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교육원의 마지막 행사 (1)
완연한 겨울이 찾아왔다.
날씨가 쌀쌀해지며 제주도에도 눈이 펑펑 내렸다.
교육원이 하얀 눈에 파묻혔을 무렵, 교육원에서 치러지는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교육생들은 한숨 돌리며 자유시간을 가졌다.
여름에는 9급, 겨울에는 7급의 국세공무원 임용 대상자들이 교육원에서 합숙하며 교육을 받는다.
7급 교육생들의 시험이 끝났다는 것은 교육원의 한 해 업무도 거의 끝나간다는 뜻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마무리 작업뿐이다.
평가팀은 시험 결과를 집계하고 종합 점수를 내느라 그들의 사무실에 틀어박혔다.
누가 볼까 봐 같은 교육원 직원이어도 평가팀 사무실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평가팀이 신중하게 연수원의 성적을 내고 있을 때, 교육생들은 눈이 쌓인 앞마당에서 노느라 여념이 없었다.
“제주도에도 눈이 오는구나!”
“당연히 오죠. 제주도를 뭘로 보고.”
이렇게 여유롭게 노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처음에는 잘 어울려 다니는 인싸 그룹 5명이 선발대로 몰려나와 서로 눈싸움을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과 친한 동기들이 합세해 덩달아 눈을 뿌렸고, 두세 명씩 다니는 자그마한 그룹은 눈을 뭉쳐 자그마한 눈사람을 만들었다.
“인터넷에 보니까 동물 모양 눈사람 틀이 난리던데 지금 주문하면 안 되겠죠?”
“이 폭설에 도서·산간 지역은 배달비 추가될 수도 있어요. 바로 여기가 도서·산간 지역이거든요.”
“주문하고 싶으면 하세요. 아마 내년에 교육원 들어올 후배님들이 쓰시겠죠.”
교육생들은 손을 후후 불어가며 눈을 뭉쳤다.
할 일도 없겠다, 폭설 때문에 멀리 가지도 못하니 어느새 절반도 넘는 교육생들이 앞마당에 나와 있었다.
창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직원이나 교수들이 고개를 내미는 것도 보였다.
교육생들이 만드는 것은 대부분 어설픈 동그라미 모양의 눈사람이었지만 딱 한 명, 눈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보였다.
“저게 뭐야. 이런 데서 재능 낭비를 하는 분이 있네.”
“저번에 자기소개 할 때 미대 중퇴라고 했던 그분 아니에요?”
“어, 맞네요.”
20대의 남학생은 꽤 많이 해본 솜씨로 눈을 뭉쳤다.
점점 몸집을 불려 가던 눈덩이가 양팔로 껴안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자, 그는 나뭇가지를 주워와 눈을 깎아내기 시작했다.
하나둘 주위에 교육생들이 모이고 있었다.
마냥 구경하기 지루한지 몇 명이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주위에 전시했다.
눈사람의 숫자가 열을 넘어갔을 때, 20대 남학생이 만들던 눈덩이가 형태를 띠어 갔다.
“오, 새다!”
“오리인가요?”
“요즘 대세라는 그 눈 오리?”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날개 깃털 무늬를 새기던 남학생이 정색했다.
“흰머리오목눈이인데요.”
“아. 뱁새?”
“뱁새는 붉은머리오목눈이고요.”
“……무슨 이름이 그렇게 어려워!”
“둘은 엄밀히 말해 다른 종이거든요. 동글동글하고 생긴 건 비슷하지만 결정적으로 깃털 색이 달라요!”
하얀 깃털을 가진 새가 얼마나 귀여운지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한 학생을 보며 구경하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결국 친한 동기 하나가 나서서 수습했다.
“우리 동기가 새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번 겨울에는 새 구경을 못 가서 미쳤습니다. 여러분이 이해해주세요.”
“새는 귀엽지. 인정합니다.”
교육생들이 끄덕거리며 물러서자 남학생은 다시 작품에 열중했다.
완성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교육생들은 각자 눈을 뭉치며 잡담과 함께 걱정을 털어놓았다.
“1지망 어디 쓰실 거예요?”
“저는 잠실이요.”
“전 그냥 집 근처요.”
“집이 어디셨죠?”
“안산입니다.”
몸은 한가했지만 머리는 복잡한 것이 요즘 교육생들의 심경이었다.
앞으로 3일간 이들은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바로 어디에서 일하고 싶은지 1지망부터 3지망까지 적어서 내는 희망 근무지 신청서 작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단연코 서울 지역의 세무서다.
경기권이나 대도시의 세무서도 인기는 많았다.
빈자리는 개수가 정해져 있는데 원하는 사람은 많다.
치열한 경쟁 끝에 남은 해답은 결국 교육원 연수 성적뿐이다.
“공정하게 배정되겠죠?”
“그렇겠죠.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교육생들은 멍하니 눈을 뭉치며 중얼거렸다.
믿고 싶진 않았지만 고인물은 썩게 마련이고, 실제로 국세청 역시 그랬던 적이 있다.
모 대학교 파벌이 있었던 것이 그 증거고, 지금은 인터넷에서 흔적으로만 찾아볼 수 있는 뇌물 기사도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교육생들 중에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믿고 있는 것이다.
“옛날엔 학연, 지연, 혈연으로 찔러 넣고 그랬던 시절이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에요. 그랬으면 신재현이 나올 수 없었겠죠.”
“그렇죠. 고졸에 아무것도 없던 사람이 첫 발령을 용산 세무서로 나갔으니까.”
적어도 실력으로 승승장구해서 올라간 사람이 있다.
그것이 현재 국세청을 보여주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교육생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근데 뭘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대요?”
“누가요?”
“신재현 선생님이요. 요 며칠간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잖아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제주세무서 갔다 오고, 실무서 쓰고 그다음엔 공부하고.”
“세법이 매년 바뀌잖아요. 판례도 매달 새로운 게 나오고. 실무에서 떨어져 있는 동안 감이 무뎌질까 봐 공부하는 것 아닐까요?”
교육생들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냥 운이 좋고 머리가 좋은 게 아니었어. 그만큼 노력한 결과구나.”
“사실 당연한 말이죠. 공무원이 천재가 필요한 직업은 아니잖아요. 신재현 선생님이 뭘 하면 기사에 뜨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 밑에서 얼마의 노력이 있었는지는 관심도 없어요. 우리는 결과만 보고 대단하네 어쩌네 하지만 사실 정말 대단한 건 저런 태도죠.”
“이미 국세청장님 총애도 받고 있을 텐데 저렇게 열심히 공부한다는 게 신기해요.”
“오히려 그러니까 열심히 하는 거겠죠. 우리 직렬은 실력이 금방 드러나는 곳 아닌가요?”
교육생들은 괜히 도서관 방향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보이지는 않지만 거기에 앉아 있을 신재현의 모습이 충분히 상상이 갔다.
“기사에서 그랬죠? 1년 만에 붙었다고. 공부하는 거 옆에서 보면 그럴 만해요. 집중력이 장난 아니던데요.”
“우리도 공부 해봐서 알잖아요.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책만 들여다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잠깐, 그러면 우리도 세무서 가서 저렇게 해야 돼요? 공무원 시험 끝나고 연수원에서 공부한 것만 해도 지겨운데. 여기서 공부를 또 하라고요?”
몇 명은 질겁했지만 대부분은 당연하다는 눈치였다.
“시험은 시작점에 불과하다고들 하잖아요. 세법전 두꺼운 거 보셨죠? 판례는 또 어떻고요. 계속 공부 안 하면 뒤처질 거예요.”
“우우, 우울해…… 공부 싫어…….”
“어차피 해야 돼요. 회계시험이랑 조사요원시험 있잖아요.”
“공부하기 싫어…….”
국세공무원이 된 후에도 내부 시험이 있다.
좋은 인사고과를 받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라 세무서에 간 후에도 공부는 떼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부해야 한다는 사람도, 공부하기 싫다는 사람도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딱 한 가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도 열심히 해야겠지. 저렇게 잘 나가는 사람도 끊임없이 공부하는데.”
비록 승진 시험 때문이라지만 쉬지 않고 무언가에 몰두하는 신재현을 본 교육생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의지를 새겼다.
신재현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후배 기수 공무원들 사이에 그의 추종자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완성이다!”
눈을 깎아내는데 열중하던 교육생도 작업을 마쳤다.
허리 부근까지 오는 크기의 동그란 눈덩이의 한쪽 끝에는 자그맣고 뭉툭한 부리가 붙었다.
반대쪽 끝에는 긴 꼬리도 있었다.
몸통에는 깃털을 하나하나 그려 접은 날개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그 밑에는 다른 교육생들이 뭉쳐 놓은 각양각색의 눈사람들이 올망졸망하게 모여 있었다.
“오오!”
건물에서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던 직원들이 박수를 쳤다.
눈으로 새를 만들어낸 교육생은 과장된 자세로 그들에게 인사하더니 결심했다는 듯 소리쳤다.
“고민 끝! 나는 1지망으로 서울지방국세청 넣는다!”
“뭐어?”
“미쳤네…….”
서울권 세무서조차 경쟁이 세서 들어가기 힘든데 다짜고짜 지방청, 그것도 서울청이라니.
“안 돼도 일단 넣는 거죠.”
교육생들의 만류에도 그는 꿋꿋했다.
“쟤가 서울청을 넣는다고? 그럼 난 중부청 넣는다!”
“너까지 왜 그래!”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건데 미리 겁먹는 것보다 낫잖아. 나도 넣는다!”
좀 의지가 과하게 들어간 것 빼고는 평범한 교육원의 일상이었다.
***
교육원에도 회의는 열린다.
국장이 없는 자그마한 기관이라지만 중요 사항이 있으면 각 과의 과장과 팀장이 모였다.
그렇다고 자주 열리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한 해 마무리를 위한 연말 회의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도 불렸다.
“제가 원장이 된 후 처음으로 주재하는 회의로군요. 연말의 중요한 회의라 팀장님까지 다 불러 봤습니다. 귀찮으시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손경진이 정말로 회의 열었다고 아랫사람들에게 미안해할 성격은 아니다.
필요하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즉, 예의상 한 말이라는 소리다.
그러나 과장과 팀장들은 감격한 것처럼 한 목소리가 되어 말했다.
“아닙니다, 원장님.”
“부르시면 와야죠.”
역시나 손경진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나는 애써 웃음을 삼켰다.
교육원 사람들이 순수해서 원장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 아닐까 걱정했는데, 이 정도로 순수하면 오히려 원장이 곤란할 것 같다.
원장은 헛기침을 하더니 바로 안건을 꺼냈다.
“연수원 성적은 나왔습니까? 이번 주 안에는 본청 보내야 합니다만.”
“모두 완료했습니다. 중간 평가와 최종 평가 비중이 가장 크지만, 기숙사 생활 점수와 활동 점수도 반영되었습니다.”
연수원에서는 지식뿐만 아니라 인성도 중요하게 본다.
그렇다고 모든 교육생을 감정해서 판단할 수는 없으니 봉사나 기숙사 내의 생활 태도 등을 보는 것이다.
이 방식이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딱히 대안이 없기에 유지되는 것이기도 했다.
“희망 근무지 신청은 어떻습니까?”
“그게…….”
담당 과장이 말을 흐리자 손경진이 눈썹을 꿈틀했다.
보통 청장이 참석한 상급자 회의에서 국장이나 과장이 저런 식으로 말을 흐리면 대형 사고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는 교육원이다.
“좀 비현실적으로 쓴 교육생들이 많습니다. 다시 쓰라고 하자니 형평성의 문제도 있고 규칙에 어긋난 것도 아니라서…….”
과장은 자꾸만 말끝을 흐렸다.
표정만 보면 심각한 고민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손경진이 참지 못하고 캐물었다.
“명확하게 설명을 하세요. 뭐가 문제입니까?”
손경진을 오래 알고 지낸 것은 아니지만 그는 대화에서도 합리와 효율성을 추구했다.
아무리 시간이 남아돈다고 해도 이렇게 말을 빙빙 돌리는 방식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호통이 날아오지 않는 걸 보면 중부청이 아니라 교육원이라 많이 참는 것 같다.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교육생들의 과한 열정이 자칫 기회를 놓칠까…….”
“설명 간명하게! 다시!”
결국 손경진이 폭발했다.
그래도 쫓아내진 않으니 다행인가.
과장은 딸꾹질을 한차례 하더니 눈동자를 데록 굴렸다.
이윽고 생각의 정리를 끝낸 과장이 짤막하게 사건을 요약해 냈다.
“교육생들 중에서 지방청을 지원한 인원이 서른에 육박합니다.”
“……?”
그게 무슨 문제냐는 표정의 손경진과 이게 왜 문제가 안 되냐는 표정의 과장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보다 못한 내가 결국 끼어들었다.
“원장님,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네가 정리해서 명확하게 보고해.”
“신입 공무원들이 바로 지방청으로 갈 확률은 희박한데 소중한 근무지 신청의 기회를 그렇게 쓴 것을 보니 안타깝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원해서 쓴 것을 물릴 수도 없으니 곤란하시다는 거죠.”
손경진이 순간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게 지금 문제인가……?”
“교육생들이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나 싶으셨겠죠.”
내 적나라한 표현에 과장이 흠칫했다.
“그렇게까지는 아닙니다!”
손경진이 과장의 말을 막았다.
“그 말인 것 같은데. 지금 교육생들이 어차피 가지도 못할 지방청에 지원해서 1순위 지망을 날려 버린 게 아깝다 이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손경진은 매우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다들 성인인데 자기 선택은 자기가 책임져야죠. 그리고 헛수고라고 누가 그럽니까? 정말 저 중에서 바로 지방청 가는 인재가 나올 수도 있죠. 1지망을 날린다고 해도 2지망, 3지망이 있으니 과장님이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그럴까요……?”
어쩐지 손경진이 과장을 달래는 것처럼 보였다.
많이 유해졌네.
청장 회의였다면 보고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오라고 판을 엎어 버리지 않았을까.
“다음 안건은 뭐죠?”
“단합대회와 수료식입니다.”
“단합대회? 아, 교육생들 고생했다고 편하게 놀게 해주는 그거 말이죠?”
“네. 맞습니다. 그동안에는 활동 점수도 있다 보니 협동성을 중시해서 체육대회를 주로 했는데 마지막에는 그런 것 일절 없이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산을 어디까지 편성할지가 문제입니다.”
“가수라도 부르게요?”
“허락해주신다면…….”
예산을 담당하는 지원과장이 손경진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손경진은 의외로 쉽게 답을 내렸다.
“그건 쉽게 해결될 것 같네요.”
손경진이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부르면 좋아할 사람이 있어서.”
나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