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10화 (310/500)

310화. 승진시험 (1)

-사각사각.

느낌이 좋았다.

단순히 펜이 종이에 스치는 질감 때문이 아니다.

펜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 느낌은 예전에도 한 번 겪어본 적이 있다.

바로 내가 7급 공무원 필기시험을 보았을 때.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그때보다 지금이 한결 더 수월했다.

그때는 반드시 붙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해서 문제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처음엔 아는 문제도 숫자를 잘못 읽어서 틀릴 뻔했고.

지금은?

밖에 앉은 비둘기가 구구,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다.

집중이 깨진 것은 아니다.

다만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오고 아무것도 안 들릴 정도로 긴장한 상태가 아닌 것뿐이다.

막힘없이 모든 문제를 풀고 나니 시간이 10분이나 남았다.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시험 감독관과 눈이 마주쳤다.

감독관이라고 해도 나와 같은 7급 공무원이라서 슬쩍 웃어주었다.

3년 반 전의 공무원 시험 때와 다른 점은 하나 더 있다.

바로 나 혼자 시험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다 풀었는데 10분 더 기다려야 하죠?”

“네. 혼자 보시는 시험이지만 원칙대로 진행합니다.”

감독관은 딱 잘라 말했다.

원래라면 나도 정식 승진 때 다른 공무원들과 함께 시험을 봐야 했으나, 혼자 본청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이유는 특별승진 대상자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안다.

특별 대우인 거.

보통 7급에서 출발해 6급까지 가는 데는 10년이 걸린다.

그걸 지금 지방청장의 추천으로 단숨에 해치우려는 것이다.

물론 아무나 특별승진을 시켜주지는 않는다.

뭔가 공을 세웠어야 가능한 일이다.

일단 내가 그 조건에는 구색이 맞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굵직한 건들 몇 개를 해치웠으니까.

국세청 내에서는 ‘사건사고’ 취급을 받는 건들 말이다.

그렇다고 연수만 채운 나를 바로 승진해 올리기에는 국세청도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낸 거겠지.

나는 창밖에서 울어대는 멧비둘기에서 시험지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 보는 순간 이게 정말 공무원 문제라고? 싶을 정도로 어려운 문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왜 나한테 미리 공부하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적어도 이 정도는 통과해야 반대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다는 거겠지.

반대로 정말 나에 대한 시험이기도 했다.

이것도 통과하지 못하면 큰 그림이고 계획이고 모두 쫑 나는 것이다.

민치호가 세운 계획은 다음 기회로 미뤄지겠지.

그렇다고 이런 문제를 내나?

나는 이 정도 문제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교육원에서 본 것 같은데.

아, 떠올랐다.

세무사 기출문제집이다.

특별승진 문제라고 따로 청장이 명령을 내려서 신경을 쓴 모양이다.

앞부분은 객관식이고 뒷부분은 주관식이었다.

주관식 1번이 이중 과세에 대한 예를 들어 견해를 논하라는 것이고, 주관식 2번은 부당행위 계산을 묻는 문제다.

그것도 판례를 곁들여서!

내가 세무사 시험을 보는 건지 승진시험을 보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미리 교육원에서 이제학에게 수업을 듣길 잘했다 싶었다.

이제학은 세법 책만 갖고 수업하는 사람이 아니라 매번 실시간 업데이트 된 따끈따끈한 판례를 들고 와 알려주곤 했다.

혹시나 싶어서 봐둔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나중에 나가면 누가 문제를 이렇게 내라고 했는지 꼭 확인해야겠다.

나는 툴툴대며 답안을 다시 체크했다.

주관식 한 문제에 답안지를 4장이나 적었다.

이런 문제를 세무사 애들은 16문제나 푼다 이거지?

괜히 세무대리인이 세법 지식으로 큰소리치는 게 아니었군.

“자, 시간 다 됐습니다. 답안 작성 다 되셨습니까?”

“네. 여깄습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답안지를 내자 복도에 서성이던 공무원이 들어왔다.

그는 인사과의 6급 공무원이었다.

감독관이 혼자만 있으면 부정행위가 나올 수도 있으니 한 명 더 근무하는 게 규정이긴 하다.

그래도 나 하나 때문에 2명이 고생하는 걸 보니 미안해졌다.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저 하나 때문에…….”

“1명이든 100명이든 시험은 시험인데요.”

그는 소회의실 안에 있던 7급 공무원에게서 답안지를 받아 들어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 가셔도 됩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계시죠?”

“청장실이죠?”

“네. 특별승진이라고 아주 엄격하게 하십니다.”

인사과의 6급 공무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라면 방향을 맞게 잘 가고 있다는 뜻이다.

누구보다 빠르게 승진하지만 가장 어려운 방법으로 승진하는 것.

그것이 민치호가 그린 그림이었을 테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청장님이랑 국장님들이 어디까지 알고 일하는지 아주 바닥까지 파내주겠다고 벼르고 있는 것 같으니까 각오 단단히 하시고요!”

“감사합니다!”

공무원들의 살벌한 경고를 뒤로 하고 나는 본청의 복도를 걸었다.

창 너머로 휑한 잔디가 들어왔다.

그 너머에는 다른 정부청사의 건물이 보였고 저 멀리에 늘어선 아파트도 보였다.

본청에 와보고 싶었던 건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본청 입성은, 승진하고 정식으로 발령받아서 본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으로 오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정식 승진은 너무 오래 걸리니까.

그러다 문득 옛날에 민치호와 한 약속이 머리를 스쳤다.

-세종시 국세청에 발을 들이는 날, 뒤에 있는 분이 누구인지 알려주마.

분명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아예 안 가는 건 아니다.

국세청과 검찰청 양쪽을 밀어주려면 웬만한 힘으로는 안 되니까.

그러나 내가 짐작하는 것과 정식으로 알려주는 것은 다르다.

장막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르는 말단과 장막을 들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천지 차이다.

장막 뒤로 갈 수 있다는 건 즉, 말이 아니라 그걸 움직이는 손과 그 손의 주인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다는 뜻이고.

그런데 이건 국세청 입성이라기에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아마 오늘은 민치호에게서 답을 들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날은 머지않았다.

나는 곧 이 국세청에 정식으로 발령받아 올 것이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저벅저벅.

국세청은 넓었고 미로 같았다.

밖에서 봤을 땐 깔끔한 사각형의 유리 건물 같았는데 안에 들어오니 건물 구조가 복잡했다.

내부가 ‘ㄷ’자였는데 걷다 보니 방향감각을 잃기 딱 좋았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청장실은 12층에 있었다.

옆에는 차장실, 기획조정관실, 운영지원과 등 중요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중 1227호 앞에 멈춰 섰다.

흰 바탕에 왼쪽 위에는 국세청 로고가 작게 새겨져 있고 호수는 오른쪽 위에, 그리고 국세청장실이라는 명칭이 왼쪽 아래에 새겨졌다.

정사각형처럼 보이는 간명한 간판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와.”

안에는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이 함께 모여 있었다.

저기 소파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것은 올해 늦여름까지 내 상사였던 오낙현 국세청장이다.

그 옆에 자리한 것은 민치호 서울청장이고.

그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좀 의외였다.

부산청장이 괜히 크흠,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씨익 웃으며 아는 체를 했다.

가볍게 묵례를 하고 나머지 두 명의 얼굴을 살폈다.

한 명은 모르는 남성이고, 한 명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여성이다.

칼처럼 짧게 친 단발머리는 희끗희끗하게 물들어있고 흑과 백 두 가지 색밖에 없는 깔끔한 옷차림이었다.

굳세어 보이는 인상의 중년여성이 나와 마주치자 살풋 웃었다.

그제야 생각났다.

용산 세무서장의 은퇴식에 참가한 국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오낙현에게 90도로 숙여 인사했다.

바로 옆에 내 상사인 민치호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낙현에게 정확히 고개를 숙인 것이 적잖이 마음에 든 듯했다.

그것은 곧 오낙현이 민치호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본인이 청장 자리에 앉은 승자이고, 상사임에도 민치호가 언제 치고 올라올지 몰라 불안해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민치호가 하극상을 벌인다면 오낙현으로서는 상처 없이 제압할 수 없다.

지금 국세청에서 민치호의 위치는 굉장히 높다.

단순히 서울청장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손경진과 오낙현 둘이 피 터지게 싸울 때 둘 중 하나를 완전히 침몰시키고 나머지 하나를 반석 위에 올려둔 사람이다.

같은 편일 때야 든든했지.

언제든 자신을 끌어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무서울 만하다.

그렇다고 민치호가 이유 없이 등을 찌를 일은 없지만.

“거기 앉아.”

오낙현이 가리킨 대로 소파 가장 끝 자리에 앉았다.

미리 언질들은 바로는 이제부터가 면접이다.

그렇다고 청장이 셋이나 모일 줄은 몰랐는데.

자리가 너무 커진 것 아닌가 싶다.

“소개부터 해야겠지? 서울청장 민치호, 부산청장 양신필, 자산과세국장 허송미, 운영지원과장 염정규다.”

두 청장은 가만히 있었고 허 국장과 운영지원과장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물론 묵례로 끝날 수준이 아니다.

도로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여기서 가장 낮은 것은 운영지원과장이지만 이 자리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은 부산청장과 자산과세국장이었다.

운영지원과는 인사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으니 여기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더불어 급수가 낮다고 무시하면 안 되는 것이, 운영지원과장은 이후 국장급 인사로 영전이 약속되어 있는 중요 보직이었다.

어느 회사든 인사를 맡은 부서는 힘이 세기 마련이다.

허송미 국장도 같은 국세청 건물에서 근무하니까 구경삼아 왔다고 치자.

부산청장은 대체 왜 왔을까?

시선을 마주치자 부산청장이 우락부락한 풍채로 씨익 웃었다.

워낙에 손이 크다 보니 그의 손에 들린 찻잔이 장난감처럼 보였다.

“이쪽 부산청장님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나하고 민 청장이 주로 물어볼 거니까. 아, 염 과장도 사양하지 말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알겠습니다.”

“그럼 뭐 가볍게 시작할까? 시험은 어땠어? 볼만했나?”

가벼운 질문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대답할까.

공무원 면접은 따로 준비가 필요했다.

이번에는 면접이라고 강의를 듣거나 하진 않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나도 가볍게 받아볼까.

“원래 승진 시험이 그렇습니까? 세무사 시험 보는 줄 알았습니다.”

“평소에 세무사 시험 문제를 본 적이 있나 보네.”

“판례를 보다가 몇 번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은 어려웠나? 잘 쓴 것 같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썼습니다.”

“이러면 답안이 궁금해지는데.”

국세청장 오낙현이 슬금 웃었다.

“이번에 문제는 신경 많이 썼어. 시험 보는 사람이 1명밖에 없다는 게 아까울 정도로.”

“영광입니다. 모범 답안은 아니겠지만 충실히 썼습니다.”

잡담과도 같은 첫 질문이 지나가고, 민치호가 훅 질문을 던졌다.

“시험 문제 중에 유가증권 관련 문제가 있었을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양도세율을 말할 수 있습니까?”

면접 자리라는 것을 상기시키듯 민치호는 경어를 썼다.

그리고 차가웠다.

원래 험악한 인상인데 정색하고 말하니 확실히 분위기가 확 내려간다.

세율이야 소득세, 상증세, 법인세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유가증권 세율을 물어보는 데서도 악의가 느껴졌다.

단숨에 긴장감이 높아졌다.

망설이면 더 헷갈린다!

나는 입술에 침을 바르고 단숨에 말했다.

“대주주는 장내외 구분 없이 보유 기간 1년 미만 30%, 3억 원 이하일 때 20%, 3억 원 초과일 때 25%입니다. 대주주 외의 경우 중소기업은 10%, 그 외 기업 및 파생상품은 20%입니다.”

“대주주 기준은요?”

“코스피 1% 10억, 코스닥 2% 10억, 코넥스 4% 10억, 비상장주식 4% 10억, 벤처기업 4% 40억입니다.”

앞에 말한 퍼센트는 주식 소유자가 보유한 그 회사의 지분율, 뒤의 10억이라는 것은 보유한 주식의 시가총액을 뜻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A회사의 주식을 갖고 있는데 회사가 발행한 주식이 총 10,000주이고 내가 100주를 들고 있으면 지분율이 1%기 때문에 대주주다.

내가 들고 있는 A회사의 주식이 1%가 안 되더라도 금액으로 10억 이상이면 역시 대주주다.

지분율과 시총, 두 가지 기준 중 하나만 만족하면 대주주가 되고 대주주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소액주주다.

평소 외우기 쉽게 숫자만 딱 떼서 외운 탓에 대답할 때도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이 숫자만 주르륵 나열했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만 말해도 알아들었다.

“세율 외우고 있는 것은 당연하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음에도 민치호는 만족한 기색이 없었다.

일부러 그런 거겠지만 오늘따라 매우 엄격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요한 건 판단이니까요. 그래서 코스닥 상장기업 1%에 시총 11억 어치 보유한 납세자가 적용받을 세율은 얼마입니까? 3초 안에 대답하세요.”

청장님,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세요.

나는 얼른 머릿속으로 표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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