖고 있는 지분 때문인지는 모른다.

다만 세 부부는 싸우지 말자는 데 합의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딸들도 경영 일선에 나서며 각각 계열사의 경영을 하나씩 가졌다.

그들이 낳은 자녀들도 일찌감치 경제경영 수업을 거치고 계열사의 사장단으로 부임했다.

다른 그 어느 회사에서도 있을 수 없는 혈족 경영이 그렇게 완성되었다.

서로를 믿는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 한울은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재계 서열 10위에 안착한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시총은 13조, 자산총액은 50조에 달하는 대기업이 된 것이다.

3대로 내려가면서 그들끼리 후계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2세대인 세 부부가 고삐를 잡고 있는 이상 한울에 흔들림은 없었다.

애초에 2세대들은 3세대의 분열이 커지기 전에 알아서 봉합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이 한울의 회의실에 직계와 방계가 모두 모이게 된 이유이다.

“모두 아시다시피 우리 한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합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분열의 원인이 된다면 회장 자리에 앉을 자격은 없어요.”

한울의 회장인 한우렬은 운을 떼었다.

초대 회장의 둘째 사위이자, 과거 한성 그룹의 넷째 아들이었던 남자다.

그의 옆에는 부인이자 하나백화점의 사장인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초대 회장의 둘째 딸인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노려보았다.

“우리마트24 대표님과 한울면세점 대표님, 두 분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경쟁은 어디까지나 서로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하는 거예요.”

공적인 자리라 어머니가 아들에게 ‘대표님’이라고 칭한 것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꽤 냉랭한 어투였다.

앞서 말한 우리마트24는 전국에 꽤 많은 체인점을 갖고 있는 편의점으로, 현 회장의 장남이 맡고 있는 것이었다.

한울면세점은 말 그대로 면세점인데 현 회장의 차남이 경영하고 있었다.

둘은 한울의 회장 자리를 두고 만나기만 하면 다퉜다.

여기까지야 평범한 재벌가 이야기다.

경쟁이 심해지면 서로 심한 말이 오고 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둘이 싸움에 치중하느라 시장 점유율을 빼앗겼다는 점이다.

게다가 막내아들은 집안싸움이 꼴도 보기 싫다며 아예 집을 나가서 연예기획사도 차렸다.

거기서 무명 배우와 만나 결혼까지 했다.

그것도 이해한다.

연애야 할 수 있지.

자식들은 자신처럼 무조건 정략결혼을 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집 나간 아들이 뜬금없이 며느리를 데리고 왔을 때의 기분은 부모로서 말로 형용하기 힘든 것이었다.

“우리 한울은 다른 회사와 다른 역사를 가졌습니다. 그 의미와 우리의 의도를 두 대표님이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때문에 저희 오너 일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회장의 말에 아들들과 임원진이 눈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나올 말은 뻔했다.

후계구도의 언급이다.

후계 싸움에 따라 그룹이 갈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회장의 말에 그룹의 명운이 달린 것이다.

한울의 2대 회장 한우렬은 단호하게 말했다.

“한울의 3대 회장은 능력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격은 비단 이 두 명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죠.”

한우렬의 두 아들이 눈을 부릅떴다.

이 말은 즉 후계 경쟁에 사촌들이 끼어든다는 소리였다.

더더욱 힘들어진단 얘기기도 했다.

“한울은 원래 그랬습니다. 2대 회장인 저 역시 긴 세월 동안 그 능력을 증명하여 총수가 되었죠. 모두의 동의하에 회장이 선발되었기 때문에 한울은 형제의 난 같은 피 튀기는 전쟁은 없었습니다. 다들 납득하셨기 때문이죠. 그 덕에 한울은 그 어느 회사보다 평화로웠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 끈끈한 결속이 한울의 원동력인 거죠.”

한울의 2세대에 해당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초대 회장의 첫째 딸과 셋째 딸 부부도 알고 있는 내용인 듯 조용했다.

그러나 그들을 제외한 모두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당장 후계 싸움에 뛰어들게 된 첫째, 셋째 부부의 자녀들이 그러했다.

이들은 부모들에게 전해들은 바가 없어서 서로 눈알만 데록 굴릴 뿐이었다.

‘3대 회장은 한 씨 일가에서 나오는 거 아니었어?’

‘아 씨, 나 집안싸움 싫은데. 이미 저 둘이 구도 꽉 잡아놨는데 이제 와서 우리보고 끼어들라고 하면 이게 공평한 싸움이 되겠냐고.’

‘회장이고 뭐고 그냥 지분만 떼어주면 좋겠다. 편하게 먹고 자는 게 꿈인데.’

그리고 임원진들은 더욱 큰 혼란 속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이 시점에서 후계 싸움을 더 크게 벌인다고?’

‘회장님이 이번에는 판단을 잘못 하신 게 아닌가?’

‘자칫하다간 지분 전쟁이…….’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근처에 널린 재벌들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다.

“저희 세 일가의 총의입니다. 부디 따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회장님.”

가장 오래 회장을 곁에서 모셔온 충직한 오른팔 역할의 임원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회장에게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그밖에 없다.

임원들은 은근하게 응원을 보냈다.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경쟁하게 될 후보들은 다들 맡은 회사가 있잖습니까. 일단 거기서 어떤 성과를 내는지 보겠습니다. 그리고 3대 회장에 대해서는 여기 있는 분들 모두의 합의 하에 선발할 겁니다. 선대와 똑같이요.”

이런 결과를 내린 것은 사실 막내아들의 가출이 큰 역할을 했다.

집안싸움에 학을 떼고 나가다니 이게 무슨 수치인가.

그만큼 돈 때문에 형제 사이에 금이 가고 있다는 전조기도 했다.

자매간의 합의로 평화롭게 총수가 된 한우렬 회장으로서는 자신들의 방법을 한 번 더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상속 지분을 조절하기 전에 회사의 정리를 한 번 할 겁니다. 그 과정에서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기로 했습니다.”

임원진이 다시 기함했다.

“세무조사라니요! 이 시국에 세무조사라니 말도 안 됩니다!”

“오히려 털고 가는 게 깨끗할 겁니다. 더군다나 조사를 맡을 사람은 바로 그 국세청의 저승사자니까요.”

“회장님! 제정신이십니까! 저승사자라면 신재현 아닙니까! 그 사람이 조사에 착수했다는 소식만 들려도 주가가 단숨에 1조는 증발할 겁니다. 지산의 예를 잊으셨습니까! 아무리 그쪽 집안과 사돈 관계라고 해도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철저하게 털어낼 거예요!”

“그걸 원한 겁니다.”

회장은 단호했다.

임원진의 탄식이 회의실 곳곳에 흘렀다.

“그 저승사자가 지산만으로 만족할 것 같습니까? 그는 아직 젊고 기업은 많습니다. 앞으로 그는 수많은 대기업을 건드릴 겁니다. 매는 먼저 맞는 게 좋아요.”

“굳이 원해서 맞을 필요가 없잖습니까.”

“정식으로 세무조사하는 게 아닙니다. 지분 정리의 감독이에요. 이것도 통과 못 하면 나중에 세무조사는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회장의 뜻은 확고했다.

거기에 첫째와 셋째 부부도 가만히 보고만 있으니 이미 결정은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후계 경쟁과 저승사자의 방문.

폭탄선언 앞에 회의실에 가득 찬 임원들은 하나같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유일하게 신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한울 회장의 막내아들이자 신재현의 사촌 누나와 결혼한 기획사 사장 한대희.

그는 어차피 한번 가출도 했던 몸, 한울의 회장 자리에는 관심도 없었다.

‘아싸, 그분 오신다고 자랑해야지!’

임원들이 들으면 기절할 만큼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막내아들이 철없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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