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02화 (302/500)

302화. 음주 집필은 위험하다 (1)

우리는 시간이 될 때마다 이제학의 연구실에 갔다.

처음엔 너무 귀찮게 하는 것 아닌가 걱정해서 하루 거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바로 구내식당에서 붙잡혔다.

“거참, 요즘 그 얘기 듣는 게 낙인데 왜 안 옵니까. 당분간 저 한가한데.”

슬슬 교육생 수료가 눈앞인데 정말 한가할 리가 없지.

물론 바쁜 시즌은 지났다지만 교육생 마지막 테스트와 평가가 남았다.

그런데도 한가하다고 말해주는 것은 우리를 배려하기 위함이겠지.

그렇게 약간의 감동과 함께 쳐다보자 이제학이 의아해했다.

“아니, 진짜로. 얘기 재밌던데요. 3년을 아주 알차게 보내셨더만. 투입되는 사건마다 5년에 한 번 겪어볼까 말까 한 것들이던데요. 궁금하니까 오늘은 꼭 와요. 땅에서 돈 캐낸 거 그거는 꼭 듣고 싶으니까.”

……배려가 아니었나?

이제학은 정말로 재밌어하며 우리 얘기를 들었다.

간혹 박수를 치고 박장대소를 하기도 했다.

듣는 사람이 저렇게 반응을 잘 해주니 말하는 것도 재밌다.

“근데 교수님, 이거 대부분 기사로 다뤄진 얘기인데요. 물론 내부적으로 있었던 의도나 사정은 기사로 나오지 않았지만…….”

“에이. 기자들의 추측이 들어간 소설 같은 게 뭐가 재밌어요. 원래 소설보다 현실이 더 재밌는 거라고 하잖아요. 직접 겪은 사람 입으로 듣는 게 최고지. 그래서 그때 국회의원 표정이 어땠습니까?”

얘기는 며칠이고 이어졌다.

이제학이 무조건 듣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면지를 펼쳐두고 간간이 키워드를 적었다.

그리고 다음날 가보면 그것을 연결해 문장을 만들어두곤 했다.

우리는 그것을 눈여겨 보았다가 관사에 돌아가서 우리끼리 연습을 해 보기도 했다.

이윽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이제학은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국회의원 류석호 조사 건]

[고액체납자 100억 징세 건]

[갤러리 및 미술품 비리 조사 건]

[건설회사 조사 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조사 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이란 대기업을 뜻한다.

자산총액 10조 이상인 회사는 거느린 계열사 사이에 상호 출자를 할 수 없다.

좀 더 범위를 넓혀서 공시대상기업집단을 대기업으로 보는 사람도 있긴 한데, 이 경우엔 자산총액 5조 이상을 뜻한다.

이제학이 제목을 붙인 조사 건은 바로 지산 그룹을 말한 것이었는데 지산은 자산총액이 10조를 훌쩍 뛰어넘으므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이제학은 이런 식으로 내가 했던 조사 건들이 이름을 붙이고 그 옆에는 O와 X 표시를 붙여 놓았다.

그는 일전에도 교수들 성향을 표식으로 나누어 보여준 적이 있다.

교수 생활을 하면서 이런 식의 자료 정리가 손에 익은 모양이다.

“일단 생각해야 할 것이 있어요. 이 실무서를 읽는 사람은 노련한 조사관이 아닙니다. 이제 막 발령받아 나가는 교육생들이죠. 그러니 경험 위주라고는 해도 기본적인 틀은 세법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부가세, 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증여세, 징수. 이렇게 나누고 그 뒤에 업종별로 특이사항을 적어 주는 게 맞다고 봅니다.”

이제학의 세세한 가이드와 함께 우리는 하나둘 책을 엮어나갔다.

가장 중요한 탭이 될 ‘조사 일지’는 맨 뒤에 딱 10건만 싣기로 했다.

간간이 다른 교수들이 찾아와 조언을 주기도 하고 오타를 잡아주기도 했다.

처음엔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이제학의 말대로였다.

우리가 푼 이야기들은 그대로 초고가 되었다.

물론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수십 번을 수정하고 문장 배치를 바꿔보기도 하고.

그렇게 완성된 실무서는 무려 250페이지가 되어 있었다.

더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다.

이 정도면 남에게 보여줘도 된다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가장 큰 난관이 남았다.

나는 오랜만에 다시 막막한 기분을 느꼈다.

[서문]

빈 문서에 커서가 깜빡였다.

나는 화면을 노려보며 팔짱을 꼈다.

상황은 옆에 있는 황민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함께 쓴 것이라 공동저자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서문은 따로 쓰란다.

뭘 써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보통 동기 같은 거 쓰지 않나요?”

황민우가 멍하니 물었다.

그는 지금 커피만 3잔째였다.

“동기요……? 원장님이 쓰라고 하셔서 썼죠.”

“아, 맞다. 그랬죠.”

솔직함은 미덕이라지만 ‘원장님이 시켰다’라고 노골적으로 써도 되나?

우리는 고심에 빠졌다.

황민우가 뚜둑 소리가 나게 목을 돌리더니 말했다.

“저 말고 팀장님만 쓰시면 안 될까요?”

“안 돼요. 안 바꿔줘. 돌아가.”

“어디서 그런 말 배워오셨어요.”

“인터넷이요.”

“와이파이 2주 압수.”

“아, 왜!”

일하기 싫으니 괜히 잡담만 늘어난다.

밤도 늦었겠다, 모인 장소가 황민우의 집이기도 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술을 꺼냈다.

황민우의 집에서 모인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집엔 어머니가 계신다.

요즘엔 건강이 꽤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일찍 주무시도록 무슨 일이 있으면 황민우의 집으로 건너오곤 했다.

내가 하도 자주 놀러 가다 보니 강박증 있는 것처럼 깔끔했던 황민우의 집은 우리 집처럼 어질러져 있었다.

내가 가져온 술병을 본 황민우가 눈을 크게 떴다.

“한라산 드시게요? 저녁에 가볍게 먹기엔 좀 센데. 다른 거 없어요?”

자기 집인데 냉장고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른다니.

나는 응? 하고 되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주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것이 바로 저번 주였지.

그것도 팀원들이 뭔가를 잔뜩 사 들고 들어와서 다 못 먹고 갔기 때문에 뭔가 나도 모르는 것들이 들어있었다.

이 한라산도 마찬가지다.

“이건 대체 누가 샀대요?”

“저는 아니에요. 근데 대충 짐작이 가지 않아요? 제주도에 왔으니 한라산을 보며 한라산을 마셔야 한다고 낄낄거리면서 샀겠죠.”

“아, 범인은 장세훈 주사보님이구나.”

황민우가 탄식했다.

그 사이 나는 냉장고를 뒤져 냉동식품을 꺼냈다.

만두에 핫바에 비엔나 소시지, 훈제 닭다리까지 안줏거리가 그득하게 쌓여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놨대. 혜원 씨 작품인가?”

황민우가 다가와 냉동실 사진을 찍더니 채팅방에 올렸다.

-황민우 : 누가 이렇게 사놨어요? 다 먹고 가지.

-강혜원 : ㅋㅋㅋㅋㅋ 이제 보신 거예요? 밥을 안 해 드시나!

-신재현 : 이거 어케 다 먹음?

-장세훈 : 한라산이랑 먹으면 일주일 안에 킬

-신재현 : 역시 너구나!

-안길진 : ㅋㅋㅋㅋㅋㅋㅋ범인, 세무서에서 검거

황민우가 채팅방에 뭔가를 쓰는 동안 나는 프라이팬을 꺼냈다.

만두를 굽고 닭다리를 데우고 소시지를 볶았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신재현 : [사진]

-강혜원 : 아, 제발!!!!!!!!

-강혜원 : 테러다, 테러!

-장세훈 : 이 시간에 야식 사진 미쳤냐? 너 서울 오기만 해봐.

-안길진 : 컵라면 먹어야겠다.

-장세훈 : 먹기만 해. 사진 올리지 마. 죽여 버린다.

-강혜원 : [사진]

-장세훈 : 너까지 왜 그러냐, 진짜…….

-안길진 : 오! 컵라면 드시게요?

요즘엔 저 세 명 놀려먹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된 느낌이다.

오늘치 놀려먹기 할당량도 채우고 나니 하루 일과가 끝난 느낌이다.

우리는 히죽 웃으며 상을 차렸다.

편한 자리에 평소보다 도수가 높은 한라산이 들어가니 취기가 빨리 올랐다.

닭다리를 해치우고 만두를 반쯤 먹어 치웠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뭘요?”

“서문이요. 다른 교수님들 서문 보면 그렇게 특출나게 잘 쓴 건 아니었잖아요. 생각해보면 교수님들도 마찬가지예요. 가르쳐야 하니까 필요해서 쓴 거잖아요. 그걸 잘 포장해서 서문에 쓴 거지.”

“그렇죠!”

맞장구치는 황민우의 발음이 꼬였다.

나도 발음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냥 쓰죠! 이상하면 교수님이 봐주시겠지!”

“그렇습니다! 원래 이런 건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는 거라고 했습니다! 인터넷에서 봤어요!”

황민우는 노트북 앞에 앉아 괜히 폼을 잡으며 잔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웃었다.

“크하하하! 장세훈 주사보님 웃기지 않아요? 여기서 한라산은 보이지도 않는데 한라산을 왜 사와?”

뭐가 그렇게 웃긴가 했더니 별것도 아닌 거였네.

그런데 어느새 내 입가가 씰룩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아하핫! 한라산 보면서 한라산 마신다는 것도 웃기지 않아요? 나이 몇 살 차이 나지도 않으면서 아재 개그야!”

그냥 만사가 다 웃겼다.

반쯤 감겨오는 눈을 억지로 뜨며 우리는 노트북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질세라 키보드를 두드렸다.

10포인트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감으로 쳐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필름이 끊겼다.

***

교육원장실에는 아침 일찍부터 인쇄 전 자료 하나가 도착했다.

바로 신재현과 황민우가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쓴 ‘국세공무원 세무조사 실무서’였다.

교수들이야 어떤 참고서를 쓰든 원장이 일일이 개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재현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랐기에 온 직원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막상 시켜놓고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 반, 결과물에 대한 궁금증 반으로 손경진은 미리 교수과에 일러 두었다.

인쇄 맡기기 전에 보고 해달라고.

그것이 지금 교수과 과장의 손에 들려 손경진에게 건네졌다.

졸지에 원장과 독대하게 된 과장이 긴장하며 서 있는 동안 손경진은 종이를 넘겼다.

인쇄만 맡기면 될 정도로 작업이 다 끝난 종이 뭉치였기 때문에 맨 앞장을 넘기자 서문이 나왔다.

[서문]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세공무원으로서 수많은 탈세범을 보며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실전이다 X만아.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생은 실전이라는 말은 탈세범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막 연수를 끝내고 나간 국세공무원은 청운의 꿈을 품고 실무에 투입되지만 실제로는 세무대리인에게 밀리는 일도 허다하다.

이 책은 아직 푸르른 새싹과도 같은 공무원 후배 여러분들을 위해 만들었다.

여러분은 앞으로 성실 납세자를 만나 감동하기도 하고 악덕 탈세자를 만나 속이 터지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시행착오를 겪을 여러분의 고생을 덜어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이다.

덜 구르고 덜 속 터지고 세법대로 잘 과세해서 멋진 국세공무원으로 성장했으면 한다.

그래서 나중에 필드에서 조사관으로서 만났으면 한다.

누군가는 나를 또라이라고 부른다.

이 책에 내가 그렇게 불린 과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일을 잘해서 또라이라는 별명을 받은 거라면 나는 자랑스럽게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다.

우리 함께 또라이가 되어 보자.

신재현.

딱 한 장짜리 서문이었는데 그 안에 담긴 뜻은 엄청났다.

다음 장을 넘기기가 두려워질 정도였다.

“이 미친놈…….”

손경진의 입에서 욕설이 절로 나왔다.

“황민우 이놈은 정상적으로 썼겠지?”

손경진의 혼잣말에 움찔한 과장이 재빨리 대답했다.

“신재현 선생님의 서문보다는 그나마 정상입니다.”

손경진은 이어서 뒷장을 넘겼다.

[서문]

-우리는 FM대로 움직여야 하는 집단이다. 앞서 신 모 조사관님의 서문만 믿고 날뛰었다간 권력 남용으로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후배님들은 기억하자.

해고통지서가 아닌 별명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날뛰기만 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어디까지나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세법과 규칙의 범위 내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잊는 순간 여러분은 징계위와 소송전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앞 장의 임팩트 때문에 묻혔을 뿐, 황민우의 서문도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손경진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이 미친놈들.”

과장이 손경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다시 쓰라고 할까요?”

과장도 아침 일찍 두 장의 서문을 읽어보고 기겁했다.

이게 요즘 젊은이의 패기인가?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읽어보았다.

보낸 시각은 새벽 2시 30분.

내용이 파격적이라고는 해도 그들이 고심하며 쓴 서문을 과장 마음대로 손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단 손경진에게 갖고 온 것이다.

원장의 명령이라고 하면 좀 온화한 문장으로 다시 쓰겠지, 하고.

그런데 손경진은 ‘미친놈’이라고 험악하게 내뱉은 것과는 달리 표정은 밝았다.

“아니, 그냥 이대로 실어.”

“……정말 괜찮으실까요?”

“국세청 욕한 것도 아니고 맞는 말 썼는데 뭐.”

“어조가 조금…….”

“얘네 성격에 비하면 순화한 건데.”

“이게 순화한 거라고요?”

과장은 충격적인 얼굴로 숨을 들이켰다.

“아, 알겠습니다. 인쇄 찍겠습니다.”

원장의 결재가 떨어지고 과장이 인쇄 작업에 착수할 무렵.

관사에서는 술에 전 두 명의 청년이 어머니의 등짝을 맞고 일어났다.

“어제 얼마나 마신 거야? 어서 일어나! 민우 씨도 어서요!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어? 어…… 몇 시야? 벌써 점심 때네.”

그리고 둘은 까맣게 암전되어 있는 노트북을 건드려 화면을 켜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아악! 뭐야, 이거! 전송됐는데!”

“취소! 발송취소 안 돼요?”

“이미 읽었어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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