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교육원의 마지막 행사 (3)
다행히 날은 따뜻했다.
햇빛에 눈이 조금씩 녹아 도로가 원래의 아스팔트 색을 되찾았다.
하얀 눈은 내릴 때는 좋지만 녹고 나면 질척거려서 꽤 다니기 불편했다.
지난 며칠간 교육원 앞마당을 장식했던 새 모양 눈 뭉치와 자그마한 눈사람들도 서서히 원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12월이 한창인데 날이 풀리자 사람들이 하나둘 교육원 부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 폭설로 교육원에 거의 갇히다시피 했다.
일도 없고 한가하니 좀이 쑤신 사람들이 바람을 쐬러 건물 밖으로 기웃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교육원을 관리하는 직원들은 녹아내려 시커멓게 변한 눈을 길옆으로 밀어내 도로를 청소했다.
교육생이고 직원이고 손에 커피 같은 따뜻한 음료를 들고 산책 겸 부지를 돌아다닐 무렵, 한 대의 자동차가 교육원 안으로 들어섰다.
“어? 번호판 보니까 렌트카인데.”
“누구 올 사람이 있나? 외부 강사 오는 특강 같은 것도 다 끝나지 않았어요?”
“그럼 일정표에 있었겠죠.”
간혹 외부에서 리더십 교육이나 소방훈련 등, 초청받은 강사가 오긴 했지만 지금은 이미 7급 교육과정이 끝났다.
연수원 성적 집계도 끝났다는 소문이 도는데 일정표에도 없는 방문자라면 교육원장의 손님이겠지.
아니면 본청 쪽 직원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했던 교육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차장에 차가 멈춰 서고 운전석에서 한 여성이 내렸다.
순간 햇빛이 주차장에만 드리운 것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교육생들은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보는 사람이 미소를 짓게 하는 부드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다민이네?”
“어, 다민이네?”
멍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다민은 철벅거리며 주차장에서 본관 앞으로 올라오다가 모여든 사람들을 보고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지, 진짜 다민 씨예요?”
“그럼요! 다민이라는 이름은 많지만 가수 다민은 저랍니다!”
“……다민이라는 이름이 흔하지는 않은데.”
교육생이 중얼거린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었다.
넋이 나가서 생각나는 대로 내뱉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민은 진지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아는 사람 중에 혹시 다민 있어요?”
“커흑! 제가 아는 다민은 지금 눈앞에 계신 다민 씨밖에 없습니다!”
한 교육생이 심장을 부여잡으며 소리치자 주위의 교육생들이 일제히 시선을 보냈다.
“미친놈…….”
금방 본관으로 들어갈 줄 알았던 의외로 교육생들과의 잡담을 이어 갔다.
단순히 팬서비스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연예인이 불특정 다수를 보고도 웃어야 하는 직업이라지만 지금의 다민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혹시 여러분은 저 오는 거 모르셨어요?”
“네. 그러고 보니까 무슨 일 있나요? 여긴 교육원인데…….”
세금 관련 상담이면 세무사, 세금을 내야 하는 거면 세무서를 찾아가야 한다.
그렇다고 원장과 아는 사이라 불렀다기엔 이상했다.
연예인이 원장의 부름에 제주도까지 날아올 정도로 친근하다면 당장 내일 연예부 특종으로 기사가 뜰 일이다.
“정말 얘기 안 했나 보구나! 그럼 조용히 들어가야겠다. 놀라게 해줘야지!”
“예에?”
다민이 설명을 생략한 덕분에 교육생들의 표정은 더욱 미궁 안으로 빠져들었다.
다민이 신나서 본관으로 달려가려다 멈칫하고는 다시 돌아와서 물었다.
“여기 말고 입구 또 있어요? 몰래 들어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이쪽으로 돌아서 가면 되긴 한데, 누구 몰래 들어가는 거세요? 어디로 들어가시든 다 들킬 것 같은데요.”
조용한 교육원에 연예인이 떴는데 소문이 안 나는 게 이상하지.
“괜찮아요. 한 명한테만 안 들키면 되니까.”
“예? 어느 분이요? 아는 분 계세요?”
교육생이 묻자 다민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에이, 아는 사람은요. 아니다, 아는 사람이 있긴 한데.”
“아는 사람이 있다고요? 진짜면 대박인데! 누구요?”
눈치 없이 묻는 학생에게 친구가 어깨를 잡아당겼다.
“야. 개인적인 걸 물어보면 어떡해.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그렇구나. 죄송합니다. 불편하시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교육생들이 얼른 사과하고 물러나자 다민은 감동 받은 표정을 했다.
집 앞 카페만 가도 기자들에게 붙잡히는 것이 일상이다.
그들은 사생활 보호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며 오히려 개인적인 이야기일수록 더 좋아했다.
상식적으로는 교육생들의 대화가 지극히 정상이었지만, 다민은 그런 정상적인 배려를 들어본 지가 꽤 되었다.
그래서 잠시 혹해서 사실을 말할 뻔했다.
팬클럽 부회장으로서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신재현을 만나러 왔다고.
그러니 다민의 입을 막은 것은 이성이나 감정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그간 기자들 앞에서 수없이 질답을 반복하며 몸에 밴, ‘이걸 말하면 안 된다’하는 본능.
다민은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제가 국세청 홍보대사잖아요. 청장님이 부르셨는데요? 정확히는 교육원장님이 청장님께 건의하셔서 청장님이 저에게 요청하신 거죠. 그러니 어떻게 보면 원장님하고 아는 사이인 것 아닐까요?”
“오오, 그렇구나!”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지만 교육생들은 묻지 않고 지나갔다.
다민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어! 그럼 저희 단합대회를 다민 씨가 해주시는 거예요?”
“네!”
“말도 안 돼!”
교육생들 사이에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 신나서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이었다.
16주간 말이 합숙연수지, 갇혀서 공부만 했다.
그런데 유명 가수가 왔다?
그것도 공연을 눈앞에서 볼 기회가 왔다면 방방 뛸 만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국세청 예산도 별로 없을 텐데!”
“일부러 와주셔서 감사해요!”
“언니! 사랑해요!”
“무대 열심히 볼게요! 저희가 응원은 겁나 잘합니다!”
다민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또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꽤 재밌는 공연이 될 것 같았다.
“그럼 나중에 봐요! 저는 원장님한테 인사하러 가볼게요!”
다민은 이 정도면 됐다 싶어 현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제는 진짜로 ‘갤주님’을 만나러 갈 차례였다.
많이 기다렸다.
이 정도면 자신이 신재현을 만나러 왔다는 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감쪽같이 속였다고 생각한 다민이 당당하게 현관문을 열려는 순간, 그녀가 손을 대기도 전에 문이 덜컥 열렸다.
“어?”
안에서 익숙한 얼굴의 청년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문이 닫히지 않도록 손으로 잡아준 뒤 주위에 모여든 교육생들을 스윽 훑었다.
“이미 소문 다 나겠네요. 몰래 들어오시려던 거 아니었어요?”
“엇, 듣고 계셨어요?”
“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 오시더라구요.”
신재현은 대수롭지 않게 다민을 대했다.
마치 세무서에서 납세자를 만나서 응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라는 의문보다는 ‘아, 연예인도 납세자 맞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 어…… 알고 기다렸다고요?”
“네.”
“다 들었다고요?”
“네.”
“으아아!”
다민이 시무룩해지자 당황한 것은 신재현이었다.
“……왜, 왜요?”
신재현이 물었지만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다민이 터덜터덜 현관으로 들어가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아니, 이게 아니지! 놀라게 하려는 건 실패했지만 만났으니 된 거 아닌가?”
목표는 사실 신재현 아니었는가?
놀라는 얼굴을 못 봐서 아쉽긴 하지만 막상 보니 좋았다.
심지어 마중까지 나왔다.
다민은 조금 밝아진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아예 밖에 있는 교육생들은 미처 듣지 못했으나 문을 잡아주고 있던 신재현은 들었다.
“네? 누구를요? 아는 사람 있어요?”
신재현이 고개를 뻗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교육생들 얼굴을 훑어보았지만 아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다민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교육생에게서 들은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는데도 느낌이 이렇게나 달랐다.
‘너 보러 왔다, 너! 아는 사람이 너라고!’
속으로는 죽어라 외쳤지만 겉으로는 평온한 미소를 유지했다.
아는 척하면 안 된다, 널 보러 온 거라고 말하면 안 된다.
부회장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다민은 신재현을 만나서 기뻤던 기분이 다시 축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어? 제가 이상한 말 했나요?”
“아니요. 얼른 가요. 원장님 기다리시겠네.”
다민이 성큼성큼 로비를 앞서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수줍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장실이 어디예요……?”
***
원장실에 들어서자 손경진은 평소 절대 볼 수 없는 환한 미소와 함께 다민을 맞았다.
“아이고, 이 먼 곳까지 와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다민의 뒤를 따라 원장실로 들어선 신재현은 미친놈 보듯 눈을 가늘게 뜨고 손경진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손경진이 입만 뻐끔뻐끔 움직여 구박했다.
‘손님 접대 잘해.’
‘네에.’
다민이 안내를 받고 소파에 앉자 손경진은 손가락을 휘휘 돌렸다.
그 끝이 향한 곳은 작은 티 테이블이었다.
신재현에게 차를 타오라는 소리였다.
원장실에 있는 사람이라곤 상사인 원장과 손님인 다민 그리고 신재현뿐이니, 그가 차를 타는 게 맞는 것이기도 해서 신재현은 군말 않고 물을 끓였다.
티 테이블에는 이미 찻잔과 쟁반이 꺼내져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손경진이 미리 꺼내 둔 차 티백이 놓여 있었다.
저번에 신재현이 사 온 세트 중 하나였는데, 손경진이 이미 골라둔 것인지 셋 다 종류가 달랐다.
신재현이 차를 챙기는 동안 손경진과 다민은 하하호호 즐거운 잡담이 한참이었다.
별건 없었다.
와줘서 고맙다느니, 당연히 와야 한다느니.
다민이 꼭 와보고 싶었다고 하자 손경진은 내부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원장이 직접 건물 구경을?’
웬일인가 싶어 신재현이 의아해하고 있던 참에 손경진이 손가락을 들었다.
“물론 저랑 다니면 재미없을 테니 쟤를 데려가시면 됩니다.”
“예에?”
신재현이 물을 붓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에이, 바쁘신 분인데 어떻게 그래요. 들어가면 안 되는 곳 알려주시면 저 혼자 돌아볼게요.”
“어허, 건물이 복잡한데 어떻게 혼자 돌아다니시려고 그래요. 어차피 신 팀장도 할 일 없으니까 편하게 부려먹으시면 됩니다.”
손경진이 허허, 소리 높여 웃었다.
인위적인 접대용 웃음소리인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니었다.
의외로 정말 즐거워서 웃는 소리여서 신재현은 의아했다.
“드시면서 말씀 나누세요.”
잠시 말이 끊겼을 때 신재현이 쟁반을 받쳐 들고 소파로 다가갔다.
손경진, 다민, 그리고 신재현 자신의 순서대로.
테이블 유리에 부딪혀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짝 잔을 내려놓은 후, 손잡이를 상대방의 오른쪽에 오도록 돌렸다.
별것 아닌 접대예절이었는데 다민이 눈을 반짝반짝하며 쳐다보았다.
부담스러워진 신재현은 시선을 슬금슬금 피하며 쟁반을 도로 티 테이블로 가져다 놓고 소파에 앉았다.
다민의 건너편 자리였다.
“아, 맞다. 저 선물 가져왔어요.”
“선물이요?”
공무원이 선물 받으면 안 되는데.
신재현은 어떻게 거절해야 좋을지 문구를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그사이 다민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어, 다민 씨. 선물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재현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스럭.
‘어? 부스럭?’
다민의 손에는 곱게 접힌 신문이 들려 있었다.
그것도 한 부 전체가 아니라 한 장씩 빼서 접어둔 것이었다.
다민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신문을 펼치자 총 3장이 나왔다.
셋 다 각각 다른 신문사의 것이었는데 공통점이 딱 하나 있었다.
[어딜 가든 열심히 일하는 신재현을 응원합니다!]
아주 간결한 광고였다.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
신문에 이런 광고를 실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광고 본연의 효과는 전혀 없는 단출한 페이지였다.
그러나 빼곡하게 작은 글씨가 들어차 있는 신문지 안에 큼직하게 차지하는 이 문구는 굉장히 눈에 띄었다.
“원래 신문 안 보는데, 이런 광고가 떴다길래 일부러 사 왔어요.”
“아니, 이걸. 아…….”
신재현은 말문이 막힌 듯 떨리는 손으로 신문지를 받아 들었다.
“대체 누가…… 누가 한 건지 아세요?”
“글쎄요. 광고에는 딱 이것만 쓰여 있어서 누가 한 건지는 안 나와 있던데요.”
“아…… 하필 3대 신문사네.”
신재현이 머리를 쥐어뜯자 손경진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선물이네요. 좋겠다, 신재현. 두고두고 간직해라.”
다민은 신문을 도로 곱게 접어 신재현 앞에 밀어두었다.
장난기가 잔뜩 든 눈빛이었다.
신재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신문지를 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구독하는 사람은 이걸 다 봤다는 거잖아요. 이제는 전국적으로…….”
흑역사가 생기네.
뒷말은 부끄러움과 함께 꿀꺽 삼켰다.
당장 이걸 찢어 버린대도 이미 전국에 뿌려진 신문은 어찌할 수가 없다.
신재현은 이마를 짚으며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신문을 집어 들었다.
‘일단 숨겨야 해.’
황민우가 보면 어떻게 될지 감도 안 잡힌다.
단체 대화방에 올라가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일단 잘 보관하겠습니다.”
말이 보관이지, 신재현은 아주 작게 접어서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감쪽같이.
안심하고 있던 신재현에게 다민이 다시 부스럭거리며 신문을 꺼냈다.
“그거는 신재현 팀장님 거고요. 이거는 다른 분들 보여드리려고 가져왔어요. 황민우 씨도 교육원 계시죠? 드려야겠다.”
여기서 복병이 등장하다니.
신재현은 필사적으로 정색했다.
“예? 절대 안 됩니다.”
“안 돼요?”
“네. 절대 안 돼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손경진이 후룹, 소리를 내며 차를 마셨다.
‘음. 만나자마자 이러네. 어디서 빠져줘야 하냐.’
손경진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