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14화 (314/500)

314. 도제식 교육 (3)

이선균은 항상 웃는 낯이다.

정치질을 하다 보면 늘어나는 스킬이다.

능구렁이들이 도사리고 있는 마굴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한, 말하자면 포커페이스 같은 것이다.

내가 본 사람 중에서 표정관리를 가장 잘 하는 사람은 단연 이선균이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이선균을 롤모델로 삼을 정도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선균이 이렇게 화를 내는 일은 드물다.

정말 본모습이 드러나도 상관 없을 정도로 편하거나,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폭발했거나.

지금은 굳이 말하자면 전자일 것이다.

아무리 그가 화가 났다고 해도 민치호에게 저렇게까지 분노를 터뜨릴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그가 화를 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시위였다.

애 좀 그만 괴롭히라는.

“아무리 이번 시험에 모든 걸 보여줘야 한다고 해도 3시간이요? 세 시가안?”

이선균은 한자씩 또박또박 끊어서 힘주어 말했다.

민치호는 차가운 물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고 이선균은 기다렸다는 듯이 퍼붓기 시작했다.

“그냥 대화만 해도 사람이 지칠 시간입니다. 청장님께서는 그냥 대화만 한 것도 아니시잖아요? 가벼운 질문이 잡담처럼 오고 갔을 리도 없고, 분명히 압박 면접 수준이었을 텐데. 그걸 3시간이나 하셨다고요? 청장님, 제정신입니까!”

“크흠. 그건…….”

민치호가 말끝을 흐리자 부산청장은 낄낄대며 무릎을 철썩 내리쳤다.

민치호가 이선균에게 한소리 듣는 것은 흔치 않는 일이다.

옆에서 보고 있자니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부산청장은 정말 즐거워 보였고.

민치호는 잔에 따라놓은 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음, 하고 침음하며 듣기만 했다.

그가 생각해도 이선균의 말은 타당했기 때문일까.

“한도가 있는 겁니다! 분명히 판례집 구석에나 있을 법한 사례 끄집어내서 함정 문제 내셨죠? 얼마나 신나셨을지 상상이 갑니다.”

이선균이 몰아치자 부산청장이 웃다 말고 끼어들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진이 빠질 정도였는데 본인들은 어떻겠습니까. 2시간쯤 되었을 때는 제발 좀 끝내라 기도를 했다니까요.”

부산청장이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이선균은 아예 소매를 걷어 올리며 민치호를 닦달했다.

“청장님은 정말! 중간이 없으십니다! 애 잡으려고 작정하셨습니까!”

저렇게 이선균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더 묘해졌다.

저들이 나를 아끼는 것도 알고 저렇게 따지는 이선균의 마음도 안다.

지금 여기는 어차피 방음이고 편히 있어도 되는 자리이다.

그러나 민치호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이선균이 조금 과장한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느 샌가 딱딱하게 굳었던 어깨를 풀려 있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상사 앞에서 이런 행동이라니 건방지기 짝이 없다.

그러나 날 타박하는 사람은 없다.

타박이라면 오히려 민치호가 당하고 있지.

이렇게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이선균의 과한 행동 덕분에 나는 한결 편안해졌다.

“이 과장, 잘 알아들었어. 일단 목마르지? 한 잔 마시라고. 신 팀장도 지금 눈치 보느라 물만 마시고 있잖아.”

민치호가 잘 달래자 이선균이 자리에 앉더니 내게 술잔을 가리켰다.

“오늘은 여기서 기절해도 됩니다. 청장님들이 알아서 하시겠죠. 하루쯤은 청장님이 고생하시는 날도 있어야 하는 겁니다. 오늘 진짜로 고생한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먹고 죽겠다고? 그거야 대환영이지! 걱정 말고 마십시다!”

부산청장이 신나서 말을 받았다.

그의 잔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민치호와 이선균이 투덕거리는 것을 안주 삼아, 혼자서 술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그래그래. 오늘은 미리 말하는데 다들 먹을 술은 알아서 따라서 마시라고.”

시범을 보이듯 부산청장이 자신의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턱 하니 앞에 놓인 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나 역시 조심스럽게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화악, 하고 톡 쏘는 맛이 느껴졌다.

탄산은 아니다.

그러나 혀가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와 함께 강렬한 맛이 휘몰아쳤다.

입에 머금고 있기 어렵다 싶어 삼키니 이번엔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불타는 무언가를 삼킨 것 같았다.

목이 따갑고 알코올의 냄새가 나며 동시에 여러 맛의 잔향이 느껴졌다.

나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술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흔히 이런 색을 호박색 같다고 표현하던가?

이해가 간다.

맑고 투명한 갈색의 액체는 유리잔에 담기자 영롱했다.

색은 예쁜데, 맛은 그렇지 않다.

제대로 먹어본 게 처음이라 그럴지는 몰라도 확실히 내 입맛에는 아니었다.

곁눈질로 날 보던 부산청장의 입가에 미소가 맺히는 것이 보였다.

저건 장난기도 섞여 있지만 그것보다는 애를 보는 눈빛이다.

그래도 술 못 먹는다고 뭐라고 하진 않네.

간혹 술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 있잖은가.

양주 외에는 술이 아니다, 라던가 이것도 못 먹으면 함께 술 마실 자격이 없다, 라던가.

부산청장은 딱 보기에도 술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지만 자부심 같은 건 없는 듯했다.

“오늘 신 팀장이 고생하긴 했어. 그건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아.”

민치호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안줏거리를 내밀었다.

나는 다시 한 모금 마시고 콜록댔다.

그리고 초콜릿을 집었다.

가장 아는 맛이어서다.

별생각 없이 초콜릿을 먹었는데 아까 마셨던 술의 잔향이 초콜릿 맛에 들러붙어 다른 향을 이끌어냈다.

“어?”

“먹을 만하지? 다른 안주도 먹어 봐.”

나는 보통 소주로 입을 씻고 삼겹살 같은 안주를 먹는 편이다.

소주는 입에 싸구려 알코올 향이 남는데 그 향이 싫어서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오히려 잘 어우러진다고 해야 하나.

나는 다시 잔을 들었다.

날 조심스럽게 지켜보던 민치호가 낮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제야 한 모금을 마셨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까 미니멈이 어쩌구 말씀하셨는데 혹시 여기서 술 먹으려면 최소 얼마 이상 써야 한다는 제한이 있는 겁니까?”

“맞아. 라운지나 바에서 먹을 때는 상관없는데 룸에는 미니멈 차지가 있는 경우가 많아. 여기의 경우엔 50만 원이고.”

“50만……!”

부산청장이 덧붙였다.

“라운지나 바에도 자릿값 붙잖습니까. 커버 차지.”

민치호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여기는 커버 차지도 있는 곳이었죠. 말하자면 입장료의 개념인데, 과자 같은 간단한 서비스 안주나 웰컴 드링크 가격이기도 해. 이 가게는 만 원이고. 음, 콜키지는 많이 들어봤지?”

“예. 일반 식당에서도 쓰는 말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술을 가져와서 먹을 때 내는 비용 아닙니까.”

“역시 그건 좀 익숙한가. 그럼 브레이키지와 킵차지는 알겠습니까?”

용어로 봤을 때 대충 떠오르는 것은 있지만 이게 맞는지 확신은 없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이선균이 대답을 가로챘다.

“뭘 답답하게 뜸을 들이십니까. 그냥 알려주면 되는걸. 별것 아닙니다. 브레이키지는 컵을 깼을 때 내는 돈, 킵차지는 술을 맡겨두고 마실 때 내는 돈입니다.”

“에이, 재미없네. 이런 건 퀴즈처럼 맞춰야 하는 건데.”

부산청장이 실망한 기색을 짓자 이선균의 눈빛이 다시 살벌해졌다.

“그러고 보니 제가 양 청장님께는 별말씀을 안 드렸지요? 저희 민 청장님께서 혼자서 막 나가시면 옆에서 양 청장님께서 막아주셨어야……!”

이선균의 잔소리가 목표를 바꿔 쏟아지자 부산청장이 기겁했다.

“아이고, 잘못 건드렸네. 민 청장님, 원래 이 과장이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었습니까?”

이미 한바탕 잔소리를 들은 민치호는 웃었다.

뿌듯한 표정이다.

“무서운데 안 무서운 척 항상 웃고 다니는 것 아닙니까. 원래 웃는 사람이 무서운 법입니다.”

“그렇군요. 이런 자리에서 이 과장의 본모습을 보게 되어 다행입니다. 사무실에서 봤으면 제가 식은땀 좀 흘렸을 겁니다.”

아차 한 이선균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뭘 그걸 가지고 사과를 합니까. 민 청장이 혼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오늘 민 청장이 너무하긴 했어요.”

원래라면 과장에 불과한 이선균이 두 청장에게 면박을 준다는 것은 말도 아나 된다.

민치호야 친하니까 장난으로 받아준다 쳐도 부산청장에게 한 것은 도가 지나쳤다.

그걸 지금 아무렇지 않게 넘겨준 것이다.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다.

대신 부산청장은 다시 화살을 민치호에게 돌렸다.

그런데 어쩐지 아까보다 더 신나 보였다.

“크, 이 과장도 그걸 직접 봤어야 하는데. 솔직히 저는 재밌었습니다. 누가 그걸 면접이라고 하나. 둘이 손에 칼만 안 들었다뿐이지 이미 면접의 수준을 지났어요.”

민치호가 가슴을 내밀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부산청장이 아예 돗자리를 깔아주자 민치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신 팀장이 제법 잘해줬어. 어느 정도는 막힐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뛰어넘고 제법 덤비더군.”

오늘 면접에서 민치호가 일부러 엄격하게 대하는 것은 알았다.

그래서 최대한 지지 않으려고 했다.

“처음엔 이 과장 말도 있고 해서 적당히 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대답을 잘하니까, 어디까지 따라올지 궁금하더군. 조금 어려운 질문 던졌다가 그거에 또 따라오니까 더 어려운 질문 던져보고. 그랬는데 또 따라오잖아. 오랜만에 긴장해봤어.”

부산청장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민 청장님이 긴장을 했다 이 말입니까?”

“중간부터는 저도 가물가물한 걸 끄집어내서 물어봤거든요. 일반적인 질문으로는 성에 안 찰 것 같아서.”

성에 안 차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왠지 중간부터 난이도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했더니 민치호가 아는 걸 모조리 긁어내고 있었구나.

민치호의 반응에 이선균도 조금 흥미가 생긴 듯했다.

“3시간이라고 했을 때부터 예사 면접이 아닐 거란 생각은 했습니다. 저희 청장님하고 신 팀장이 세법으로 문답을 주고받는다니 생각만 해도 재밌을 것 같긴 합니다.”

아까 호통칠 때는 언제고 지금의 이선균은 또 눈빛이 반짝반짝해서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과장님, 아까는 제 편 들어주시더니…….”

“저야 당연히 신 팀장 편이지요. 근데 인간적으로 내용은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국세청장을 만들어냈다고 화제가 자자한 민치호 청장님이랑, 저승사자로 이름값 높이고 있는 우리 신 팀장이랑. 둘이서 세법으로 토론을 했다면 돈 주고도 보고 싶은 구경거리입니다.”

그새 술 조금 들어갔다고 이선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항상 진중한 태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던 이선균이 이렇게까지 텐션이 높아지다니.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그의 술버릇이 떠올랐다.

이선균은 취하면 세법 얘기를 꺼낸다!

오늘 이미 민치호와 지겹도록 세법으로 문답을 하고 왔는데 여기서 또 세법 얘기를 하라고?

내가 아무리 직업이 세무공무원이고 세법이 익숙하다고 해도 이건 정신건강에 안 좋다.

나와 민치호, 그리고 부산청장이 일제히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그것만으로도 단숨에 동의했다.

오늘만은 이선균의 주사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우리 셋은 서로 시선을 맞추고 굳세게 끄덕였다.

이선균이 막 주세법 얘기를 꺼내려고 하기에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 그러고 보니 부산청장님께서는 오늘 어떻게 국세청에 오신 겁니까?”

부산청장이 잽싸게 말을 받았다.

“그야 당연히 신 팀장 보러 왔지요! 민 청장이 마침 신 팀장하고 이 과장 데리고 술 먹으러 간다기에 껴들었고. 술자리에 내가 빠질 수야 있나!”

부산청장이 신나서 잔을 짤랑거렸다.

“정말 술을 좋아하시는군요.”

“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 걸 좋아하는 거예요. 어디 개뼉다귀 같은 놈들이 아무리 비싼 술을 사도 지금 이 자리에서 먹는 것보다 맛있을 리가 없지!”

마음에 든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나 다름없어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저도 청장님과 함께하는 자리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크흐! 맘에 들어! 술맛이 너무 좋아! 오길 잘 했어!”

부산청장이 호탕하게 한바탕 웃자 민치호가 곁눈질로 그를 보며 말했다.

“양 청장님하고 대작하려면 간이 두 개는 있어야 할 겁니다. 너무 권하진 마세요. 그리고 공짜는 아닙니다. 아시죠?”

“어허. 여기서 그런 말씀을. 당연히 잘 압니다만 오고 가는 걸로 따지자면 민 청장님이 열 번은 더 사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야 당연히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사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양 청장님이 작정하시면 저 거덜 날 것 같아서 무섭습니다.”

서로 장난으로 주거니 받거니 했지만 그 안에 뼈가 있었다.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같지 않은가.

나는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대놓고 둘이 거래했냐고 물어볼 수는 없어서 말은 조금 돌렸다.

“두 분이 원래 그렇게 친하셨던 겁니까? 저희 청장님께서 뭔가 많이 빚지신 것 같네요.”

그러자 부산청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히려 물었다.

“응? 못 들었어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무슨 일인지 정말 감도 잡히지 않았다.

부산청장은 민치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민치호는 모르는 척 술만 마시고 있었고 나는 정말 모른다.

내 얼굴을 살피던 부산청장이 씨익 웃었다.

“나도 민 청장 라인이나 잡아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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