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반가운 손님 (2)
정신을 차려 보니 아침이었다.
창문에서 들어온 햇살이 방바닥을 비추는 것을 보니 이미 해가 중천인 듯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침대 옆의 협탁 위로 손을 뻗었다.
작고 딱딱한 병이 잡히자 의문이 들었다.
항상 나는 침대 맡에 작은 생수병을 두고 잔다.
어제는 술 먹고 들어왔으니 더더욱 생수를 챙겼을 텐데?
손을 끌어당겨 보니 시야에 자그마한 술병이 들어왔다.
어제 회식 자리에서 부산청장이 주고 간 것이었다.
-뚜르르르!
문득 조용한 방 안의 공기를 뚫고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내 핸드폰은 아니다.
소리가 낯설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고 여기가 관사가 아닌 호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저녁 회식이 늦어지다 보니 섬 건너편의 교육원 관사까지 가기엔 너무 멀었다.
그렇다고 술에 취한 채로 평소 신세를 지던 조사과 직원 관사에 기어들어 가는 것도 미안했다.
그동안 나 때문에 그동안 불편하게 지냈는데 회식 날 술에 절은 채로 남의 집에 들어가면 민폐가 따로 없지.
그래서 황민우와 나는 근처 가까운 호텔에 묵기로 한 것이다.
대충 민박이나 모텔로 가려고 했더니 극구 청장이 끌어다 체크인해 준 것도 기억났다.
-뚜르르르!
그사이 호텔 벨은 3번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호텔 프론트입니다. 503호에 오전 10시 모닝콜 전화드렸습니다.
“모닝콜이요?”
어제저녁 반쯤 정신 나간 상태로 침대에 누운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때 내가 모닝콜 해 달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옆방인 504호 손님께서 서비스 요청하셨습니다. 오늘도 기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아…… 감사합니다.”
옆방이라면 아마 황민우 얘기일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도로 내려놓고는 머쓱하게 머리카락을 쓸었다.
호텔에는 이런 기능도 있구나.
나도 하나 배웠다.
나중에 누군가 모셔야 할 일이 생기면 나도 써먹어야지.
누군가가 날 챙겨주는 일보다는 아직 내가 누군가를 모시는 일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식으로 황민우에게 배우는 것이 많았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물을 들이켰다.
500ml짜리 생수병 하나를 다 먹은 후에야 갈증이 가셨다.
그 후에 핸드폰을 찾아보니 충전기에 꽂혀 있었다.
나야 들어오자마자 와이셔츠 차림으로 그대로 드러누워 방금 일어났으니 간밤에 있었던 일을 모른다.
충전기에 꽂혀 있으니 황민우가 내 주머니에서 꺼내 놓은 거겠지.
그리고 핸드폰을 열어보자마자 기겁했다.
특수조사 팀 단체 채팅방에 수백 개의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매일 자기 전에 한 번은 훑어보려고 노력하는데 요즘엔 바빠서 신경을 못 썼다.
며칠 치가 쌓여 있었다.
-강혜원 : 우리 곧 가요~
-황민우 : ??? 어딜요?
-강혜원 : 제주도~
-황민우 : ??? 네????? ㅖ?????
-장세훈 : 저번에 연차 내러 간다고 했잖아.
-황민우 : ??? 그거 장난 아니었어요?
제주세무서에서 조사 중일 때, 우리가 음식 사진으로 약 올리자 장세훈이 못 참겠다며 잠시 채팅방에서 사라진 적이 있다.
장난이겠거니 하고 곧 채팅방에 모습을 드러내겠지 했는데 그게 진짜였다고?
나는 빠르게 대화를 훑었다.
수백 건이나 됐지만 5분 정도면 충분했다.
-강혜원 : 장세훈 주사보님 혼자 어떻게 보내요. 우리도 같이 가야지!
-안길진 : 어차피 올해 가기 전에 연차 다 써야 하잖아요.
-황민우 : 어, 맞다. 연차 써야 되는데.
-강혜원 : 그럼 이번 기회에 써요.
-장세훈 : 신재현은 연차 며칠 남았대? 우리 다 노는데 혼자 일할 거 아니지?
-황민우 : 저는 10일, 팀장님은 6일 남으셨습니다.
-장세훈 : 왜 이렇게 조금 남았어? 일을 제일 많이 하는 놈이 놀기도 제일 많이 놀았네?
-강혜원 : 아! 저번에 단합대회 하고 일주일 썼잖아요.
-안길진 : 청장님이 강제로 쉬라고 했다고 하루 쉬신 적도 있어요.
-강혜원 : 팀장님은 쉬는 것도 강제로 쉬네.
-장세훈 : 알아서 좀 쉬어라!!!
-장세훈 : 야! 안 읽냐!!!
-황민우 : 요즘 바빠서 못 보시나 봐요. 제가 전해 드릴게요.
-강혜원 : ㄴㄴㄴㄴㄴ 얘기하지 마세요.
-장세훈 : 뭐야 얘기 안 하면 연차 안 쓰잖아. 그럼 우리끼리 뭐 하고 놀아. 아, 저번에 쟤네가 했던 것처럼 약 올리자고? 그건 좀 솔깃한데.
-강혜원 : ??? 장세훈 주사보님 인성 좀…….
-장세훈 : ㅡㅡ
-안길진 : 그냥 좀 놀래켜 주자는 것 같은데요.
-강혜원 :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이거 캡쳐해서 저장해놨어요. 삭제해도 소용없어요.
-강혜원 : [사진]
강혜원이 보낸 사진을 눌러 보니 그간 장세훈의 자질구레한 말실수를 캡처한 것이 몇 개 들어있었다.
그중 하나는 나도 아는 것이었다.
-장세훈 : 그래 나 없으면 국세청 안 돌아간다!
앞뒤 문맥을 자르고 보니 장세훈이 거만한 것처럼 되어 있었다.
물론 이것은 강혜원이 교묘하게 말을 유도한 것이다.
-장세훈 : ㅡㅡ 아 진짜 미치겠네. 그거 안 지워?
-강혜원 : ㅋㅋㅋㅋㅋ자꾸 그러시면 사내 망에 올려 버릴 거예요ㅋㅋㅋㅋㅋ
-장세훈 : 너 만나면 죽었어
-강혜원 : 이것도 캡처해야지~ㅋㅋㅋㅋㅋ
나는 쌓인 대화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한참을 내려간 후에야 목표하던 것을 발견했다.
편하게 말하는 방이 되어 있다 보니 대화는 거의 의식의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강혜원 : 깜짝 놀래켜 드릴 거니까. 그날 어차피 제주세무서에 계실 거 아니에요?
-안길진 : 조사 끝나면 교육원으로 돌아가시겠죠.
-강혜원 : ㅠㅠ 세무서에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렇게 몇 가지 계획이 올라왔고 나는 며칠 간의 대화를 거의 따라잡았다.
지금 보이는 것은 바로 어제저녁의 메시지였다.
-황민우 : 회식 왔어요. 오늘 교육원 못 갈 듯.
-강혜원 : 와;;; 타이밍;;;
-강혜원 : 오늘까지 제주서에 있다고 해서 혹시 조사 늦어져서 연차고 뭐고 없나 했더니;;;
-장세훈 : 난 제주도까지 가서 일해야 되는 줄 알고 긴장했다.
-안길진 : 연차는 냈어요? 어케 됨?
-황민우 : 팀장님이랑 저랑 모두 내일부터 3일짜리 냈습니다.
-황민우 : [만세 하는 이모티콘]
황민우는 대화방에서도 깍듯해서 이모티콘이나 초성을 잘 쓰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간만에 쓰는 이모티콘이었다.
얼마나 신났는지 알만했다.
-강혜원 : 들어갔어요?
-황민우 : 아직 달리는 중입니다.
-강혜원 : 미친; 얼마나 달리는 거야. 내일 일어날 수는 있대요?
-황민우 : 아까부터 세고 있어요. 아직 1병 반!
-장세훈 : 오 그럼 희망이 있다! 우리는 짐 다 싸 놨어. 내일 아침 비행기로 출발한다!
-안길진 : 만나서 점심 먹으면 돼요.
그리고 내가 호텔 방에 드러누웠을 시간에는 대화가 매우 활발해졌다.
-강혜원 : ㅋㅋㅋㅋㅋ결국 뻗음?
-장세훈 : 야 같은 방이면 낙서 좀 해봐라. 아 내가 거기 있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읽은 후,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침대 옆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술 먹은 다음날이라 얼굴이 좀 초췌한 것만 빼면 깨끗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다시 대화창으로 시선을 내렸다.
-황민우 : (엄격근엄진지) 절대 안 됩니다.
-장세훈 : 아 재미없네.
-황민우 : 대신 사진을 드리겠습니다.
-황민우 : [사진]
-강혜원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장세훈 : 야ㅋㅋㅋㅋㅋㅋㅋ쟤 왜 저러고 자냨ㅋㅋㅋㅋㅋㅋ
-안길진 :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나중에 혼나겠는데요
-강혜원 : ㅋㅋㅋㅋㅋㅋㅋ갖다 던져놨네ㅋㅋㅋㅋㅋ
나는 거울을 봤던 것과 비슷한 속도로 사진을 열었다.
거기에는 무릎을 꿇고 얼굴을 침대에 파묻은 채 엉덩이를 하늘로 향하고 있는 내 모습이 있었다.
“미친. 이런 걸 언제 찍었어.”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황민우 : 제대로 눕혀드렸습니다.
-강혜원 : 사진까지 다 찍어 놓고 정색하는 거 봐ㅋㅋㅋㅋㅋㅋ
-장세훈 : 사진 저장해놨다. 쟤 일어나서 보기 전에 얼른 지워라.
-황민우 : 어?
-안길진 : 왜요?
-황민우 : 5분 지나서 안 지워지는데요?????
-장세훈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강혜원 : 아ㅋㅋㅋㅋ저 지금 너무 웃겨서 침대에서 구르는 중ㅋㅋㅋㅋㅋ
-황민우 : 아…….
황민우의 짧은 탄식에서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대화를 쭉 내렸다.
지금 김포공항이다, 장세훈이 빵집에서 빵 먹는다, 안길진이 멀미약 먹는다 등등
읽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새어 나오는 사람다운 대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대화가 뚝 끊겼다.
비행기를 탄 것이다.
어느덧 그 많던 수백 개의 대화를 전부 따라잡았다.
사람이 바쁘게 살다 보면 날짜 감각조차 잊어버릴 때가 있다.
내 경우엔 조사에 한 번 들어갈 때 그렇다.
잠시 엑셀 좀 보다 고개를 들면 밥 먹을 시간이고 계산기 좀 두드리다 보면 해가 져 있다.
그런 내가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오는 때가 바로 이런 순간이다.
-황민우 : 일어나셨어요?
-황민우 : 1 사라졌네요. 읽으신 거 다 알아요.
그들과 같은 시간에서 대화하는 것.
나는 그때 비로소 날 선 긴장감을 떨쳐내고 평소처럼 돌아올 수 있었다.
-신재현 : 예.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황민우 : 11시에 체크아웃 해야 합니다. 일단 제가 그쪽으로 건너가겠습니다.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열어주니 황민우였다.
그는 어제 퇴근했을 때의 차림새 그대로였다.
며칠 야근하면서 셔츠 소매를 접어 입느라 끝부분이 조금 구겨진 걸 빼면 말끔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덕분에 잘 잤습니다. 사진도 잘 봤구요.”
“헙, 흐업!”
평정을 유지하던 황민우가 현관에서 굳은 채 눈알을 데록 굴렸다.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핫, 들어오세요. 어제 정신 차린다고 차렸는데 필름이 끊겼나 봅니다.”
“어, 아뇨. 방에 들어오실 때까진 멀쩡하셨습니다. 침대에 걸쳐서 엎드리셨는데 그대로 곯아떨어지셨죠.”
“그건 좀 다행이네요.”
집에 들어와서 뻗었으면 그건 봐줘야 하지 않을까.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내가 찌릿 시선을 보내자 황민우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뭡니까?”
“다림질도 서비스가 있어서요. 코트하고 정장 재킷 다림질해왔습니다. 셔츠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코트까지 구겨서 입으시면 어떡합니까.”
와, 이건 좀 감탄했다.
옷도 챙기는구나.
“오늘도 큰 걸 배워갑니다. 이렇게 챙겨야 하는 거였군요. 부끄럽네요.”
“워크샵 몇 번 다녀보면 다 배우는 건데요.”
“……그래요?”
그 워크샵을 안 다녀봐서 모르겠다.
황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틈나는 대로 제가 알려드릴게요. 나중에 혹시라도 윗분들하고 다니게 되면 한번 해보세요. 엄청 좋아하실 겁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실까요, 팀장님. 비행기 오기 전에 가 있어야죠.”
***
제주공항에 두 번째 들르는 날은 서울로 돌아가는 날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남을 마중하러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서울에 돌아가는 것만큼이나 두근거렸다.
저 멀리 게이트에서 캐리어를 잔뜩 들고 빠져나오는 팀원들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겨우 1달 반 만에 보는 건데도 한참 동안 떨어져 있던 기분이 들었다.
“오! 팀장니임!”
멀리서부터 나를 발견한 강혜원이 두두두 달려왔다.
그 뒤에 장세훈과 안길진이 걸음을 빨리했다.
셋 다 사복 차림이었다.
“여기서도 정장이네! 두 분 사복 보고 싶었는데!”
강혜원 나름의 안부 인사를 가볍게 받아 넘겼다.
“어서 오세요.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현지인 같다. 아예 제주도에 눌러 살기로 한 거야?”
“얼른 돌아가야 팀도 재결성하죠. 장세훈 주사보님은 지금 세무서가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장세훈은 한 방 먹은 듯 입을 떡 벌렸다.
“아하핫! 졌네, 졌어!”
“그래도 아직 기회는 있지.”
장세훈이 금세 회복하고는 기세등등하게 팔짱을 꼈다.
“이건 아직 눈치 못 챘지?”
“예? 뭘요?”
제주도에 오는 것 자체가 이미 깜짝 선물 아니었나?
여기서 더 뭐가 더 있지?
“표정 보니까 모르는 거 맞네!”
“어, 저기 오신다! 저쪽 한번 보세요, 팀장님.”
나는 공항 출구 쪽을 보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지현석이 편한 차림새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검사님. 서울 올라가시는 거예요?”
“아니요.”
“……예? 그럼 왜 공항에…….”
그때 강혜원이 히히 웃으며 지현석 쪽으로 양 손바닥을 뻗었다.
손끝으로 그를 가리키는 모양새였다.
“오늘 함께 제주도 관광하실 멤버이십니다!”
지현석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미 얘기가 다 되신 줄 알았는데 모르고 계셨나 봅니다. 혹시 불편하시면…….”
“아니요, 아닙니다!”
지현석이 말끝을 흐리자마자 나는 얼른 끼어들어 손을 내저었다.
“언제 같이 밥 먹나 했더니 오늘 이렇게 기회가 되네요. 괜찮으시면 같이 관광하시죠.”
“어후, 다행입니다. 그럼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총 6명이 된 우리 일행은 황민우가 차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