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01화 (301/500)

301화. 교수회의 (3)

“내 방식이긴 한데, 쭉 키워드를 써놓고 같은 주제끼리 묶어서 연결하면 구분하기가 쉬워요.”

“어, 교수님도? 아, 저도요. 제 경우에는 마인드맵처럼 파생돼서 나가는 방법도 씁니다.”

“아이쿠, 다들 쓰는 방식은 비슷하구만!”

교수들은 열정적이었다.

소 닭 보듯 하던 사람들이 자기 일도 아닌데 이렇게 발 벗고 나서는 것을 보니 새삼 신기했다.

너무 적극적이라서 벌써 목차가 반쯤 완성되었다.

이들도 처음부터 교수였던 건 아니고, 현직에서 뛰다 온 사람이라서 그렇다.

세무조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는 것이다.

“아차, 우리가 너무 마음대로 했나? 신 팀장님의 교육자료인데.”

“아닙니다. 뭘 써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교수님들의 경험담이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큰 틀만 잡아볼 테니까 신 선생이 수정을 해 봐요. 그렇게 맞춰나가면 되겠네.”

교수들이 무언가 기대하는 얼굴로 날 바라보길래 나도 맞장구를 쳤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과정을 넣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전에 체크해야 하는 것들 있잖습니까. 재무제표랑 신고서 열어보는 건 기본인데 개중에는 납세자 동의가 필요한 것도 있구요. 현장에서 확인해야 하는 것도 있는데, 현장 조사 나가기 전에 ‘이번 조사에서는 뭐는 반드시 확인하겠다’라는 것도 있잖아요.”

일반 회사의 회계팀이라 경리팀 같은 경우에는 있는 것들 다 털어오면 되는데, 세무사사무실에 나가게 될 때는 상황이 좀 다르다.

거기는 수백 개의 회사를 세무대리하는 곳이라 딱 조사대상 회사의 것만 골라서 가져와야 한다.

그래서 특히나 어려운 것이다.

차라리 깔끔하게 싹 쓸어오면 편하지.

“오, 아직도 그렇게 하나요? 제가 현직일 때는 일단 부장부터 불러서 조졌는데.”

이런 험악한 말을 하는 사람은 왕년에 조사과에 잠시 있었다는 소득세법 교수다.

그의 말에 옆에 있던 국세기본법 교수가 기겁하며 말렸다.

“요즘 세상이 어느 땐데! 조진다고 말하지 말아요!”

“잉? 지금은 부장 먼저 안 불러요?”

그가 날 바라보길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부릅니다. 부르는 건 맞는데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하긴 하죠.”

“거 봐요! 시대가 바뀌었다니까! 조지는 거 없다구!”

“흠, 우리 때는 부장 부르면 이사가 먼저 알아서 달려오고 그랬는데. 그럼 콱 조용히 협조하라고 분위기 조성 좀 하면…….”

“아이구, 이 교수님! 또 무슨 말씀이에요. 설령 악덕 탈세자들 갈구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책에 실을 수는 없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이거 공식적인 국세청 내부자료가 되는 거잖아요. 어디까지 쓸지 그것도 고려해야겠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가 뭐 불법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대놓고 따라 하라고 하기엔 좀 껄끄러운 것이 좀 있다.

방금 교수 하나가 말한 게 대표적인 것이다.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는 어디부터 파고들어 가야 하는지 등등.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약속한 듯 입을 열었다.

“후배들이 보기에 ‘이거 미친 새끼들 아냐?’ 하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만 합시다.”

“그, 그럽시다. 아무리 실무 중심이라고 해도 선은 있는 법이죠.”

나 역시 동감이었다.

다만 최대한 사실적으로 쓰고 싶었다.

이론만 보다 실무 나오면 가장 당황하는 것이, 책에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것이다.

“일단 제가 쭉 써보겠습니다. 이건 빼야겠다, 싶은 게 있으면 교수님들이 봐주실 수 있을까요?”

“그게 좋겠네요. 이건 써도 되나? 고민하는 것보단 나아요.”

“신 선생님, 맞춤법은 이쪽 국징법 교수님이 굉장히 잘 아십니다. 그리고 그 뭐라고 하지? 디자인이었던가. 하여튼 깔끔하고 보기 좋게 정리하는 건 여기 부가세법 교수님이 우리 중에서 제일 나아요. 여기 휴게실에도 우리 책들 있으니까 참고해서 보시면 됩니다.”

“혹시 보고 싶은 책이나 자료 있으시면 교육원 도서관 가시면 됩니다. 그동안 교수님들이 낸 책도 다 있어요.”

이들은 말 그대로 도와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해야 하는 몫이다.

그래도 다 쓰고 나면 뭘 넣고 뺄지 이들이 봐주겠다고 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옆에 있던 교수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쓰는 것도 혼자만의 공부입니다. 한번 해보고 찾아오세요. 처음이라 어렵겠지만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장담해요.”

“네. 감사합니다. 너무 귀찮게 해 드리는 것 아닌가 걱정이네요.”

“우리 일이 후학을 가르치는 건데요. 언제든 와요.”

교수들은 해보고 찾아오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처음 해보는 거지만 교수들이 기본 도식도 짜 줬겠다, 목차도 대충 잡혔다.

까짓거 부딪혀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세법을 연구해서 쓰는 과목도 아니잖은가.

나는 교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황민우와 관사로 돌아가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리고 30분을 끙끙댔지만 단 한 자도 쓰지 못했다.

“아, 안 되겠다!”

황민우와 나는 나란히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하하하핫! 언제 오실까 기다렸습니다.”

이제학은 죽상을 하고 들어가는 우리 얼굴을 보자마자 웃어 젖혔다.

“웃지 마세요, 교수님. 올까 말까 정말 고민 많이 했단 말입니다. 자꾸 이러시면 도로 갈 겁니다.”

“죄송합니다. 어서 앉으세요.”

우리는 익숙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카지노 세무조사 준비를 하면서 이제학에게 배울 때 우리가 앉았던 자리다.

그때로부터 1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한참 만에 돌아온 느낌이 났다.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학의 분위기도 꽤 바뀌어 있었다.

예전보다 여유 있어 보이고 유쾌함이 느껴졌다.

지금 당장 날 놀리는 듯한 웃음을 짓는 것부터가 그랬다.

“저희 없는 동안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있으셨나 봅니다.”

무슨 일이 있었을 리는 없다.

그랬다면 바로 연락이 왔을 테니까.

이 질문은 그냥 내 심술이었다.

지금도 이제학이 히죽히죽 웃고 있어서 그렇다.

“재미야 있죠. 두 분의 활약은 신문으로 아주 잘 챙겨 봤거든요. 가르친 보람이 있는 학생은 오랜만이라서. 매일매일 신문 보는 게 제 하루 일과가 되었지 뭡니까.”

이제학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나는 괜히 멋쩍어져서 그의 말을 끊고 테이블에 선물을 올렸다.

원장에게 준 것과 같은 선물세트다.

원래 원장에게 주고 나서 바로 들릴 생각이었다.

교육원에 오고 나서는 내내 한가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출근 첫날부터 이렇게 사건이 폭풍처럼 몰아칠 줄은 몰랐다.

“아이쿠, 이게 뭐야. 관광하러 다녔구만! 이 사람들 안 되겠네!”

“아주 잘 놀다 왔습니다.”

“그런 것 같네요. 근데 놀다 왔으면 됐지 이건 왜 사 왔어요?”

나는 이제학이 했던 것처럼 장난기를 가득 담아 말했다.

“뇌물입니다.”

“교육원 교수가 무슨 힘이 있다고 뇌물까지 주고 그럽니까. 무슨 부탁이든 못 들어줄 것 같으니까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대가 없으면 뇌물이 아니라 선물이지.”

이제학은 내 장난을 아주 가볍게 받아쳤다.

그리고 차를 뜯더니 향기를 맡아 보았다.

“향 괜찮네. 가격 꽤 나갔겠는데요.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저희가 더 감사하죠.”

이제학은 자연스럽게 포트에 물을 올렸다.

선물 받으면 바로 대접하는 게 교육원 교수님들 공통점인가.

이번엔 황민우가 부리나케 튀어나갔다.

“앉아 계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부탁 좀 하겠습니다. 찻잔은 대충 머그컵 쓰세요.”

“넵.”

손경진과 달리 이제학은 황민우의 호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여기서 1:2 개인 수업을 듣는 동안 머그컵 위치 정도는 파악해뒀다.

황민우는 익숙하게 차를 준비했다.

“그래서 제가 알려드린 건 써 먹을 만 했습니까?”

“도움이 되다마다요. 카지노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던 햇병아리를 바로 조사에 투입해도 좋을 정도로 가르쳐놓으셨잖습니까.”

“금칠을 하시네. 햇병아리는 무슨. 저기 강의실에서 수업 듣는 애들이 삐약거리는 소리를 덜 들으셨나 보군요.”

정말 이제학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다.

원래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나 싶었다.

이걸 물어봐도 되려나?

내가 고민하고 있자 이제학이 그 기색을 파악했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너무 들떴나 봅니다. 신 선생님은 고뇌를 껴안고 왔는데 저만 신났네요.”

“아닙니다. 교수님께서 좋으시면 저도 좋습니다. 그래야 또 가르침을 받을 것 아닙니까.”

나는 장난을 섞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넘기려 했다.

마침 황민우가 컵 세 개를 가져왔고 이제학은 뜨끈한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둑해진 창 너머로 교육원의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

“재밌었다는 건 진짜입니다. 이런 말 하면 제가 나쁜 놈 같아 보일지 모르겠는데, 저는 두 분이 처음 왔을 때 사심을 갖고 접근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을 뒷조사해보라고 직접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렇죠. 그럼 제가 뭘 노리고 도왔는지도 잘 아시겠네요.”

“손경진 원장을 어떻게 하고 싶으셨던 거죠?”

당시 민치호는 이제학에 대한 신상 정보를 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적의 적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우리는 둘 다 손경진을 치길 원했다.

알고서 손을 잡은 것이다.

“원래는 원장님 일 해결되고 나면 따로 자리 만들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 좀 해볼까 했습니다. 두 분이 갑작스럽게 세무서 파견이 결정되는 바람에 다들 공부하느라 바쁘다 보니 말을 할 수가 없었죠.”

“마음에 응어리라도 남아 있으신가요?”

그런 것 치고는 홀가분하고 편안해 보였는데.

역시 이제학은 고개를 저었다.

“응어리까지는 아닙니다. 저는 솔직히 속이 시원해요. 다른 교수님들은 손경진 원장을 좋게 보지만 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알거든요.”

“지금은 원장님 평가가 좋습니까?”

“교육원에서 원장으로서는 잘 하고 있거든요. 교수들에게는 아무 짓도 안 해요. 그 사람의 장기인 세력 만들기도 안 하고, 뭔가 부려먹지도 않고. 얌전히 교육원 원장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 다 포기하셨나 보네요. 다행입니다.”

“신 선생한테는 다행인 일이겠죠. 저도 원장이 맡은 일 잘하는 건 기쁜 일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말년을 보내게 되니 그게 또 기쁩니다. 청장도 아니고 원장으로, 후학 양성에 매진하다 조용히 은퇴하는 거잖아요.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초라한 말년을 제가 바로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잖습니까.”

이제학은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한이 맺힌 웃음소리였다.

나와 황민우는 숙연해져서 조용히 차를 마셨다.

손경진은 지금 남의 인생을 망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그의 턱밑에 비수를 들이댄 것은 나고, 마무리한 것은 국세청장 오낙현이지만 그 발판을 마련해준 것은 이제학이다.

그가 얼마나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았을지, 어떤 마음으로 나에게 접근했을지 상상도 하기 어렵다.

그의 복수는 이루어졌다.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순수한 뜻으로 원장님을 친 건 아닙니다. 저는 민치호 청장님의…….”

“압니다. 얘기 안 해도 돼요.”

이제학은 내 입을 막았다.

“하지만 신 선생, 그리고 뒤에 있는 그분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진 않잖습니까. 오로지 손경진 하나만 쳐냈죠. 그거면 족합니다. 거물과 싸우면서 남 피해 안 가게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여러분은 주위를 둘러볼 줄 아는 사람이고, 그럼 됐습니다.”

이제학은 홀가분한 표정이었지만 우리는 그의 말을 마음 깊이 새겼다.

앞으로 우리는 이제학 같은 사람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언제 어느 순간 비수가 되어 날아올지 모르니까.

“자자, 그럼 무거운 얘기는 여기서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어디까지 쓰셨어요?”

너무 무거워졌다 싶은지 이제학은 갑작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허를 찔린 내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하, 한 자도 못 썼는데요.”

“이야, 내기해도 될 뻔했네! 아까 두 분 나가고 나서 교수들끼리 언제쯤 찾아올까, 몇 자 썼을까 토론했거든요.”

별걸 다 토론하시네.

나와 황민우가 고개를 푹 숙이자 이제학이 우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요. 그러면 최후의 수단이 있지. 나한테 썰을 풀어 봐요.”

“썰이요?”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나요? 조사했던 얘기를 저한테 말로 해보라는 뜻입니다. 그걸 간추리면 초고가 나오지요.”

역시 오길 잘했다.

우리는 차로 마른 입을 적시며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밤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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