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열심히 할 이유 (2)
시작은 SNS였다.
[제주도청에서 신재현 봄]
-도청에 일 있어서 갔는데 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거임. 봤더니 거기 신재현 있더라. 그 순간 감이 딱 왔음. 와ㅅㅂ 도청에 뭐 있어서 조사하러 왓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아직 세무서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눈에 띄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도청에서는 신재현을 알아본 사람들이 하나둘 사진을 올렸다.
카지노로 간 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정장을 입은 남녀들이 차에서 우르르 내려 카지노 회사로 들어가면 이목을 끌게 마련이다.
요즘 세상에 패싸움인가 싶어 관심 있게 지켜봤더니 목에 공무원증을 건 사람들이 상자에 무언가를 한 아름 갖고 차에 실었다.
이 정도면 소문이 나는 것은 금방이다.
그리고 기자들은 즉시 소문을 물었다.
[속보] 제주세무서, 카지노 탈세에 철퇴
[1보] 제주 카지노 탈세에 칼 빼든 국세청
[속보] 제주세무서에서 제주도청 급습
[1보] 조사팀에 신재현 합류, 조사대상은 배하심 정무부지사
슬금슬금 시동이 걸리고 있었다.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제주세무서로 몰려갈 시점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은 제주지검은 관세청과 브로커를 털었다.
신재현에게서 카지노 비밀금고 얘기와 함께 비밀 장부를 전해 받은 제주지검은 의욕이 넘쳤다.
나름 조사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심이 넘치는 것이 검찰이다.
거기에 나름 검사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린 지현석이 세무서와의 연계를 맡으며 정보를 가져오자 ‘세무서에 질 수 없다’라는 경쟁의식이 넘쳤다.
그 결과로 제주지검은 전세기의 비밀공간을 찾아냈다.
항공 정비 전문가와 탐색 장비를 총동원해서 찾아낸 것이다.
그 안에서 나온 외화는 브로커와 카지노 회사의 관계를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제주세무서와 제주지검, 양쪽의 조사가 일단락 된 후에 드디어 공식 발표가 나왔다.
[종합] 국세청과 검찰청의 연합 조사, 카지노에 얽힌 탈세를 밝혀내다.
-최근 수사기관에 한 카지노가 덜미를 붙잡혔다. 국세청의 발표에 따르면 현재까지 밝혀진 탈세 규모만 해도 수백억이다. 이들은 외국에서 고객을 모집하는 현지인을 브로커로 이용하여 매출을 고의 누락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제주세무서와 합동으로 조사에 착수한 제주지검은 J카지노의 대표를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입건하고, 무등록 여행업자와 전문모집인 등 8명을 관광진흥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재료도 다 갖춰져 있다.
지현석과 신재현의 행동은 빨랐다.
양쪽에서 몰아치니 어어, 하는 사이에 이미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전문 브로커 중에서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작자도 있었는데 그쪽은 아예 지현석이 서울청에 연락해 잡아 들였다.
도지사의 행동도 빨랐다.
먼저 카지노에 대한 기사가 1차로 뜨고, 뒤이어 도청에 왜 신재현이 갔는가 의혹이 나오기 시작하자 바로 배하심에 대한 발표가 떴다.
미리 기다렸던 것처럼 사죄의 기자회견까지 곁들였다.
-제주도민 여러분께 큰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비록 배하심 부지사의 일탈이라고 하나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치채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정무부지사 배하심은 즉시 파면하였으며 앞으로는 더 철저한 검증을 통해 인사에 신경 쓸 것을 약속드립니다.
별정직이었던 배하심은 도지사의 말 한마디에 잘릴 수 있는 위치였다.
그는 파면 통지서에 이어 수억이 적힌 세금 납부 고지서와 함께 검찰청 출두 명령서도 받았다.
거기에 기자들의 관심과 도민들의 욕까지 아주 종합선물세트였다.
그렇게 처벌받아야 할 놈들에 대한 소식이 한바탕 휩쓸고 간 후에는 자연스럽게 제주세무서와 제주지검에 눈이 쏠렸다.
정확히는 신재현에 대해서였다.
원래부터 뭐만 했다 하면 관심을 받던 사람이다.
좌천된 줄로만 알았던 제주도에서 갑자기 수백억 규모의 탈세를 적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인터넷에서는 한동안 소문이 들끓었다.
-도청에 왜 갔나 했더니 부지사 때문이었구나!
-신재현 제주도 교육원으로 간 거 아니었음? 왜 제주세무소에서 등장함?
-세무소 아니고 세무서
-그래서 왜 세무서 가 있냐고. 자기 근무지 이탈한 거 아님?
-윗댓 이상한 걸로 시비 걸지 마세요. 국세청에서 어련히 알아서 했겠어요?
-제주도 내려갔을 때는 인생 끝났구나 했더니 국세청은 지방 가도 상관없나 봐?
-??? 너 사회생활 안 해 봤지? 어느 직렬이든 서울이 몰리거든?
-국세청에서 아예 처음부터 카지노 탈세 포착하고 제주도로 내려보낸 건가?
-수백억이래 수백억! 나라에 도둑놈이 너무 많아요!
아무리 신재현이어도 마음대로 남의 조사팀에 끼어도 되냐, 거기는 위아래도 없냐 등 신재현을 깎아내리는 말도 심심찮게 보일 즈음.
나학진의 심층 기사가 떴다.
적어도 국세청 관련 소식통 중에서는 나학진이 가장 정확하다는 것은 기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진 이야기였다.
금세 다른 기자들이 나학진의 기사를 받아 썼다.
국세청의 발표에 무명의 내부 정보원의 이야기도 더해지자 꽤 상세한 기사가 되었다.
-왜 신재현 얘기만 함? 걔 혼자 일한 것도 아닌데
-이름 아는 공무원이 신재현밖에 없어서 그렇지
-제주세무서 여러분들도 저희가 기억합니다.
-공무원님들 불철주야 나랏일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신재현 팀’이 해결한 것이 아니라 ‘제주세무서’에서 신재현이 들어간 형태이기 때문일까.
다른 공무원들도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신재현을 빼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현석이었다.
-야! 검찰청에도 신재현 비슷한 루트 걸어온 사람 있음! 검사니까 이쪽이 더 빡세지 않을까!
-지현석 검사라고 서부지검 있을 때 신재현이랑 손잡고 종종 거물 치던 사람임. 기사 뒤져보면 신재현이 탈세 조사하다 뭐 나오면 지현석한테 넘기고 그랬음.
-지금은 서울중앙지검에 있다는데?
-머야; 능력자네.
지현석과 신재현.
양 기관에서 두각을 드러낸 공무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날 무렵, 하나의 글이 올라왔다.
[어째서 인재가 하릴없이 놀아야 하는가]
-적재적소라는 말이 있다. 적당한 재능을 가진 자에게 적합한 일을 맡겨야 한다는 뜻이다. 사장들은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직원을 뽑기 위해 고심하고, 정치인도 어떻게든 유능한 사람을 곁에 두기 위해 노력한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이상 인재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나는 요즘 화제가 된 기사를 읽자마자 깜짝 놀랐다. 그가 또 해냈기 때문이 아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후학 양성은 당연히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는 더 오랜 기간 교단에 서 온 훌륭한 학자들이 있다. 교육원을 결코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각자 맞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느 공무원이 교육원에 가 있다는 것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은 사람을 놀리는 것이며 낭비이다. 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일선으로 돌아와 바쁘게 뛰어 주었으면 한다.
└이거 맞말. 애초에 왜 내려간 거임?
└희생된 거다…… 이런저런 정치싸움에, 희생된 그 희생…….
└아조씨 요즘 그 드립 알아먹는 사람 없어요.
└후딱 올라와서 탈세범이나 잡아라! 거기서 뭐 하냐!
└제주도 좋지. 나도 가고 싶다.
└어! 이 글 쓰신 분 우리 교수님인데! 교수님 여기서 뭐 하세요?
└무슨 전공임? 정치학?
└회계전공이심.
└아. 회계.
안 그래도 민치호는 슬슬 신재현을 불러올리기 위한 밑밥을 깔려고 하는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현석더러 도우라고 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민치호가 무언가를 더 하기도 전에 여론은 이미 신재현을 불러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팽배했다.
“일이 쉬워졌는데. 예정보다 빨리 불러도 되겠어.”
민치호는 기사와 댓글을 훑어보며 각진 턱을 쓸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들었다.
-잘했다.
가장 먼저 공치사로 운을 떼었다.
-적당히 놀고 준비해. 슬슬 승진도 해야지.
곧 신재현이 공무원으로 일한 지 만 3년이 된다.
특별승진임용의 자격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그동안은 7급이어도 크게 문제는 없었다.
팀장을 달아준 것이 약간의 억지가 필요하긴 했지만 TF팀이라는 조건 하에 다들 납득했고.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르다.
실무직인 7급으로는 부족한 시점이 온 것이다.
6급으로 올라서야 비로소 놀 수 있는 물도 있다.
“드디어 날개를 달아주시는군요.”
청장실에 앉아 있던 이선균이 감회가 새롭다는 듯 웃었다.
“때가 됐으니까. 그나저나 얕보다가 떨어지면 곤란한데.”
신재현이 6급으로 올라가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국세청장 오낙현도 이미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내정되었다는 뜻은 실력이 안 되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올린다는 뜻이 아니다.
승진 시험을 쉽게 내지는 않을 것이며 필기에 이어 면접까지 통과해야 한다.
보통승진이 아닌 특별승진이다.
특별이라는 말이 붙은 만큼 ‘민치호가 권력으로 승진시켜 줬다’라는 오명을 쓰지 않으려면 신재현이 자기 실력으로 시험에 통과해야 했다.
그래야 신재현 역시 제대로 날개를 달 수 있었다.
“얕보다가 떨어질 사람은 아니지요. 평범한 승진 시험이라 해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예상보다 신재현을 불러올리기 위해 밟을 단계가 줄어들면서 이제 이들도 바빠질 예정이다.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자 괜스레 신재현이 부러워졌다.
“얼른 불러야겠네. 일 시키고 싶어졌어.”
***
“고생 많았습니다.”
조사과장과 함께 서장실로 가자마자 들은 말이었다.
내부 결재 끝났고 결정문도 썼고 고지서도 보냈고.
이제 징세만 남은 시점에서 내부 보고를 하러 온 참이다.
보고는 전적으로 이번 건의 총책임자인 과장의 권한인데 왜 나를 데리고 오나 했더니 대뜸 공치사가 날아 왔다.
서울청에서 우리 팀의 이름으로 한 거라면 공치사를 들을 만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말 그대로 도우미고 여기는 남의 팀이니까.
“어디 저 혼자만의 공이겠습니까. 저는 손 하나 보탠 것밖에 없는데요.”
“정무부지사와 말싸움이 벌어졌을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우리 직원들끼리 갔으면 쉽게 끝나진 않았을 겁니다. 그 귀찮은 일을 신 팀장 혼자 커버해 줬으니 우리가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한마디로 부지사를 내가 꺾어 줬으니 자기들이 편하게 조사했다는 뜻이다.
그래도 나는 한 번 더 겸양을 선택했다.
“옆에 계신 과장님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다 같이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먹어가면서 야근한 결과물이라는 걸요.”
과장이 눈동자만 데록 굴려서 나를 보더니 기겁하는 시늉을 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 제가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결국 부산청 조사국이 나올 줄 알았어요. 그걸 지금 세무서 조사과가 해낸 겁니다. 물론 우리 직원들도 고생했지만 사실 고생만 한다고 일이 해결되지는 않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과장은 약간 씁쓸한 표정이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해놓고 결과가 안 나오면 그거야말로 속 터지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감사드립니다.”
공을 세워서 좋다기보다는 고생한 것이 헛수고가 되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그 마음도 이해는 간다.
세상일이라는 게 노력과 결과가 비례하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조사 한 건을 끝낼 때마다 느끼는 게 있습니다. 서장님께서는 압박 쳐 내주시고 과장님은 저희가 편히 일할 수 있게 지휘 잡아주시고, 직원분들도 의욕을 갖고 일해 주셔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라는 걸요.”
“아이구, 이거 말을 할 때마다 금칠을 해 주시니 끝이 없겠습니다. 하지만 좋긴 하네요. 이 맛에 신 팀장님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걸까요?”
서장이 허허 웃자 소파에 앉아 있던 부산청장이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맨정신으로 금칠은 무슨. 공치사도 입으로만 하면 재미없는 법입니다. 갑시다!”
“예?”
서장이 되묻자 부산청장은 주섬주섬 코트를 입었다.
“아, 뭐 해요? 끝났으면 맛있는 거 먹여야지. 과장은 얼른 가서 팀원들 불러와요.”
“넵! 알겠습니다!”
과장이 얼른 서장실을 나갔다.
서장도 일어서서 나갈 채비를 했다.
부산청장과 저녁을 먹을 기회다.
그가 놓칠 리가 없었다.
부산청장은 내 어깨에 팔을 턱하니 올리고는 복도로 이끌었다.
“술 잘하나?”
“……조금 합니다.”
“그럼 됐어! 먹여 보면 알겠지! 크하하!”
그러고 보니 부산청장은 직원에게 술을 먹이는 습관이 있다고 들었는데.
회식이야 어차피 가야 할 일이었지만 괜스레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