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08화 (308/500)

308화. 영양가 있는 이야기 (1)

호텔 밖에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다민은 굉장히 평온했다.

카운터에서 그녀를 알아본 직원에게 웃으며 답해주기도 하고 짐을 옮겨준 직원에게는 따로 팁을 챙겨주기도 했다.

내일 아침 일찍 모닝콜 서비스를 부탁하고 객실 안으로 들어온 다민은 먼저 모든 커튼을 쳤다.

그리고 문이 단단히 잠겼는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객실 내부를 살폈다.

그 후에 침대에 몸을 던지며 소리 질렀다.

“으아아! 아아아악! 끼아아악!”

비명이라기보다는 괴성에 가까운 소리였다.

다민은 침대 위를 바둥거리며 굴러다녔다.

“내가! 미쳤지! 술이! 원수야! 아악! 미친!”

한참을 굴러다니던 다민은 침대에 걸터앉아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혼잣말이 시작되었다.

습관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들려주려는 것에 가까웠다.

“아니야. 다민아,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할 거라면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않겠니? 그래, 잘했어. 차여도 말해보고 차여야지!”

그러나 스스로의 입으로 ‘차였다’라고 것을 말하는 순간 다민은 다시 침대에 엎드렸다.

“아악! 차였어! 차인 거지! 어떻게 예상을 이렇게 안 벗어나냐!”

털썩, 다민은 몸부림치다가 침대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야! 흐잉…….”

침대 위로 기어 올라온 다민은 이번엔 굴러다니는 대신 베개를 들어 두 개를 겹쳤다.

-퍽퍽퍽!

다민의 자그마한 주먹이 베개를 때렸다.

먼지가 풀풀 날렸다.

“그래. 예상했잖아. 거기서 받아들이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지!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니까.”

부끄러움에 베개를 후려 패던 다민의 손이 현저히 느려졌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다민이 어떤 방식으로 고백했든 신재현은 거절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고백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그가 걸어가는 길에 ‘여자’의 자리는 없었다.

굳이 함께하려면 ‘동료’여야 했다.

그처럼 유능하고 정의로운 사람.

함께 달릴 수 있는 사람.

다민은 천천히 베개를 끌어안았다.

부끄럽긴 했지만 차였다고 해서 원망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한 곳만 바라보고 달려 나가는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걸 확인한 느낌이었다.

애초에 그를 향한 감정에는 연심과 동경이 함께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당함 앞에 모두가 고개를 숙일 때 혼자 상대의 목을 물어뜯는 사람.

그 모습에 동경을 품었다.

“그래. 신재현이 남자라서 좋아한 게 아니잖아.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한 거지.”

다민은 자신의 감정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연심이 아니다.

물론 신재현이 남자로서도 매력적이라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한 것은 남자인 신재현이 아니라 ‘국세청의 저승사자’ 신재현이었다!

다민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었다.

신재현의 사진 수백 장이 고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오늘 찍은 것도 있었다.

다민은 몽롱한 눈빛으로 사진을 한 장 한 장 훑었다.

“재현 씨, 그거 알아요? 저는 가끔 팬분들이 이해가 안 갈 때가 있었거든요. 귀찮음을 감수하고 매번 찾아와주고, 얼굴 보는 것에 만족하고. 눈이 마주치면 그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웃어줘요. 저야 팬 덕분에 먹고 사니까 당연히 고마운데, 한편으론 궁금했어요. 그걸로도 충분한가?”

다민은 이번엔 연락처에서 ‘회장님’을 검색했다.

“같은 공간에 있고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고.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거였군요.”

다민은 지금 진심으로 팬을 이해 한 기분이 되었다.

“나도 앞으로 팬들 만나면 더 잘해줘야지…….”

반성은 이걸로 끝이었다.

다민은 엄선한 사진을 ‘회장님’에게 문자로 보냈다.

고르고 골랐는데도 10장이 넘었다.

전부 다민과 신재현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쑥스러운 듯 어색한 미소를 짓는 신재현이 대부분이었다.

일부러 이런 사진을 보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회장을 약 올리기 위해서.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바로 답장이 왔다.

-회장님 : 부럽다부럽다부럽다부럽다

-회장님 : 내가 팬카페 회장인데!

-회장님 : 나는 같이 사진 찍지도 못하는데!

회장의 정체를 생각하면 공무원인 신재현의 주변에는 접근도 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본인이 자중해야 한다는 건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러움에 몸부림치는 회장이 떠올라서 다민은 살포시 웃었다.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우울해졌던 기분이 도로 시원해졌다.

완전히 털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냥 흑역사 하나 더 생긴 것으로 치기로 했다.

다민은 모르지만, 며칠 전 신재현 역시 새벽 음주로 흑역사를 만든 걸 생각하면 다민은 신재현과 똑 닮은 팬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다민은 손을 호호 불며 교육원까지 걸어왔다.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대낮인데도 꽤 추웠다.

교육원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제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홀로 대로를 걸으면서 ‘왜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다민은 피식 웃었다.

그야 당연하다.

어제는 신재현과 함께 있었으니까.

금방 헤어지기 싫어서 그 긴 거리도 짧게 느껴졌었다.

‘가기 전에 얼굴 한 번 보면 좋을 텐데.’

다민은 애써 아쉬움을 눌렀다.

미리 시간이라도 정해놨으면 몰라도 언제 올지 모르는 자신을 아침 내내 기다릴 리가 없다.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나는 국세청 홍보대사니까!’

씩씩하게 교육원 주차장으로 들어서던 다민은 본관 앞에 서 있는 청년을 보고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어? 왜 여기 나와 계세요?”

속으로는 무척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언제부터 나와 있었을까.

시간이라도 말해 둘걸, 다민은 후회하며 총총 뛰었다.

“귀한 걸음 하셨는데 당연히 나와 봐야죠. 떠들썩한 배웅은 못 해도 혼자 떠나시게 둘 수야 있나요.”

신재현은 끌어안고 있던 보온병의 뚜껑을 열었다.

점퍼 주머니에서 티백 두 개가 나왔다.

“교육원 들어와서 몸 좀 녹이고 가시라고 권할까 했는데, 시간이 금인 분이고 교육생들 눈에 띄면 또 지체될 것 같아서요. 대접이 신통치 않아서 죄송합니다.”

그의 말대로 대단한 대접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종이컵에 담아 건네주는 뜨거운 차 한 잔이 지금 다민에게는 무엇보다 따스했다.

“에이, 이 정도면 훌륭하죠. 헤헤. 감사합니다.”

둘은 나란히 서서 천천히 차를 마셨다.

저 멀리 어디선가에서 갈매기 끼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호텔까지 데리러 가자니 눈에 띄면 다민이 구설수에 오를 것 같고, 이 겨울 그 거리를 걸어오면 다민이 추울 것을 고려해서 아침부터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기다린 것이.

그 행동에 담긴 배려가 그 어떤 거창한 인사보다 더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 와중에 비싼 커피나 거창한 걸 들고 온 게 아니라 보온병과 종이컵을 들고 기다린 것이 신재현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재밌으세요?”

자꾸만 피식거리며 웃는 다민을 보며 신재현이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비밀이에요.”

***

신재현과 다민이 교육원 현관에 나란히 서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민치호는 누군가와의 밀회를 가지고 있었다.

대낮부터 방음이 잘 되는 고급 한정식집의 가장 안쪽 방에 들어앉은 그는 물 대신 제공된 뜨끈한 보리차를 들이켰다.

단숨에 한 잔을 비우자 옆에 앉아있던 이선균이 소리 없이 잔을 채웠다.

“목이 타시나 봅니다.”

“오늘 만남이 제일 중요하니까.”

“그분과 청장님의 친분을 생각하면 일이 잘 풀리지 않겠습니까?”

이선균의 말에 민치호는 잠시 고민하더니 코웃음을 쳤다.

“정치에 발 담그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절대 쉽게 봐서는 안 돼.”

정치는 늪과도 같다.

안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으며 한 번 빠지면 온몸이 진창이 된다.

두 발을 다 담그면 빠져나올 수도 없다.

겨우 몇 달이었지만 얼마나 변해있을지 민치호조차 알 수 없었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실실 웃는 얼굴로 들어섰다.

전 국세청장인 정상훈이었다.

민치호와 이선균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청장님.”

“어허. 그만둔 지가 언젠데 무슨 청장이야.”

“제가 청장으로 모신 분이니까요. 나중에 금배지 달게 되시면 의원님이라고 불러드리겠습니다.”

민치호의 말에 정상훈은 잠시 날카로운 눈빛을 했다.

이 자리에서 민치호가 정상훈에게 어떤 모습을 보고 싶은지 간접적인 의향을 내비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소한 여기서는 정치인이 아니라 전 국세청장으로서 임해 주십시오.

정상훈은 그때까지 띠고 있던 미소를 확 지우며 비어 있던 상석에 앉았다.

“에잉, 옛 상사를 얼마나 부려 먹으려고.”

그의 말에 민치호는 안도한 기색으로 자리에 앉았다.

정치인다운 냄새를 풍겼던 영업용 미소를 지운 것도, 자신을 ‘옛 상사’라고 칭한 것도 좋은 징조였다.

적어도 이야기는 들어보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식사시키겠습니다.”

둘의 취향을 뻔히 아는 이선균이 주문을 넣고 나자 민치호는 슬쩍 떠보는 말을 던졌다.

“인상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정상훈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새카맣게 염색하고 다녔던 머리카락은 살짝 희끗희끗한 부분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연로나 노쇠함이 아니라 경륜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말랐던 몸은 적당히 살을 찌웠다.

거기에 아까 지웠던 영업용 미소를 더 하면 딱 부드러운 정치인의 인상이다.

이건 훈련으로 가능한 영역이다.

단 몇 개월 만에 그렇게 만든 것이다.

“돈을 얼마나 들여서 연습했는데 당연히 좋아져야지.”

정상훈은 툴툴거렸다.

“그래서 민 청장은 어때? 그렇게 미루고 미루던 청장 자리 가니까 살만한가?”

“그럴 리가요. 죽겠습니다.”

“죽는소리하기는. 민 청장 쫓아다니는 이선균 과장이 더 힘들지.”

이선균 쪽으로 화제가 돌아가자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로 화답했다.

“이제 이만하면 인사는 됐지? 처음부터 용건 꺼내기 무안해서 인사로 때운 거잖아. 서로 하하호호 웃으며 근황 물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되었으니까 그냥 물어봐. 왜 불렀어?”

“급하시네요.”

“이런 화두를 수십 번 겪고 나니까 진절머리가 나거든. 그냥 속마음 말하면 될 걸 굳이 영양가 없는 대화로 시간 낭비하는 게 얼마나 성질나는지 알아? 국세청 같았으면 호통부터 나갔을 텐데 웃는 낯으로 대하느라 아주 혼쭐이 쏙 빠진다고. 속은 시커먼 놈들이 끝까지 아닌 척하고 징그러워 죽겠어.”

정상훈의 투덜거림에 이선균은 식은땀을 훔쳤고 민치호는 허허 웃었다.

방금 한 말은 사적인 자리라 할지라도 정치인이 할 말은 아니었다.

반대로 속내를 터놓고 얘기한다는 것은 아까 민치호의 희망에 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치인 정상훈이 아닌, 전 상사이자 국세청장으로서 얘기하겠다는 것이다.

더불어서 속 시원하게 말하는 제안이자 배려였다.

그래서 민치호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늦어도 1월 말, 신재현을 데려올 겁니다.”

“……빠르네. 그래서?”

“방패를 맡아주십시오.”

-타악!

정상훈이 손에 쥐고 있던 물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이선균이 희미한 미소를 지우고 민치호는 가만히 정상훈의 답을 기다렸다.

다행히 정상훈은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한참을 팔짱을 끼고 침묵했다.

그러다 식당의 종업원이 들어와 거나하게 한 상을 차려놓을 때까지 정상훈은 입을 열지 않았다.

민치호와 이선균은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이윽고 종업원들이 모두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 정상훈이 팔짱을 풀고 젓가락을 들었다.

“예전에 말했던 그건가? 크게 한번 엎을 생각이라는 거.”

꽤 길게 생각한 것 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다.

“그렇습니다.”

민치호의 대답도 명료했다.

“오낙현은 알고 있나? 민 청장의 계획이 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 정치권을 막아주길 바란다는 건데. 내가 가능한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가장 큰 풍파를 입게 되는 건 국세청 아닌가?”

“최대한 피해 없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피해가 정말 없을 것 같아?”

“파란은 일겠죠.”

“예상 피해. 계산했을 거 아냐. 정확하게 말해봐.”

민치호는 무표정으로 가만히 정상훈을 바라보았다.

같은 국세청의 식구도 아닌 정치인에게 말해도 좋을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전 국세청장’으로 앉아달라고 한 건 민치호였다.

정말 협력을 원한다면 어느 정도는 까는 게 맞았다.

“……최악의 경우 현 국세청장님의 목입니다.”

“허. 그렇게까지 위험하다 이거지. 그래서 오낙현은 자기 목이 걸린 거 알아?”

“모르십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제가 최선을 다할 거고요. 단적인 예로, 제 앞에 계신 정상훈 청장님께서 도와주시면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습니다.”

정상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내 어깨에 오낙현 목숨줄이 얹혔어? 옭아매는 실력이 아주 수준급이야. 못 본 사이에 많이 늘었어.”

“과찬이십니다.”

정상훈은 가만히 젓가락을 움직여 생선구이의 살을 발라냈다.

“다 식겠네. 일단 먹자고. 먹으면서 천천히 들어보지.”

정상훈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1단계는 통과다.

민치호와 이선균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수저를 들었다.

불편한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였지만 셋은 한정식의 맛을 음미했다.

이런 분위기에 체하기엔 셋은 이미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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