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09화 (309/500)

309화. 영양가 있는 이야기 (2)

밥을 먹으면서도 이야기는 빠르게 오고 갔다.

서로 숨 쉴 틈도 없이 주고받는 것이 그야말로 랠리나 다름없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안 되는 것처럼 정상훈과 민치호는 숨 가쁘게 말을 던졌다.

틈이 있다고 서로 거짓말을 할 자리는 아니다.

여기서 섣부르게 거짓말을 했다가 나중에 밝혀지면 둘의 관계는 파탄이다.

협력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줄을 한낱 거짓말로 망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바로바로 대답하는 것은 하나의 제스처였다.

숨기는 것 없이 대화하고 있다는.

“구체적으로 나한테 바라는 건?”

“일차적으로 신재현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일차적으로? 그것까지 내가 하라고?”

말이 분위기지 그게 가장 어려웠다.

한마디로 필요성을 만들고 여론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뜻인데, 그게 쉬웠으면 다른 정치인들도 진즉 했을 것이다.

언론에 손을 뻗어서 여론을 조작하는 시절은 지났다.

요즘엔 신문을 보는 사람보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신재현이 필요하다는 배경을 부각시키고, 서서히 신재현이라는 존재를 기억에서 끄집어 올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공격이 많이 들어올 것이다.

당장 여의도의 높으신 분들은 신재현이 거슬려서 그토록 치우고 싶어 했다.

도로 신재현이 돌아온다고 하면 학을 뗄 사람이 상당수였다.

총선을 앞두고 그 어떤 변수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니 아마 턱밑에 칼이 치고 들어오는 기분이지 않을까.

단순히 방패만 해달라고 해도 아직 의원 배지가 없는 정상훈에게는 과한 요구였다.

역시나 민치호는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때가 되면 슬금슬금 신재현 얘기가 나올 겁니다. 그때 청장님께서 조금만 거들어주시면 됩니다.”

“뭔가 계획이 있나 보네.”

“그건 이 자리에서 전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당연하지. 여기서 다 말했으면 오히려 못 미더웠을걸.”

“청장님께도 그리 어렵진 않을 겁니다. 저희는 시류를 탈 거거든요.”

여론을 등에 업겠다는 말이었다.

정상훈은 눈을 깜빡였다.

“정치인들이 그걸 하려고 목을 매는데. 그냥 민 청장도 정치 들어올래? 이 업계는 지지율이 깡패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허허, 칭찬 아닌데.”

민치호는 가볍게 무시했다.

“물론 아무리 여론을 탄다고 해도 여의도에서는 극렬한 반대가 나올 겁니다.”

“하지만 여론을 등에 업은 상태라면 그들도 대놓고 반대하진 못하겠지. 기껏해야 비판하고 이름값을 깎아내리는 정도?”

“그러니 청장님께서 신재현이 왜 필요한지, 그가 짧은 기간 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 강조해주시면 됩니다. 그리 어렵지 않죠?”

정상훈은 문득 어느 화가가 순식간에 풍경화를 그린 뒤 ‘참 쉽죠?’라고 하는 방송이 떠올랐다.

말로 들으니 쉬워 보이지만 저것도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일단 자신이 앞장서서 십자포화를 받게 될 것이다.

신재현 대신 눈에 띄어 달라는 뜻이니까.

“내가 욕 처먹고 여의도 저놈들한테 다 약점이고 뭐고 다 까발려지는 동안 신재현이 올라올 수 있도록 발판을 다지겠다? 옛 상사라고 너무 막 써먹는 거 아냐?”

정상훈이 그나마 초선이라도 달았으면 조금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아무 힘도 없는 예비 후보에 불과했다.

아직 아무 당에도 들어가지 않아서 당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그나마 지금 그가 지지율을 얻고 있는 것은 전 국세청장이었던 덕이 컸다.

민치호는 그 점을 지적했다.

“그 지지율, 다 신재현이 만들어준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까마득한 후배 덕을 보셨으니 후배한테 날아드는 폭탄은 좀 막아주세요. 우리가 나쁜 짓 하려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까 내가 도와주면 오낙현 목은 무사하다고 했나? 반대로군. 내 목이 걸리게 생겼어.”

“국세청에는 신재현이 필요합니다, 청장님.”

민치호의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거침없이 몰아치던 대화가 끊기고 정상훈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말없이 흑미가 들어간 잡곡밥에 열무김치 하나를 얹어 씹어 먹었다.

우적우적하는 소리가 그의 고뇌를 대신 표현했다.

그는 우악스럽게 감자전 하나를 욱여넣은 후 동치미 국물로 입가심을 했다.

“크아. 맛있네. 밥값치고는 대가가 너무 비싼 것 아닌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민 청장 말이 맞아. 원래 나는 무소속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거든. 근데 지금은 그냥 나가도 당선될 것 같아. 그건 내가 ‘국세청장’이라서 그런 거겠지. 신재현에게 갔던 기대가, 그 조직의 수장이었던 내게도 걸려 있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여기서 만약 내가 입 싹 닫았으면 지 혼자 잘난 줄 안다고 욕했을 거면서.”

장난 투였지만 말 안에 뼈가 있었다.

민치호는 슬며시 웃는 낯으로 받았다.

“제가 어떻게 감히 청장님을 욕하겠습니까. 청장님께서 은퇴하시면 정치판 가시려는 거 이미 알고 있었는데요.”

“말이라도 못하면.”

에잉, 하고 정상훈이 혀를 찼다.

“하지만 내게도 나쁜 구도는 아니야. 신재현을 옹호하면 적이 늘어나지만, 반대로 아군도 늘어나거든. 내가 밀고 있는 깨끗한 세정 컨셉에도 잘 맞고.”

정상훈은 주저리주저리 설명했다.

그리고 우뚝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민치호와 눈을 마주쳤다.

“적어도 신재현을 끌어올리는데 한해서는 내 이익과도 합치하니 배신은 없을 거야. 이 정도면 안심하겠나?”

민치호 역시 멈칫하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다 꿰뚫어 보셨습니다, 청장님.”

정상훈이 일부러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안심시켜주는 이유는 민치호 때문이었다.

아까 정상훈이 식당 문을 열고 등장하는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민치호는 내내 정상훈을 경계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정치인 정상훈이 아닌 ‘옛 상사’로서 행동하길 강요했고 속내를 털어놓으라고 온몸으로 종용했다.

그 분위기를 정상훈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나마 정상훈이 민치호에게 역정을 내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그가 옛 부하였으며, 지금 이 행동이 사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민치호는 신재현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것이다.

“제가 혹시 오늘 무례를 범한 것이 있다면 청장님께서 너그러이 넘겨주십시오.”

민치호가 고개를 숙이자 정상훈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야, 이 똑똑한 놈아. 처음에 나한테 선빵 날린 순간부터 내게 선택지는 없었어. 정치인 정상훈? 배지도 안 딴 놈이 민 청장 앞에서 정치인 행세를 할 수 있겠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으이구, 화상아…….”

정상훈은 떡갈비를 밥 위에 올려 와구와구 맛있게도 먹더니 민치호를 흘겼다.

“민 청장. 그냥 청장 하지 그랬어? 지금 오낙현이가 평지풍파를 잘 버틸 수 있을 위인이라고 생각해?”

민치호는 지금도 청장이지만 정상훈이 지금 말하는 ‘청장’이 뭘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오낙현에게 양보하지 말고 본인이 국세청장 자리에 앉지 그랬냐는 뜻이다.

한솥밥을 먹은 식구이기에 정상훈은 오낙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나야 떠나는 사람이니까, 남는 사람이 결정한 일에 따라준 거거든. 개인적으로 음습한 손경진보다 소심한 오낙현이 반푼어치라도 더 나은 건 사실이고.”

엄밀히 따져서 민치호와 이선균에게 있어 오낙현은 상사다.

둘이 맞장구를 치면 빼도 박도 못하고 상사 뒷담이다.

그것도 하극상으로.

민치호는 부드럽게 받아넘겼다.

“당시엔 오낙현 청장님이 앉으시는 게 맞았습니다. 제가 앉기엔 이르지요.”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외부의 모든 공격을 손경진이 받았듯이, 현재는 모든 관심을 오낙현이 받고 있다.

덕분에 민치호와 이선균은 조용히 여기저기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정상훈은 헛웃음을 지었다.

“민 청장. 그냥 정치할래? 여기 오면 무척 잘할 것 같은데.”

정치계에서 겨우 몇 달 있었지만 그동안 겪은 것이 국세청의 기억을 까맣게 덮을 정도라, 정상훈에게 있어서는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민치호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웃었다.

“그럼 도와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혹시 부담스럽거나 그러시면…….”

“실컷 하라고 눈치 줘놓고 이제 와서 부담스럽냐고 물어보는 거야? 됐어. 괜찮아.”

“국회의 공격은 상상을 초월하니까요. 실제로 손경진 원장님의 경우엔 정치권의 요청을 받은 기자들이 20년 전 기록까지 다 꺼내왔잖습니까.”

일단 부탁하긴 했지만 자칫 정상훈이 배지도 달기 전에 고꾸라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정상훈은 의외로 자신만만했다.

“괜찮아. 정치권 가려고 아주 옛날부터 이를 갈고 준비했어. 나한테서 캐낼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

교육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강당에 모였다.

강당에 모이는 거야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달랐다.

긴장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모든 참가자가 깔끔한 정장을 입고 앉아 있었다.

교육생들은 오늘만을 기다린 것처럼 잔뜩 멋을 부렸다.

여성들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머리를 세팅하고 오랜만에 캐리어 한쪽에 넣어둔 화장품을 꺼냈다.

남성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향수를 뿌리고 머리에 왁스를 발랐다.

평소라면 기강을 위해서라도 금지되는 것들이었지만 오늘은 허락되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민 교육생들이 정장 차림으로 앉아 있으니 제법 공무원 태가 났다.

물론 아직 어린 친구들은 부모님 것을 빌려 입은 아이처럼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몇 달만 지나면 금방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니까.

“이렇게 보니까 알아보지도 못하겠네요.”

나지막하니 혼잣말을 하자 오른쪽에 앉아 있던 이제학이 뿌듯하다는 듯 웃었다.

“그렇죠? 저기 저 학생은 안경을 벗었고 그 옆에는 앞머리를 내렸네요. 앞줄의 남학생은 반대로 머리를 깠고. 어허허, 저 학생은 머리에 너무 발랐네요. 참 좋을 때다.”

간혹 좀 과한 학생이 있었지만 교수들은 그것도 귀엽게 바라보았다.

하긴, 나도 저 안에 있어 보았지만 이렇게 보니 기분이 좀 달랐다.

멀리서 봐도 ‘나 공부합니다’ 티를 내고 다녔던 이들이 정말 전국 관서로 나가는 것이다.

이제는 교육생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같은 세무공무원이고 나중에 필드에서 만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오묘했다.

“아직 세법 잘 모르는 사람도 있던데 정말 실무 나가도 될까요?”

교수들이 열심히 가르쳤지만 어딜 가든 뒤처지는 사람은 있다.

그렇다고 여기가 학교도 아닌데 교육 끝난 사람을 붙잡아 둘 수도 없고.

본인이 공부를 안 하면 나중에 피곤할 텐데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이제학은 허허 웃었다.

“정말 선생님 다 되셨습니다. 매년 이래요. 정말 이대로 내보내도 되나? 가르칠 게 많은데 16주는 너무 부족한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보냅니다. 근데 막상 닥치면 다 잘하더라고요. 우리야 평생 세법 공부해온 사람들이니까 교육생들이 눈에 안 차는 건 당연하죠.”

“아, 그런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교육원에서 원하는 것은 완벽한 공무원이 아니다.

실무에서 어떻게든 적응할 정도의 실력이면 된다.

나머지는 일하면서 공부하면 되니까.

“자, 다음으로 교육생 여러분 퇴장하시면서 교수님들과의 인사가 있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주십시오.”

그 사이 식순은 마지막을 남겨두고 있었다.

교육생 대표의 선서, 그리고 교육원장 손경진의 훈화가 끝나고 우리는 사회자의 말에 따라 일제히 일어섰다.

손경진이 단상 아래로 내려와 교수들 앞에 섰다.

교육생들이 일렬로 서서 교수들 앞을 지나갔고, 우리는 그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교수들이야 가볍게 박수를 치거나 눈인사했지만, 원장은 일일이 모든 교육생과 악수를 나눴다.

100명 가까운 교육생들과 인사하면서도 손경진은 귀찮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사람을 망치는 것이 권력, 돈, 명예였던가?

그것을 내려놓으면 도로 유순해지는가 싶기도 하다.

수료식이 끝나고 교육생들은 제주도를 떠날 준비를 했다.

조용한 교육원 안에 전세 버스 2대가 들어섰고 교수들도 배웅을 나왔다.

교육생들이 하나둘 차에 올랐다.

“우리 나가서도 서로 연락하고 지내요. 알았죠?”

“같은 지방청 되면 좋겠다. 그럼 세무서에서 볼 수도 있잖아요.”

“누가 빨리 승진하나 내기할래요?”

저마다 미래에 대한 희망찬 대화가 한창이었다.

그러다 내가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라타고 문이 닫히자 교육생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선생님이 공항까지 데려다주시는 거예요?”

“에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선생님도 전화번호 알려주세요!”

“모르는 거 있으면 가끔 연락해도 될까요?”

몰아치는 질문 속에 내가 피식 웃었다.

“저도 오늘 비행기 탑니다.”

버스가 천천히 출발하고 교육생들이 입을 떡 벌렸다.

“예에? 선생님 복귀하시는 거예요?”

“하긴 당분간 교육생도 없는데 복귀하실 만하지.”

“어? 근데 황민우 선생님은요? 두 분 같은 팀 아니에요?”

고개를 끄덕거리는 교육생들에게 내가 말했다.

“아직 복귀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시험이 끝났지만 저는 이제 시험 보러 갑니다.”

“시험이요?”

“승진시험이요.”

교육원에서의 모든 일이 끝났으니 이제 내 일을 해야 했다.

세종시 국세청.

본청에서의 호출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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