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도제식 교육 (2)
“차 키. 저쪽에 맡기면 돼.”
“아, 네.”
어느새 나온 정장 차림의 남자가 우리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분명히 주차장에 들어올 땐 없었는데 우리가 오는 걸 보고 나온 듯했다.
처음엔 이런 식으로 남에게 차 키를 맡기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불안했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건네줄 수 있게 되었다.
이것도 해보니까 익숙해지는 건가?
아마 오늘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는 것도 이런 효과를 생각해서겠지.
그러나 굳이 이런 데를 와야 하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아무리 6급이 중간관리직이라고 해도 전체 공무원으로 보면 아래에 위치하는 직급이다.
일반 회사로 보면 팀장에서 높아봤자 과장이다.
팀장이나 과장이 대표이사를 모시고 고급 술집에 드나드는 일은 흔치 않다.
아니면 민치호는 정말 내가 나중에 장관이나 국회의원 같은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만약 그런 게 가능하다고 해도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정말 민치호가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내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믿고 있다는 말도 되고.
그렇다면 나중에 내가 어떤 자리에 가게 될지 미리 한계를 단정 짓지 말고 충실히 배우는 게 민치호의 배려에 대한 마땅한 태도가 아닐까.
이렇게 데리고 다니는 것 자체가 얼마나 귀찮겠는가.
나는 머릿속을 휘도는 잡생각을 떨쳐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다.
민치호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자 영업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둑했다.
어디 잘못 온 게 아닐까?
세무조사 나갈 때는 남의 사업장에 발로 문 열고 들어갔는데.
잠깐, 생각해보니까 여기도 남의 사업장이잖아.
오히려 손님으로 가는 거니까 내가 갑 아닐까?
그렇다고 문을 발로 차겠다는 건 아니고…….
전혀 당당해지지 않는 걸 보니 나는 태생적으로 갑질이 불가능한가보다.
근데 이 문은 어떻게 여는 거지?
간판 없는 시커먼 나무 문 앞에 선 민치호가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아, 이거 평범한 자동문이었구나.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온갖 잡생각이 싹 사라졌다.
“오…….”
들어간 술집은 정말 드라마에서나 본 그런 곳이었다.
머리 위에 샹들리에가 달려 있고 인테리어는 전체적으로 고급 나무의 느낌이 났다.
바가 있는 곳에는 수백 가지 술병이 늘어서 있었고, 손님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의 한쪽 벽면에도 빈 병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더욱 시름에 잠겼다.
공무원이 이런 데서 술을 마셔도 되나?
여기서 파는 술은 대체 얼마일까.
내 월급으로 커버가 될까?
혹시 바가지 씌우는 건 아니겠지?
나도 안다.
지금 내 생각이 쓸데없다는 걸.
내가 딱 봐도 ‘나 초짜요’하는 태도로 훑어보자 바 안쪽에 있던 바텐더들이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민치호는 익숙하게 핸드폰 뒷자리를 불렀다.
이름으로 예약을 안 하는구나.
“1337번으로 예약된 게 있을 겁니다.”
“아, 한 분이 먼저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부 직원이 우리를 안내했다.
라운지도 꽤 컸는데 안으로 들어가자 개별로 독립된 공간이 나왔다.
그중 우리는 로마 숫자로 6이라 붙은 별실로 안내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과장님!”
“오, 고생 많았습니다. 오늘 청장님이 많이 괴롭혔죠?”
이선균의 푸근한 미소가 보이자 나도 절로 입이 벌어졌다.
그도 엄연히 내 상사인데도 삼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약한 척하고 싶어지는 심정이다.
“오늘 청장님이 아주 작정하셨습니다. 과장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투덜거리자 이선균이 눈을 끔뻑였다.
“하하, 어지간해서 신 팀장이 이런 말 하지 않는데 청장님이 정말 몰아붙였나 보네요.”
그는 나를 위로하듯 양어깨에 손을 올리고 작게 두드렸다.
토닥이는 모양새다.
“많이 힘들었죠? 미안하다는 뜻으로 청장님이 내실 겁니다. 편하게 먹고 가요.”
이선균이 소파의 가장 안쪽 자리로 나를 밀어 넣었다.
엉겁결에 앉고 보니 소파는 그야말로 푹신했다.
여기 누워서 자도 되겠다.
“잠깐만. 곧 오실 텐데. 이 양반 또 국세청에서 오지랖 부리느라 늦게 오는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아까 부산청장이 알아서 올 거라고 했던 것 같다.
만나기로 약속을 한 걸까?
민치호가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전화를 걸었다.
“어허, 양 청장님. 어디십니까? 네? 요 앞이라고요? 저희 기다린 지 한참 됐는데요. 좀 빨리빨리 다니시지. 저희 6번 방이요.”
민치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떡 벌어진 풍채를 가진 부산청장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는 시선은 민치호에게 고정한 채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무슨 개소립니까? 온 지 1분도 안 됐다는 거 여기 직원한테 다 들었는데.”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질 정도로 양 청장님을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하하.”
“저 능구렁이하고는.”
부산청장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나와 이선균이 무의식적으로 동시에 한 발 내디뎠다.
코트를 받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제 몸에 익기 시작한 참이고, 이선균은 평생 청장을 모셔온 탓에 몸이 절로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부산청장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오늘은 그런 거 안 챙겨줘도 돼요. 술도 안 따라줘도 돼. 알아서 자작해서 마시라고 해. 뭐 대단하다고 늙은이들이 술을 받아가면서 마셔? 그렇죠, 민 청장?”
“오늘 양 청장님이 아주 날카로우십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내내 서 있던 민치호도 옷을 벗어서 별실 안의 옷장에 걸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술집이라기보다 거의 원룸 같았다.
인테리어는 라운지와 비슷하게 적갈색의 나무였지만 편안함은 달랐다.
개별실이라 그런가?
“이야기는 먹으면서 하고, 일단 시킵시다.”
민치호는 밖을 슬쩍 가리켰다.
비스듬하게 열린 문 옆에 종업원이 한 명 대기하고 있었다.
민치호가 손을 뻗자 종업원이 조용히 달려와 메뉴판을 쥐여주었다.
“오늘은 신 팀장한테 경험 삼아 데려온 거니까 적당히 시킵시다.”
“경험 삼아 온 거니까 고급으로 딱 시켜줘야지. 입문이나 다름없잖아요.”
양주를 아예 처음 먹는 것은 아니다.
부산청장이 날 만난 적은 두 번인데, 그때마다 작은 병에 담은 양주를 들려줬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제대로 알고 먹은 건 아니다.
딱 한 잔 마실 정도였고, 이름도 모르고 마셨다.
그러니까, 입문이 맞긴 맞구나.
“버팔로 트레이스가 낫지 않겠어요? 45도라 가볍고.”
“여기까지 와서 싼 거를 맥여? 그건 아니지. 그리고 여기 미니멈 차지도 있는데.”
“그럼 발베니로?”
“발베니보단 맥켈란인데.”
“그건 양 청장님의 취향 아닙니까.”
둘이 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4명이니까 나중에 한 병 더 시켜야 할 것 같긴 하거든요. 그럼 이따 아드벡 드실까요?”
“그건 향이 좀 강해서. 처음 마시면 안 맞을 수도 있잖습니까. 글렌피딕은요?”
“음, 일단 말씀하신 발베니 마셔보고 얘기합시다. 혹시 발베니 17년 있어요? 그걸로 합시다.”
뭔지 모를 토론이 끝났다.
아직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어질어질했다.
분위기나 익히라고 데리고 온 거라지만 이미 진이 훅 빠진 후다.
아까 3시간이나 시달려서 그런지 지치는 게 빨랐다.
약간 원망도 들었다.
굳이 이런 곳에 데리고 왔어야 했는가!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가시방석인데!
내가 눈에 띄게 초조해 한 탓인지 이선균이 물을 건넸다.
물잔도 유리였다.
“걱정 마요. 오늘은 정말 편하게 마시는 자리가 될 거니까. 저기 두 분은 벌써 넥타이도 푸셨잖아요.”
벌컥벌컥 물 한 잔을 비우고 나자 조금 생각이 가라앉았다.
그래, 민치호가 말하지 않았는가.
높으신 분들한테 기 안 죽고 덤비려면 분위기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그렇다면 나는 이런 분위기를 내 집처럼 편안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공무원이 이런 데서 술 먹어도 됩니까?”
말해놓고 보니 우문이었다.
여기가 무슨 퇴폐업소도 아니고 못 올 곳에 온 것도 아니다.
술이야 까짓거 돈이 있으면 먹는 거지.
하지만 내게 있어 이런 술집에 대한 이미지는 나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미디어나 신문 기사의 영향이 크다.
이런 술집의 개별실 하면 악당들이 모여 작당 모의를 하거나 재벌집 아들내미가 꽐라가 되어 술잔을 내던지는 것밖에 생각이 안 난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술집이 나쁘진 않겠지.
그걸 이용하는 놈들이 나쁜 거지.
그래서 말해놓고도 아차 한 것이다.
내 질문은 ‘여러분은 부적절한 곳에 온 것 아닙니까’라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다행히 아무도 비웃거나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디서부터 설명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 사이 종업원들이 들어와 술병과 잔을 내려놓았다.
과일이나 과자, 초콜릿이 담긴 접시도 몇 개 들어왔다.
드디어 문이 닫히고 완벽한 밀실이 되자 부산청장이 냅다 술병을 당겨 봉인을 땄다.
“위스키라고 무조건 비싸고 나쁜 건 아냐. 요즘엔 5만 원짜리 위스키도 있고. 당장 우리가 시킨 이게 얼마일 것 같아?”
양주 가격은 잘 모르지만 엄청 비싸지 않을까.
어차피 내가 맞출 거라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일반 기업 총무팀에 다닐 때 봤던 영수증들을 떠올렸다.
거기에는 200만, 300만 원씩 찍혀 있었다.
“한 100만 원이요?”
“그렇게 안 비싸. 일단 여기서 먹으면 가격이 64만 원이야.”
내가 터무니없게 높게 부르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가격이 낮았다.
그래도 월급쟁이가 사 먹기엔 비싸다.
“그리고 주류판매점이나 마트에서 사면 23만 원에서 25만 원 정도 하지.”
이건 좀 놀랐다.
첫째는 가격이 반이나 낮아지는 것에서였고, 둘째는 ‘살만한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비싼 술은 한도 끝도 없이 비싸지만 그건 희귀품 얘기고. 우리는 술을 먹으려고 하는 거니까. 바라고 그렇게 적대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야. 물론 술에 빠져서 본인을 망치면 안 되겠지만.”
민치호의 설명에 부산청장이 덧붙였다.
“그래도 이해는 가지 않습니까. 별실까지 빌려서 먹는 놈들은 술에 몇백씩 써도 상관없는 놈들이라서 나누는 대화가 대부분 돈 얘기인데.”
이용객이 대부분 돈 있는 사람들이라서 이미지가 그렇게 박혔다는 건가.
그럴듯하다.
부산청장이 잔을 앞으로 당겼다.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둥근 잔이다.
거기에 반씩 술을 채운 후 각자 앞에 한 잔씩 밀었다.
민치호는 잔을 건네받고는 지나가듯 물었다.
“바에서 먹으면 왜 그렇게 비싸지는지 알겠어?”
이건 바로 알겠다.
당장 소주만 해도 마트에서 사 먹는 것과 식당에서 먹는 가격이 다르지 않은가.
“주세법 때문이겠군요.”
“그렇지!”
내가 주세법을 깊게 파고든 건 아니지만 엄연히 국세청에서 관할하는 국세여서 대충 내용은 안다.
담당은 소비세과다.
매년 세수는 약 2조 5천억으로, 교육세처럼 자질구레하게 덧붙는 추가 세금을 합치면 3조가 넘는다고 들었다.
대충 1년 전체 국세 수입의 1% 정도 된다.
면접 준비하면서 혹시 물어볼까 해서 적당히 외워둔 것들이다.
“위스키는 증류주라 72%죠. 바에서는 개별소비세와 교육세, 부가가치세가에 유통비까지 붙는 거고.”
내 말을 들은 민치호는 정답이라고 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주세법도 공부했나 보네.”
“국세청이 다루는 세금이니까요. 탈세가 나오기도 쉬운 세목이고.”
세수 규모가 크지 않고 다른 기관에서 관리해서 그렇지 술도 충분히 탈세가 가능하다.
그래서 민치호가 오늘 작정했다면 주세법 탈세 사례도 물어볼 수도 있었다.
민치호가 뭔가를 더 물어보려는 순간 이선균이 눈을 부릅떴다.
“오늘 시험 보고 온 사람한테 또 세법 얘기 하시게요? 청장님, 그러다 미움 받습니다.”
“어, 그런가? 오늘 내가 좀 심하긴 했지.”
민치호는 얼른 깨갱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그걸 본 이선균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여쭤봤는데 말을 돌리셨죠. 몇 시간 했습니까?”
“크흠, 뭘 말인가?”
민치호가 헛기침을 하자 이선균이 캐물었다.
“승진 심사 면접 말입니다. 제가 문자를 몇 번이나 보냈는데 내내 답장이 없으셔서 무슨 일 있나 했습니다.”
“아, 그거…….”
민치호가 얼버무리자 부산청장이 냅다 끼어들었다.
“이 인간 아주 독종이야. 애를 잡다 못해 진을 뺐다니까. 나까지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불안한 표정으로 이선균이 물었다.
“설마 몇 시간이나 하신 건 아니죠?”
“민치호 청장님께서는 무려 3시간이나 하셨답니다.”
부산청장이 눈을 흘기자 민치호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이선균은 폭발했다.
“청장님! 적당히 하시라고 언질 드렸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