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97화 (297/500)

297화. 보고 (1)

-달칵.

문이 가볍게 열렸다.

원장실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은 마음이 가벼웠다.

그야 당연하다.

누군가와 싸울 각오가 아니니까.

원장실에는 늘어선 창문 사이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눈부실 만도 한데 블라인드는 하나도 처져 있지 않았다.

원장의 책상 근처에 있는 창문 하나가 열려 해풍이 솔솔 들어왔다.

창가에는 자그마한 난도 하나 놓여 있었는데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에 난 끄트머리가 자꾸만 흔들렸다.

“뭐야, 벌써 왔어?”

손경진은 책상에 자리 잡고 앉아 결재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잠시 멈칫했다.

아니, 이게 원래는 맞는 것이다.

그는 나와 적대하는 파벌이기 이전에 공무원이었고 내가 몸담은 조직의 상급자이자 책임자니까.

나는 공손한 자세로 책상 앞에 섰다.

나를 올려다보는 손경진의 눈빛에는 일말의 적의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뒤끝이 없다.

지금까지 싸워 본 사람 중에서 제일 깔끔한 마무리다.

“7급 주사보 신재현, 제주세무서 파견을 마치고 교육원으로 복귀했습니다.”

명령에 따라 갔다 온 것이니 복귀 신고는 당연하다.

원래라면 내 직속 상사에게 하겠지만 여기서 내 보고를 받을 사람은 손경진밖에 없으니까.

“여기 약소하지만 선물입니다.”

나는 차 세트를 내밀었다.

관광지로 유명한 다원에서 산 거라 실속보다는 포장을 우선시한 제품이다.

손경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

“놀러 갔다 왔어? 웬 선물이야.”

“빈손으로 돌아오기 그래서요.”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예전이라면 이런 대화는 서로 떠보기 위한 수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농담으로 받아도 된다.

“다른 뜻이요? 예를 들면요?”

“너 없는 동안 내가 수작 부리지 않았는지 확인도 할 겸 길게 얘기 나눠야 하니까 뭐라도 갖고 온 거 아냐?”

“음, 이번엔 틀리셨습니다. 어차피 보고할 겸 원장님과 할 얘기가 많은데요. 이건 정말로 순수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나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제가 여쭤보면 다 대답해주실 것 같은데요. 아닙니까?”

이제 우리 사이에 응어리는 없잖은가.

내 눈에 당신이란 사람은 그렇게 보인다.

물론 짙은 분노와 복수심을 꾸역꾸역 마음 깊숙이 눌러 놓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겉으로는 평화를 유지할 것이다.

이 선물은 그런 상징이다.

“뭐야. 오자마자 도발이야?”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순수한 의도로 드리는 것이니 순수하게 받으시면 됩니다.”

손경진도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주저 없이 선물이 담긴 쇼핑백을 건네받으며 타박했다.

“말도 잘하네. 발령받아서 오자마자 눈에 쌍심지 켜고 원장실 쳐들어온 놈이.”

“사람은 상황에 따라 처신이 달라지는 법이지요.”

“말에 씨가 있어. 나도 처신을 잘하라는 뜻 같잖아.”

뒤끝 없다는 건 취소다.

손경진은 자꾸 나를 놀려먹고 있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싸우는 건 아니고 농담에 가깝지만.

내가 머리를 긁적이자 손경진이 콧방귀를 뀌었다.

“얌전하니 좋네. 앞으로 그렇게 해. 적어도 내가 한참이나 윗줄인데 따박따박 말대답 들어서야 쓰겠어?”

“예, 죄송합니다.”

“가서 앉아.”

얌전히 소파에 앉자 엉덩이가 뜨끈했다.

햇빛에 비춘 부분이 열에 달궈져 있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뜨거운 것은 아니라서 그냥 눌러앉았다.

-사각사각.

펜이 종이에 스치는 소리, 바람이 스며드는 소리가 조용한 원장실을 가득 채웠다.

손경진은 내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결재 서류를 검토했다.

소파는 따뜻하지, 주위는 조용하지.

가뜩이나 잠이 부족하다 보니 눈이 저절로 감겼다.

나는 눈을 부릅뜨며 버텼다.

상사가 일하고 있는데 부하직원이 소파에 앉아 잠든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안 되겠다.

이대로라면 잠들고 만다.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상사를 기다리면서 핸드폰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만 자는 것보단 낫다.

습관적으로 팀원들끼리의 대화방을 켰다.

-장세훈 : 으어어 월요병 죽을 것 같다.

-안길진 : 사진 찍은 거 보실래요?

-강혜원 : 갑자기 무서운데요. 뭘 찍으신 건가요.

-장세훈 : 이 방의 방장은 나다. 마음대로 지울 수 있다는 뜻이지.

-안길진 : 칫.

-장세훈 : 칫? 너 지금 칫이라고 했어?

우리 팀이 사실상 5명이다 보니 1명이 겉도는 일이 잦았다.

장세훈과 강혜원은 서로 티격태격하고 죽이 잘 맞고, 황민우는 주로 날 도우러 쫓아다닌다.

자연스럽게 안길진이 남았는데 업무상으로도 잡일을 도맡아 하는 안길진이 겉돌기 일쑤였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놀고 간 이후로는 먼저 장난을 걸기도 했다.

-황민우 : 1 사라졌네요. 팀장님, 원장실 아니에요?

아니, 이 사람은 맨날 읽음 숫자만 보고 있나?

-장세훈 : 진짜 다 읽음 표시네. 야, 거기 원장님 뭐래? 싸우쟤?

-강혜원 : 핸드폰 보고 있는 거 보니까 쫓겨난 거 같은데요ㅋㅋㅋ

-신재현 : 저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는데요. 원장님 일하느라 바쁘심.

-안길진 : 싸움 다 끝났다면서요. 그거 길들이기 아니에요?

나는 흘끗 손경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한쪽에 쌓인 결재 서류를 검토하느라 바쁘다.

그래도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것 같다.

-신재현 : 음. 약속 없이 찾아왔으니까 하던 일 하는 게 맞긴 하죠. 제가 뭐 대단한 끗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장세훈 : 끗발이야 있…… 아 맞다 너 7급이었지.

-장세훈 : 가끔 까먹는다.

-강혜원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 맞어. 우리 가끔 팀장님이 7급 직원처럼 행동할 때 되게 낯선 거 알아요?

-황민우 : 그게 아니라 얌전할 때 낯선 거죠.

-안길진 : 문 벌컥 열고 쳐들어가서 호통치는 것만 상상 가요. 소파에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는 팀장님이라니.

-신재현 : ㅠㅠ 그만해…….

잠시 채팅방에 ㅋㅋㅋ만 죽어라 올라왔다.

그러다 황민우가 하나의 링크를 툭 던졌다.

-황민우 : 팀장님 명예 회복되셨습니다

명예 회복이라는 말이 나올 것은 딱 하나다.

내가 술 먹고 막말했다는 기사.

링크를 눌러 보니 역시 그것이었다.

내가 제주세무서를 떠난 후 약 일주일 동안 부산청과 제주세무서는 제주도의 언론을 뒤집었다.

자그마한 건물을 배경으로 기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같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있던 사이에서 한쪽은 취재의 대상이 되었다.

저 언론사가 바로 취재도 없이 가짜뉴스를 썼던 곳이다.

고개를 숙이는 기자들의 사진 아래로는 그들의 불법적 행위가 나열되어 있었다.

부지사의 압력을 받아 기사를 썼다는 것, 그전에도 심심찮게 이런 일이 있었으며 국세청은 탈세 혐의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

기사에 첨부된 언론사의 사과문에는 내 이름도 언급되어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피해를 끼쳐 죄송하다고 쓰여 있다.

언론사는 신뢰를 잃으면 살아남기 어렵다.

무슨 기사를 쓰든 사람들이 읽지 않을 테니까.

나는 다시 채팅방으로 돌아왔다.

-신재현 : 국세청에서 좀 과하게 때렸네요. 저러면 망할 텐데.

-장세훈 : 네가 왜 그런 말을 하냐. 저건 본보기잖아.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국세청은 나를 불러올리려고 한다.

거기서 사실도 아닌 일로 내게 흠집을 냈다면 윗선에서 화가 날 만도 하다.

-강혜원 : 자기 행동에는 책임을 져야죠. 저 회사는 지금 그동안 한 일의 책임을 지는 거예요.

그 말도 맞다.

저런 사람들에게 동정을 품는 것 자체가 사치지.

한동안 뭐라 채팅을 치지 못하고 핸드폰만 어루만지고 있을 때였다.

손경진이 탁, 하고 결재 서류를 덮었다.

책상 위를 보니 한쪽에 쌓여 있던 결재 서류가 어느새 반대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손경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로 소파로 오지 않았다.

한쪽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에서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 후 내가 준 선물을 풀었다.

여러 종류의 티백 세트를 보며 잠시 망설이더니 곧 두 개의 티백을 꺼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앉아 있어. 손님인데.”

나는 엉거주춤 일어났던 자세 그대로 다시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씁쓸함이 혀끝에 맴돌았다.

손님이라.

엄연히 아직 나는 교육원의 일원인데 부하직원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손경진의 사람이 아닌 건 당연하지만 아예 부하 취급을 안 할 줄은 몰랐는데.

-달그락.

손경진은 예쁜 찻잔 두 잔을 들고 왔다.

그나마 티백은 빼지 않았고 쟁반에 받쳐 오지도 않았다.

만약 쟁반까지 들고 왔다면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향 좋은 걸로 골랐어.”

“예전에 드셔보셨나요?”

“이런 거 선물 많이 받았지. 찻잎으로 안 사서 다행이네. 타기 귀찮은데.”

“그땐 제가 타야죠.”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경진은 우리던 차의 맛을 보았다.

나도 그를 따라 찻잔을 들어 한입 들이켜 보았다.

음, 정말 모르겠다.

향은 좋았는데 한 모금 마시자마자 내 취향은 아니라는 것만 깨달았다.

그러나 손경진은 누가 봐도 정돈된 자세로 차를 즐기고 있었다.

“이제 티백은 빼. 더 우리면 떫어지니까.”

“여기서 더 떫어져요?”

“지금이 딱 좋아. 고소한 맛도 나잖아.”

“……그렇군요.”

나는 이해를 포기했다.

하긴, 커피도 믹스커피만 먹던 내가 차가 비싼지 아닌지 어떻게 아나.

그러나 내 기색을 읽은 건지 손경진이 찻잔을 내려놓으려는 날 말렸다.

“느끼려고 노력이라도 해 봐. 세법만 잘 안다고 다가 아냐.”

“그야…… 접대하거나 윗분들과 어울리려면 잡다하게 알아야 하는 건 압니다만 저하고는 잘 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냥 과세만 잘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손경진은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어느 조사관이 체납액을 징세하러 차명으로 돌려둔 집에 쳐들어갔다. 체납자는 남편이고 명의자는 부인이었는데 자신은 근 몇 달간 남편을 본 적도 없다며 잡아뗐었지.”

흔히 있는 이야기다.

가족이나 친척 명의로 돌려놓고 돈이 없는 척하는 것이 가장 흔한 방법이니까.

“그런데 그 집에 커피가 있었어. 부인은 식도염이 있어서 커피를 못 마시거든. 하지만 남편은 커피를 좋아해서 종류별로 구비해 놓고 마셨지. 생산 일자를 보니까 얼마 안 됐더라고.”

나는 어느새 이야기에 빠져 귀를 쫑긋 세웠다.

청장급의 경험담은 듣고 싶다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걸 기초로 부인을 다그쳤어. 남편이 여기 들르는 거 안다고. 그러다 안방에 갔더니 냄새 잡는 용도라면서 시판 싸구려 커피가 한 병 있더군. 나름 비싼 커피만 먹는 놈이 싸구려 커피를 갖고 있는 게 이상해서 엎어봤더니 다이아 2개가 나오더라.”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나도 체납징세과에 있으면서 현장에 가봐서 안다.

세금을 작정하고 안 내는 사람들은 정말 기상천외한 곳에 숨긴다.

베개, 옷, 천장, 향신료 사이 등등.

커피 안에 숨기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우리는 그때그때 임기응변이 필요하잖아. 만사가 세법에 따라 딱딱 갈리면 얼마나 좋겠어. 근데 그게 안 돼. 현장 나가면 무슨 기괴한 일이 터질지 몰라. 그러면 그 순간을 좌우하는 건 결국 내 지식이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랑 비슷한 업계인 세무사들도 마찬가지야. 걔네는 합격하면 교양서적부터 죽자고 읽어. 신문도 꼬박꼬박 읽고. 너는 단순히 일선 세무서 직원으로 끝날 생각이 없잖아.”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크게 배웠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손경진이 피식 웃었다.

“사실 윗분들이랑 대화할 때 써먹는 경우가 제일 많지만. 뭐든 잡다하게 알아둬. 이걸 써먹을 날이 있을까? 싶은 것도 언젠가는 써먹게 돼.”

“네. 명심하겠습니다.”

손경진은 찻물로 입을 적신 뒤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뭐가 예쁘다고 가르치나 몰라. 앞으론 민치호한테 가서 배워라.”

“네, 원장님.”

나는 이번에는 차분하게 차를 마셨다.

잘 모른다고 해도 맛과 향을 느끼려 노력했다.

물론 극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적어도 이 맛은 기억했다.

“그럼 이제 보고를 들어보지. 국세청에서 난리던데 이번엔 무슨 사고를 치고 왔나?”

“부지사를 잡고 왔죠.”

“자세히.”

보고라기보다는 이야기에 가까운 형식으로, 나는 첫날부터 순서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손경진은 자신이 내 상사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민치호를 앞에 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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