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15화 (315/500)

315화. 도제식 교육 (4)

라인, 라인이라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분명 민치호에게는 라인이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파벌이다.

민치호를 수장으로 하여 이선균을 오른팔, 나를 왼팔로 두는 하나의 세력을 말한다.

나는 내 일만 할 뿐 파벌확대니 뭐니 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지만 민치호와 이선균은 여러모로 애쓰고 있다고 들었다.

물론 나도 의도치 않게 몇 명 끌어들인 적이 있긴 하다.

예를 들어 부산청에 지원 나갔을 때 만난 박원형이라든가 제주도 교육원에서 만난 이제학 같은 사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명확히 민치호의 사람이 되겠다고 밝힌 것도 아니고 협력자의 위치에 가깝다.

나도 억지로 끌어들이지는 않았고.

다만 민치호 입장에서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실력자를 끌어들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이유는 모른다.

앞으로 할 일에 인재가 필요해서인지, 지금도 또 누군가에게 견제가 필요해서인지 아니면 국세청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위의 이유도 내가 추측한 것뿐이다.

민치호가 어련히 잘 알아서 할 것이고 그를 믿으니까 왈가왈부할 생각도 없다.

이 상황에서 청장급을 끌어들이려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언가 거래를 했다고 해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문제는 부산청장의 말이다.

-민 청장 라인이나 잡아보려고.

그는 스스로 민치호 밑에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의 충격에 내가 뭐라 말을 못하고 입만 떡 벌리고 있자 민치호가 멋쩍게 나무랐다.

“라인이라고 하시니 어감이 좀 이상합니다. 정정해 주세요.”

“사실인데 뭘 이상하다고 합니까. 정 그러시면 이렇게 표현해 드리죠. 앞으로 민 청장님 하시는 일에 적극 돕기로 했어요.”

“좀 낫네요.”

“그 말이 그 말이구만.”

나는 놀란 눈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애초에 청장이 다른 청장 밑으로 들어간다는 상황 자체가 말도 안 된다.

둘은 어디까지나 동등하다.

과장이나 팀장 같은 아래 직급에서야 서로 경력이나 근무지에 따라 서열이 갈릴 수 있다.

국장급끼리도 갈릴 수 있다.

전국에 있는 국장급 합치면 수십 명이나 되니까.

그러나 지청장은 단 7명이다.

서울, 중부, 인천, 대전, 광주, 대구, 부산.

이들은 수십 년을 국세청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며 그 정점이다.

누가 다음 국세청장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세부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미세한 경력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다들 왕년에 한가락 했던 사람들이다.

둘은 어디까지나 동등하며 굳이 근속연수로 따지자면 부산청장이 좀 더 위일 것이다.

아무리 민치호가 현재 국세청 내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동급인 청장이 밑으로 들어가는 건 있을 수 없다.

단순한 자존심 문제가 아니다.

둘이 청장인 이상 그들이 맡고 있는 지방청의 우열이 정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청의 능력 여하에 관계없이 청장끼리의 관계에 따라 청의 위치가 바뀌는 것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부산청장이 스스로 자기 입으로 서울청장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협력 관계가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날 보던 부산청장이 소리 높여 웃었다.

“놀래주려고 말한 건 맞는데 저렇게까지 놀라주니까 고맙네요.”

나는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움직였다.

“당연히 놀랍지 않습니까! 사석이라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죠? 공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실 건 아니죠?”

부산청장이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신 팀장, 무슨 뜻으로 말한 거예요? 아니, 따지거나 혼내려는 건 아니고 뭔가 알고 있는 건가 해서.”

실제로도 부산청장의 말투는 험악하지 않았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투였다.

나는 잠시 민치호의 눈치를 보았다.

편하게 말하라는 듯 시선은 나에게 고정한 채 고갯짓으로 부산청장을 가리켰다.

허락도 떨어졌겠다 나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부산청이 서울청 밑으로 들어가면 어떡합니까. 어느 지방청이든 위에는 본청밖에 없어야죠. 조직도를 새로 바꾸실 생각은 아니시죠?”

부산청장이 말없이 눈만 깜빡이다가 습관처럼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벌써 2잔째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마시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잔을 내려둔 부산청장이 치즈 하나를 집어먹더니 이번엔 커다란 얼음 하나를 넣었다.

저렇게 마셔도 되는 거구나.

부산청장은 내가 아닌 민치호에게 말했다.

“아까 반응 보니까 진짜 몰랐던 것 같은데 듣자마자 정치적 판단이 가능하다 이거네요. 민 청장님, 아까 보고 짐작했지만 진짜 제대로 가르치셨네.”

“양 청장님 같으면 안 가르치겠습니까?”

“저라면 옆에 끼고 데리고 다니죠.”

“저도 그렇습니다.”

평소라면 겸양했을 것이다.

오늘은 면접 일도 있어서 그런지 쉽게 인정했다.

가볍게 웃으며 잔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꼭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영화처럼 멋있다는 게 아니고 영화를 따라 한 것 같다는 뜻이다.

그래도 심정은 이해가 간다.

칭찬하면 고래도 춤춘다는데, 한 편이 되어주기로 한 지청장이 자기 사람을 칭찬하면 좋을 만하지.

물론 나도 좋다.

부산청장은 혀를 차며 민치호를 흘겼다.

“저, 저저 잘난 척은. 부러워서 살겠나.”

부산청장은 다시 진중한 목소리가 되어 내게 설명했다.

“신 팀장 말대로 사석이라 그렇게 얘기한 게 맞아요. 하지만 밖에서도 어느 정도 티는 낼 생각입니다.”

“하지만 청장님이십니다. 자칫하면 지청끼리의 질서도 흔들릴 수 있고 파벌싸움이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덧붙인 것은 조금 돌려 말한 것에 가까웠지만 사실은 내 염려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이야 민치호가 세력의 수장이라고 해도, 동급의 청장이 들어온다면 내부에서 갈라지는 사태가 생기지 않을까?

이래저래 민치호 밑으로 들어와도 문제, 아니어도 문제라서 나는 눈썹을 모았다.

“그래서 제가 정정했잖습니까. 라인을 타는 게 아니라 손을 잡는 겁니다, 양 청장님.”

민치호가 거들었다.

그러자 부산청장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했다.

“내가 밑으로 들어가도 아무 문제 없는 경우가 하나 있지요. 차기 국세청장한테 협력하는 게 뭐 그리 이상한 일입니까?”

부산청장이 씨익 웃으며 동그란 과자 하나를 씹었다.

우리가 얘기하는 동안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 이선균이 방 안의 미니바에 있던 과자를 갖다 둔 것이었다.

그는 아까 한참 소리칠 땐 언제고 지금은 관심도 없는 것처럼 미니바를 뒤적거렸다.

그런 이선균도 부산청장의 말에는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선균이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 병을 열다가 딱딱하게 굳었다.

“어, 그건…….”

간이 부은 나도 뭐라 하기 어려운 순간이다.

민치호가 입을 열고 억지로 소리를 쥐어짰지만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놀란 것이다.

“뭘 놀라고 그러십니까. 민 청장이 차기 청장인 거 다 아는 사실 아니었어요?”

“그으렇다기 보다는…….”

정치질에서 한발 물러서 있는 내가 봐도 차기 국세청장은 민치호가 맞다.

국세청을 셋으로 가르고 있던 세력 중 하나는 와해되었고, 하나는 국세청장을 모시고 있다.

자연히 남은 하나가 현재 최대 파벌 아닌가.

국세청장이 연임하지 않는 이상 차기 청장은 민치호다.

그러나 그걸 짐작만 하고 있는 것과 지청장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상상만 하고 있던 것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온 기분이다.

나도 사실 막연하게 ‘차기 청장은 민치호지’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렇구나.

늦어도 2년 후에는 정말 민치호가 청장이 되는 거구나.

머릿속에 그 광경이 그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대통령에게서 임명장을 받고 국세청에 들어서는 청장 민치호.

그 바로 뒤에는 이선균과 내가 서 있을 것이다.

민치호가 그리는 국세청은 어떤 모습일까.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편하게 말하라면서요. 제가 민 청장에게 가담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힘의 균형을 깨뜨리겠다는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지금 균형이라고 할 것도 없이 민 청장이 최대 세력이지만, 그래도 지청장이 밀어주면 좀 편하지 않겠어요?”

부산청장은 와작와작 소리를 내며 야채스틱을 씹었다.

나는 멍하니 부산청장 손에 들린 당근을 바라보다가 목이 타는 걸 느꼈다.

내 잔에 남아 있던 것을 단숨에 삼켰다.

아까처럼 쏘는 듯한 느낌은 없었다.

대신 불길 같은 것이 속에서 치솟았다.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기대와 두근거림이다.

민치호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잠시 천장을 바라보더니 다시 시선을 내려 부산청장에게 향했다.

그는 시원한 얼굴이었다.

“잊고 있던 걸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아니, 그 중요한 걸 잊고 있던 건 아니지만 조금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나 봅니다.”

민치호는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어느새 술병은 반 넘게 비워져 있었다.

“맞습니다, 양 청장님. 다른 후보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다음 청장이 되어야겠습니다. 권력욕이라고 욕하셔도 좋습니다.”

“후보라고 할 사람도 민 청장밖에 없는데 누가 욕합니까. 다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미리 좀 머리 숙였다고 이상할 거 있나요.”

부산청장은 그 커다란 몸집을 들썩이며 웃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이선균을 힐끔 보았다.

국세청장 얘기가 나왔는데도 그는 여전히 평소의 웃는 낯으로 안줏거리를 집어 먹고 있었다.

그것도 종류별로 골고루 없어져 있다.

어지간한 무신경이든가 표정 관리가 수준급이든가, 둘 중 하나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은 숨길 수 없었나 보다.

이제껏 조용했던 것이 표정 관리 하느라 그랬나 싶다.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알 수 있다고 하죠? 신 팀장을 보면 그 부모님이 얼마나 선하고 정의로운 분인지 알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그가 일하는 걸 보면 어떤 방식으로 일을 배웠는지 알 수 있죠. 나는 신 팀장을 보고 민 청장을 믿기로 한 겁니다.”

갑작스럽게 내게 공을 돌리길래 멋쩍어진 나는 조용히 멜론을 들고 씹었다.

오, 맛있네.

괜히 이선균이 안주만 집어 먹은 게 아니구나.

나를 본 이선균이 옆에서 슬쩍 내 쪽으로 햄을 밀어 놓았다.

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햄을 집어 든 순간 민치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 인생에 가장 큰 복은 인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원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니까요.”

도수가 세긴 셌나 보다.

평소라면 나오지 않을 오글거리는 말이 둘 사이에서 오고 가고 있었다.

여기서 끼어들면 더 엄청난 칭찬 세례가 날아올 것 같아서 나는 최대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눈에 안 띄려는 수작이었다.

“그럼 앞으로 많이 도와주십시오. 양 청장님.”

“맨입으로요?”

민치호가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부산청장은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저 거구로 저렇게 위협적이지 않게 보이는 것도 재주다.

민치호는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살벌한데 말이다.

그러나 그 살벌한 얼굴도 오늘만은 함박웃음이 피어 있었다.

“저는 청탁을 안 좋아하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군요. 카드 한 번 시원하게 긁어보겠습니다.”

“그렇게 나오셔야지!”

부산청장은 기다렸다는 듯 메뉴판을 들었다.

그도 양심이 있으니 적당한 가격에서 시키겠지만 메뉴판을 훑는 눈빛이 매서웠다.

저건 딱 결재 보고서를 보던 눈빛이다.

그가 다음 술을 고르는 동안 민치호가 내게 시선을 향했다.

활짝 웃는 얼굴이라 나도 모르게 움츠렸다.

술까지 들어간 사람이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제발, 부끄러운 말씀은 하지 마세요.

나중에 다 기억난단 말입니다.

내 간절함이 닿았던지 민치호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나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었다.

“신 팀장, 내려가자마자 황민우 챙겨서 국세청으로 올라와. 다만 정식 발령 전이라 국세청에 책상은 없을 거야.”

국세청으로 가는데 책상이 없다니, 이게 무슨 소리지?

“어느 대기업에서 상속 준비과정을 밟고 있어서 국세청에서 사전 감시에 들어갔거든. 가벼운 세무조사라고 보면 돼. 대기업 쪽에 출장 나가서 살펴보게 될 거야.”

이건 그냥 조사가 아니다.

내가 국세청으로 올라오기 위한 판을 마련하려는 것임을 눈치챘다.

바로 국세청에 눌러앉으면 여의도 쪽에서 견제가 들어올 테니까 일단 출장 형태로 실무에 보내두려는 건가?

더군다나 정식 발령 전이니까 눈속임도 가능하다.

제주세무서에 파견 나간 일도 있으니 교육원에서 하릴없이 노는 내가 조사에 투입되는 건 자연스럽다.

“그럼 조사대상인 대기업은 어딥니까?”

지산은 이미 세무조사를 했으니 제외다.

민치호의 성격상 판을 깔 거라면 거하게 깔아줄 텐데.

재벌 시총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 정도 되려나.

“너도 잘 아는 곳이야.”

민치호는 예상치 못한 기업의 이름을 말했다.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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