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반가운 손님 (1)
-쪼르륵!
빈 잔에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찼다.
나는 망설임 없이 잔을 들어 한입에 삼켰다.
목구멍에 알싸한 액체가 넘어가는 느낌이 났다.
동시에 콧구멍으로 주향이 훅 뿜어져 나왔다.
비싼 술이었다면 잘 익은 곡식이나 과일향이 났겠지만 식당에서 파는 4천 원짜리 빨간 뚜껑의 희석식 소주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독한 알코올의 냄새가 났다.
“크으!”
편히 먹는 자리라면 바로 잘 구워진 돼지고기를 집어먹어 입안을 기름기로 가득 채웠겠지만, 지금은 바로 앞에 윗사람을 모신 자리였다.
나는 얼른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부산청장이 술병을 든 채로 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먹네.”
한입에 털어 넣은 것이 정답이었다.
술을 좋아한다는 소문답게 그는 내가 시원하게 잔을 비우는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그는 병을 들고 있는가.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아니, 신 팀장이 한잔 더 받아 봐요.”
공무원 회식은 그야말로 술잔치다.
거기에 술 좋아하는 상사까지 끼면 술로 배를 채우게 된다.
자신의 호감을 술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부산청장은 바로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회식도 업무의 연장선이라는 말이 있다.
오늘은 왠지 평소보다 달리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바짝 긴장했다.
연달아 두 잔을 빈속에 삼키고 나니 배 속이 뜨거워졌다.
이런 속도라면 오늘은 더 힘겨울 것 같았다.
그런데 연거푸 잔을 권할 것 같았던 청장은 거기서 병을 내려놓았다.
이제 내 차례인가 싶어 술병을 집어 들었다.
오른손으로 넓게 병을 쥐어서 상표를 가렸다.
왼손은 오른쪽 가슴 약간 아래에 갖다 댔다.
누가 봐도 내가 한잔 올리겠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청장은 고개를 저었다.
“야근 많이 해서 피곤한 상태에서 달리면 훅 갈 겁니다. 타지에서 인사불성 되게 만들 순 없지요. 제가 서울청장님에게 혼납니다.”
굉장히 의외였다.
오늘 적어도 2병은 마셔야겠구나, 하고 각오했는데.
“이제부터는 편히 먹는 겁니다. 각자 알아서 먹고 싶은 만큼만. 술은 억지로 먹이면 맛이 없어요. 먹고 싶을 때 먹어야 맛있는 거지.”
술을 좋아한다 싶었더니 나름의 주도는 있는 모양이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서장과 조사과장도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도 적지 않은데 말년에 대작을 해야 하나 걱정이 있었을 것이다.
청장이 잔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들자 식당에 가득 들어찬 제주세무서의 직원들도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둘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사는 사람 입장에서 맛있게 먹어 주는 것만큼 보기 좋은 게 없지.”
“배터지게 먹겠습니다.”
나는 헤벌쭉 웃으며 고기를 열심히 구웠다.
우리는 한동안 시답잖은 잡담과 함께 고기가 익는 족족 입으로 가져갔다.
아까 청장이 단언했듯이, 첫 잔 이후로는 강제로 술을 권하지 않았다.
다만 잔이 비면 내가 눈치껏 채웠다.
그러다 불판을 한차례 갈았을 때, 청장이 지나가는 말투로 툭 던졌다.
“국세청장님이 화가 많이 났나 봅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나뿐만 아니라 서장과 과장도 굳었다.
특히 서장은 술잔을 들던 자세 그대로 굳고 말았다.
이게 웬 폭탄 발언인가 싶어서 청장의 얼굴을 살폈더니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번에 언론사 세무조사하는 것 말입니다.”
“아!”
서장은 탄식하며 맥주로 목을 축였다.
카지노와 부지사, 그리고 브로커에 대해 조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국세청에서는 기자회견이 있었다.
카지노 조사에 대한 발표는 아니었다.
그건 제주세무서와 부산청의 공이었으니까.
국세청장 오낙현이 홍보실을 통해 직접 발표한 내용은 나의 오명을 벗겨 주는 것이었다.
내가 사석에서 도민을 비하했다는 논란 말이다.
국세청장의 이름으로 발표된 기자회견문은 이례적으로 자극적인 단어까지 써 가며 언론을 비판했다.
근신에 가깝게 교육원에서만 지내는 내가 외부에서 술을 마신 적도 없으며, 모든 것은 한 언론사의 가짜뉴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세청의 분노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주부터 바로 착수할 겁니다.”
국세청장 오낙현은 내부 공문을 통해 의문을 제기했다.
-언론사가 시기적절하게 가짜뉴스를 퍼뜨린 것에는 배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뒷돈이나 비자금이 오간 정황이 있을 수 있으니 세무조사에 착수하라.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국세청장님이 직접 오더 때릴 정도면 엄청나게 진노하신 겁니다. 신경 쓰셔야 할 거예요.”
부산청장이 언질을 주자 과장이 말을 받았다.
“문제없게 하겠습니다.”
여기서 문제란 자칫 표적 조사 논란에 휩싸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국세청에서 대놓고 한 언론사를 비판해 놓고 당장 거기에 세무조사가 들어가면 의심을 사기 딱 좋다.
“거기는 말이 좋아 언론사지, 평소에도 별 이상한 잡소리를 늘어놓던 곳입니다. 배하심 부지사도 종종 이용해먹던 것 같더군요. 괜히 이번에 취재도 없이 가짜로 기사를 쓴 게 아니에요.”
“청장님께서 비자금 언급하셨으니 아마 검은돈에 대한 정황도 있을 겁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될 거예요.”
“아주 탈탈 털겠습니다.”
과장이 자신만 믿으라는 듯 큰소리를 쳤다.
청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시선을 돌렸다.
“아주 국세청장님께 예쁨받으니 좋겠습니다.”
“좋게 봐주신 거죠.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실 국세청장이 기자회견까지 열어가며 기사를 정정해 주고 세무조사 지시까지 할 줄은 몰랐다.
기사야 시간이 지나면 묻힐 거라 생각했고.
그런데 청장이 이렇게 나선 걸 보면 본보기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정당한 비판이 아닌 것은 철저히 응징하겠다는 뜻을 보여 주기 위해서 말이다.
부산청장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난데없이 말을 꺼냈다.
“빨리 승진하세요.”
앞뒤 문맥과 맞지 않는 말이라 잠시 갸웃했다.
저번에도 그런 말을 하더니.
물론 무슨 생각이 있어서 말하는 거겠지.
나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청장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혹시 위쪽 동네 사정 이미 전해 들은 겁니까?”
이건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내 반응에 따라 민치호의 행적이 읽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걸 아는 것처럼 청장은 자신이 아는 것을 말했다.
“신 팀장 곧 올라간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거기에 대답한 것은 서장이었다.
“벌써 그렇게 소문이 났습니까?”
“팀 해체되고 나서 다들 팀원들 행방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팀장은 일선에서 손을 떼고 교육원 강사행, 팀원들은 세무서행. 지방청에서 일하던 사람이 서울도 아니고 경기권 세무서로 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내 옆에서 과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맹물을 마셨다.
언뜻 보니 좌불안석이었다.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라 그런가.
하지만 정말 들어서 안 될 얘기라면 아무리 술자리라 해도 청장이 말을 꺼낼 리가 없다.
청장도 나도 알아서 말조심 할 거라는 뜻이다.
“거기서 본청의 공문이 내려온 겁니다. 본래라면 부산청의 조사국에 움직여야 할 일에 말이죠. 이건 모두에게 공지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본청은 신 팀장을 버린 적이 없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올리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소문이 그렇게 도나 보군요.”
“그리고 그 소문은 잠잠해질 기미가 안 보여요. 누가 일부러 퍼뜨리는 것처럼.”
청장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나를 살폈다.
민치호가 나를 불러올리기 위해 시동에 들어갔구나.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카지노라는 게 그래요. 외화도 걸려 있고 국제적 문제가 될 수도 있어요. 브로커가 한국인이 아니거든. 보통은 검찰이 조타를 잡는단 말이야. 아니면 본청이나 우리가 끼어들어야 맞는 거고. 그런데 본청의 선택은 하나였어요. 마침 제주도에 가 있는 실무자가 있으니 데려다 쓰라고요.”
이러고도 시치미를 뗄 거냐는 듯 청장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못 이긴 척 입을 열었다.
“제가 해결하길 원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결코 가볍게 여긴 건 아니에요. 그 증거로 서울중앙지검의 검사가 왔잖습니까.”
“음? 뭔가 있나 보군요.”
서장이 끼어들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잠시 맥주로 목을 축이고 있자니 청장이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어먹으며 말했다.
“국세청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전면에 내세우는 게 신 팀장이잖아요. 검찰청에도 비슷한 위치의 검사가 하나 있어요. 우리처럼 청장급이 밀어 주는 건 아닌데 지검장의 눈에 든 검사요.”
부장검사도 아닌 지검장이 지켜본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러나 같은 배를 탄 내가 모르는 건 모양새가 이상해서 조용히 고기를 뒤집었다.
“한마디로 국세청과 검찰청 모두 회심의 수를 두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해결했고.”
버섯을 집어먹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서장이 문득 젓가락질을 멈췄다.
“어? 그러면 이미 혼자서 하나의 팀 취급을 받고 있다는 뜻 아닙니까?”
“해결사란 의미에 가깝죠. 팀 규모도 크지 않으니 쉽게 보낼 수도 있고 한번 보내놓으면 알아서 해결도 잘 하고.”
청장은 히죽 웃었다.
서장과 과장의 시선이 절로 내게 모였다.
“과찬이십니다.”
“나중에는 어느 청에 국한되지 않고 활동할 수도 있겠는데.”
“이번 카지노 건처럼 큰 건 터지면 지원 나가는 겁니까? 하긴 조사국이 움직이기 부담스러운 건은 소규모이면서도 실력이 확실한 팀이 움직이는 것이 낫지요.”
청장과 서장의 대화에 이번에는 조사과장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럼 곧 국세청으로 가겠군요. 그래도 아직은 제주도에 더 머물겠죠?”
청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까 소문이 퍼지고 있다고 했잖아요. 기사도 그렇고 국세청에서 서둘러 움직이는 모양도 그렇고, 생각보다 일이 빠르게 진행될 것 같습니다.”
부산청장도 나름 정황을 보는 눈과 귀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향해 조언했다.
“그러니까 내일 당장 갑작스럽게 승진 시험을 볼 수도 있다는 각오로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 양반 성격상 아무리 필요해도 대충 승진시켜 주진 않을 테니까.”
그가 말하는 ‘그 양반’이라면 아마 민치호 얘기일 것이다.
낙하산처럼 올라가는 건 나도 사양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6급이 되면 하는 일이 확 달라질 거예요. 7급은 행동대장, 8급은 실행자, 9급은 뒤에서 따라다니는 손발. 대충 알죠?”
“네. 실무에서 활동하는 건 7급까지고 6급부터는 관리직이죠.”
“어린 나이와 그 급수에 이례적으로 팀장 직무를 겪어 본 건 그나마 다행입니다. 윗선의 깊은 뜻이 있었겠죠.”
민치호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올라가면 일이 산더미처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것도.
아마 지금 쉬는 것을 끝으로 당분간 휴가조차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중간관리직이 될 겁니다. 아래에서 치이고 위에서 치이는 바로 그거요. 아마 상황이 꽤 달라질 겁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런 직책을 다 거쳐서 이 자리까지 왔지요.”
“……예?”
“언제든 난감한 일이나 궁금한 것이 생기면 연락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서울청에도 신 팀장을 끼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겠지만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요.”
그의 말대로 내가 복귀하면 아마 근처에는 수많은 상급자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청장이 연락하라는 것은 단순히 질문이나 하라는 것이 아니다.
내 편에서 도와주겠다는 공수표를 발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장님…….”
“타지에 와서 고생해 줘서 고맙습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어서요.”
“아닙니다. 이미 과분한 호의를 받았습니다.”
“과분하기는. 아직 하나 더 남았어요.”
“하나 더요?”
여기서 뭐가 더 있다고?
내가 의아해하자 청장은 품속에서 자그마한 병을 꺼냈다.
저번에 부산청을 떠날 때 사람을 시켜 전달하게 했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술병이었다.
유리잔에 따르면 딱 한 잔이 나올 분량.
저런 종류의 술은 한 병을 제대로 사려면 꽤 비싸다.
공무원이 선물로 주고받기에는 고가고.
그러니 작은 병으로 주는 것이다.
여전히 그의 호의와 배려가 느껴지는 선물이었다.
“내가 술을 좀 좋아해요. 그래서 빈손으로 보낼 수가 없지요. 이건 저번에 준 것보다 좀 더 깊은 맛이 날 겁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자그마한 술병을 받아 들었다.
부산청장의 정장 안에 들어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의 호의 때문인지 온기가 느껴졌다.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다음에는 본청에서 봅시다.”
내가 복귀한 후에 청장급, 또는 국장급 회의에서 보자는 말일 것이다.
그는 그만의 덕담을 건네며 잔을 꺾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