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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망나니-303화 (303/500)

303화. 음주 집필은 위험하다 (2)

-수신 확인: 읽음

우리는 하얀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글자를 보고는 허둥대며 취소 버튼을 찾았다.

이미 읽은 메일은 취소가 불가능하다는 건 안다.

다만 우리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없는 버튼을 찾을 정도로.

“왜들 이래? 아직 술이 안 깬 거야?”

어머니가 내 등을 한 번 더 후려치고 나서야 우리는 인정했다.

취소가 안 된다!

망했다!

“자, 잠깐만. 엄마, 우리 잠깐만 생각을 좀 해 보려고 노력을 해 볼게.”

나는 횡설수설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어머니는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우리가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 싶었는지 순순히 일어섰다.

“그럼 얼른 정리하고 넘어와. 밥은 먹어야지.”

“으, 응.”

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도어락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모니터의 화면을 보았다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갖 혼돈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낄낄대면서 만두를 다 먹은 것은 기억난다.

입에 소시지 하나씩 물고 신나게 노트북을 연 것도 기억난다.

그다음이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질 않았다.

우리는 잔뜩 얼어붙은 채 현실부정을 시작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사고 칠 수도 있는 거죠. 중요한 건 수습입니다.”

이 말은 사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닌데.

회사에서 신입사원들 가르칠 때 쓰는 말이지.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다, 배우려는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일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신입사원 교육에서 종종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황민우는 내 잘못된 비유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방구석에 굴러다니던 핸드폰을 가져와 쥐여 주었다.

“……제가 해요?”

“원래 수습은 상사가 하는 겁니다.”

할 말이 없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교수과 사무실 번호를 검색했다.

“제발, 제발!”

“제발!”

우리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읽기만 했으면 아직 늦지 않았어!

행복회로가 맹렬히 돌아갔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우리의 희망을 한방에 부쉈다.

-신 선생님, 보내주신 원고 잘 받았습니다. 원장님 결재도 떨어져서 인쇄 맡겼어요. 아마 내일이면 견본 나올 거예요.

털썩, 나는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우리는 통곡을 시작했다.

“망했어! 망했어!”

“어쩌자고 저런 서문을 쓰신 거예요!”

“아니, 형이 말렸어야죠! 원장님도 미쳤지! 저걸 왜 통과시켰대요?”

“원장님이 겉으로는 쿨해 보이는데 혹시 아직 뒤끝이 남은 것 아닐까요? 이건 뭔가 속셈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손경진이 그렇게 치졸한 놈은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는 부인하고 싶었다.

수습할 방법이 아예 없다니.

차라리 자비 출판이라면 집 한구석에 쌓아 놓기라도 하지.

이건 인쇄하자마자 도서관에도 비치하고 교수들도 한 번씩 보고, 교육생들도 보고!

내년에 들어올 교육생들도 볼 테고, 나중에 지방청까지 퍼질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흑역사가 탄생한 것이다!

황민우가 분개하며 소리치다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아씨, 잠깐만요. 바닥 치니까 속 뒤집히는데. 소리 지르지 말아 봐요.”

“지금 그게 문제예요? 앞으로 보는 사람마다 서문 왜 그렇게 썼냐고 물어볼 텐데!”

대체 왜 술을 먹었을까.

차라리 안 써지면 안 써지는 대로 재미없게 쓸걸!

나는 답답해져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사이 황민우는 노트북 앞에 앉아서 자신이 쓴 서문을 한 문장씩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표정이 밝아졌다.

“어? 저는 생각보다 괜찮게 썼는데요? 어디 보자, 팀장님은…….”

황민우가 피식 웃더니 나와 내 노트북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팀장님, 이건 좀 심하네요. 또라이가 되어보자? 어쩌자고 이런 말을…… 푸흡.”

“혼자만 살겠다 이겁니까?”

“크흠.”

내가 노려보자 황민우가 급히 웃음을 지우며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불안해졌다.

두 명이 서문을 썼는데 한 명만 이상하다면 더 비교가 될 것 아닌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황민우의 노트북 앞에 앉았다.

황민우가 의기양양하고 여유로운 몸짓으로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는 동안 나는 그의 서문을 읽었다.

숙취 때문에 눈앞이 핑 돌자 억지로 눈을 가늘게 뜨고 한 글자씩 힘겹게 읽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황민우가 내게 차가운 생수 하나를 내밀었다.

이번엔 내가 의기양양할 차례다.

“제 거랑 별다를 바 없는데요? 다행이네.”

“예? 그럴 리가 없는데요.”

“제거보다 좀 약해 보여서 그렇지 이미 충분히 서문답지 않은 서문입니다. 특히 중간에 이건 뭡니까? ‘또라이 상사를 모시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리고 여러분은 또라이 상사보다는 그를 모시는 부하직원이 될 확률이 높다.’ 이게 설마 정상적인 서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그게 왜요? 저는 사실대로 쓴 건데요? 팀장님 서문보다 나으면 된 것 아닌가요?”

내 서문이 더 심각하니까 시선이 나한테 쏠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절대 그럴 리 없지!

행복회로가 과부하 되다 못해 탄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극구 부인했다.

“아니라니까요! 절대 아냐! 그냥 인정하세요. 흑역사 맞다니까요!”

“아니에요, 팀장님. 서문이 딱 2개 실리는데 그중 제가 더 멀쩡하니 괜찮습니다.”

“둘 다 상식에서 벗어난 건 맞다니까요! 그럼 나란히 흑역사지 뭘 부인해!”

“그럼 채팅방 올려서 물어볼까요? 한 명만 흑역사인지, 둘 다 흑역사인지?”

황민우의 제안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내가 놀라자 황민우가 그제야 아차 했다.

“팀장님, 제가 방금 미쳤었나 봅니다. 이걸 채팅방에 올린다니. 자진 납세도 유분수지.”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니 다행입니다.”

교육원에 나도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절대 다른 곳에 퍼뜨릴 순 없다.

우리는 입을 싹 닫기로 했다.

“교육원에서만 잘 버티면 되는 겁니다.”

“넵.”

우리는 조용히 의기투합했다.

***

쉬는 시간.

강의실마다 교육생들은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제 곧 연수원의 성적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마지막 시험이 다가온다.

쉬는 시간이라고 떠들 여유가 없었다.

-도르르륵.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복도에 손수레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기자재 옮기는 것이겠거니, 했지만 손수레는 강의실 앞에서 멈췄다.

강의실 문이 열리고 지원팀 직원들이 책을 한 아름 갖고 들어오더니 강단에 쌓기 시작했다.

딱 봐도 새 책이었다.

교육생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설마 이제 와서 저걸 공부하라는 건 아니겠지?’

시험 직전에 공부할 범위가 늘어나는 건 결사반대다.

교육생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질 무렵, 해쓱해진 얼굴의 신재현이 들어왔다.

그는 직원들이 책을 옮기는 걸 보더니 자신도 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쌓고 직원들이 나가고 나자 칠판 앞에 서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 아픈가?’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싶을 정도로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강의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도 신재현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쌓인 책을 보고 한숨을 쉬더니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민우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다고 해결되는 거 아니니까 그냥 얼른 나눠주고 끝내시죠.”

“형. 여기 몇 층이죠? 뛰어내리고 싶은데요. 쥐구멍은 없나요?”

“2층이라 뛰어내려도 기절 안 합니다. 다리 부러지고 더 쪽팔릴 거예요. 흑역사 하나 더 추가하고 싶으시면 하시던가.”

“아, 약 오르네.”

둘의 대화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워낙에 강의실이 조용하다 보니 선명하게 들렸다.

교육생들이 책에서 눈을 떼고 신재현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런 반응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호기심 어린 눈빛이 꽂히자 신재현은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더니 포기한 눈빛으로 말했다.

“제가 맡은 강의 이름과 마찬가지 주제로 엮은 실무서입니다. 세무조사 실무요. 저희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선물입니다. 시험과는 아무 상관 없으니 편히 보시면 됩니다.”

이왕이면 교육원 떠난 후에 보세요, 라는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붙었다.

교육생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렇게 싫어하지?’

신재현이 진저리를 칠수록 교육생들의 호기심은 짙어졌다.

“그럼, 가져가세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르르 교육생들이 몰려나왔다.

고등학교의 쉬는 시간을 떠올린 신재현이 아차 했지만 의외로 교육생들은 질서정연했다.

연수원에 들어온 직후 관리와 전달의 편의를 위해 조장을 뽑는다.

지금 그들이 앞서 나와서 자기가 맡은 줄에 책을 돌리고 있었다.

뒤늦게 나온 교육생들도 줄을 서더니 두세 권을 가져가 뒷줄에 돌렸다.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신재현에게는 불행하게도 실무서를 나누는 데는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교육생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책을 넘겼다.

곳곳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우와! 소제목! 소제목 봐봐!”

“정말 있었던 실무 이야기 제1화 호텔 주차장 땅바닥의 20억!”

“기사로 나왔던 그거다! 뒤에는 지산 그룹 조사했던 얘기도 있어요!”

이미 강의 중이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신재현은 굳이 소란을 잠재우지 않았다.

정규 과목도 아니고 꼭 나가야 하는 진도도 없었으며 시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교육생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그러면서도 유익한 정보를 얻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강의의 목적이기도 했다.

굳이 재촉할 필요도 없었고 무엇보다 신재현은 지금 교육생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교육생들이 책을 찬찬히 훑어볼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주고는 신재현과 황민우는 귀를 쫑긋 세우고 분위기를 살폈다.

“헉, 신기해! 사전준비부터 현장 급습, 자료 처리까지 다 쓰여 있어요!”

“말도 안 돼. 이렇게 자세하게…….”

“우리가 이렇게 해야 되는 거구나.”

“이게 바로 실무서지!”

“이렇게 잘 짜여 있는 거 처음 본다. 무슨 매뉴얼 같아.”

전체적으로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빠져들 듯 페이지를 넘기는 교육생들을 보며 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창가의 두 명이 페이지를 앞으로 되돌리는 것을 보고 다시 잔뜩 긴장했다.

펼친 책의 두께를 보았을 때 서문을 읽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신재현은 두 손을 주물러 손가락을 풀었다.

청장실에 불려 갔을 때보다 더 안절부절못했다.

둘은 뚫어져라 교육생들의 표정 변화를 관찰했다.

처음에는 진지한 얼굴로 빠르게 스윽 읽어내려 가더니 마지막 줄을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은 후 이번엔 차분히, 다시 서문을 읽기 시작했다.

신재현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저걸 왜 두 번이나 읽어?’

당장 뛰어가서 책을 덮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 사이 뒷부분을 대충 훑어보고 서문으로 시선을 돌린 교육생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신재현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눈동자를 굴렸다.

다른 교육생들 역시 길지 않은 서문을 순식간에 읽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신재현을 바라보았다.

서문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은 티가 났다.

서문을 두 번이나 읽던 창가 자리의 교육생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뭔가 감정적으로 동요했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건 또 의외의 반응이었다.

슬슬 시간도 꽤 흘렀겠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이기지 못한 신재현이 가볍게 박수를 쳐서 시선을 끌었다.

“어느 정도 다 살펴본 것 같네요. 주목 해줄래요?”

그런데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처음 강의실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났다.

아니, 그때보다도 지금이 더 심했다.

무슨 말을 하든 뇌리에 새길 것처럼 뚫어져라 신재현을 보고 있었다.

“책은 어떤가요? 쓸 만해 보여요? 유용해야 될 텐데.”

“네!”

대답은 우렁찬 함성이 되어 터져 나왔다.

“최고예요!”

“이겨도 또라이, 져도 또라이면 이긴 또라이가 되겠습니다!”

“발령 나면 세무서 책상에 놓고 볼게요!”

서문의 효과는 굉장했다!

신재현은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에 작게 탄식했다.

“미치겠군.”

신재현 하나만으로도 서울청 국장들이 학을 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오낙현 청장마저 고개를 흔든 적이 있었다.

신재현이 매번 국장 회의에 다녀오면 그 분위기가 어땠는지 아는 황민우는 저들의 상사가 될 사람들을 애도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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