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91화 (291/500)

291화. 열심히 할 이유 (1)

-황민우 : 이제 진짜로 들어갑니다. ㅂㅇ

-강혜원 : 와 저게 대체 언제적 인사야. 설마 나중에 ㅎㅇ 이러면서 나타나는 거 아니겠죠?

-안길진 : 한바탕 하고 드디어 조용해졌나 보네요. 어차피 협력해야 될 거 왜 뻐기나 모르겠네.

-강혜원 : 커리어 금가니까 그렇죠. 일단 발뺌하면 되는 줄 아는 사람이 많아요.

-강혜원 : 그렇게 뭉개기 성공한 사람이 있으니까 자꾸 그 방법 써먹으려는 사람이 나오는 거고요.

-안길진 : 진정하세요…….

-강혜원 : 영세업자가 그랬다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부동산 50억씩 가진 사람이 탈세하면 빡친다고!

-안길진 : 진정…… 근데 장세훈 주사보님은 어디 가셨어요? 좀 말려주지; 진짜 연차 내러 가셨나?

-강혜원 : 뭐라고요? 자기만? 혼자? 같이 내던가!

황민우는 강혜원의 분노에 찬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이제 막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참이었다.

도청 앞에서의 실랑이와는 다르게 배하심은 순순히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그래도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 마음은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다.

도청 현관문이 아니라 뒤쪽으로 돌아가자고 했다가 부산청장에게 한소리를 들어야 했다.

“우리가 못 올 곳에 온 것도 아니고 왜 뒤로 숨어 들어가야 됩니까?”

“크흠, 그러면 이쪽으로 가시죠.”

배하심은 얌전히 꼬리를 내렸다.

현관 앞에서 또다시 그 실랑이를 벌여서 이목을 끌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아마 이런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금요일 오후의 도청에는 사람이 많다.

주말이 되기 전에 업무를 보려는 민원인과 결재 마감을 앞두고 부서 간 이동하는 직원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마침 세무공무원들은 깔끔한 정장 차림이니 누군가가 이들 무리를 발견하더라도 부지사의 일행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배하심의 계획은 1층부터 어긋났다.

신재현을 알아보는 사람이 배하심의 예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배하심은 고개를 푹 숙였다.

도청 직원들이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떻게든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짓고 공무원들을 떠나보내려는 배하심의 노력 덕분에 이후 조사는 순조로웠다.

“비서분 컴퓨터 좀 보겠습니다. 기관 조사 아니니까 업무비 같은 건 안 볼게요. 스케줄이나 지시 메모한 것 있으면 보여주세요. 그리고 저희 쪽 직원이 필요한 자료 요청드리고 몇 가지 질문 할 건데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신재현은 직원 몇을 비서에게 붙였다.

비서가 눈만 데굴 굴려 배하심을 바라보았다.

배하심은 지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전에 충분히 입을 맞추지 못한 이상 이제 비서의 순간 판단만이 살길이었다.

비서는 자신의 입에 부지사의 세금이 걸렸음을 깨닫고 마른침을 삼켰다.

신재현은 직원들을 남겨두고 부지사실로 들어갔다.

직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집무실에 저희 일과 상관없는 자료나 기밀 사항도 많을 테니 비서님께서 꼭 협조해주셔야 합니다. 저희가 이거 싹 털어가면 피차 곤란하시잖아요.”

“네에…….”

그러고 보니 이들은 부지사의 직무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잘하면 이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희망을 품은 것도 잠시, 질문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부지사님의 차명 관리하고 계십니까?”

“3개월 전 비서님 명의로 제주도 땅 구입한 거 있던데 설명 부탁드립니다.”

“제주마이더스 카지노의 사업에 도움이 되는 조건으로 식사 자리 가신 적 있죠? 부지사님 모시고 몇 번 갔습니까?”

어어, 하고 비서는 어물거렸다.

이미 많은 걸 알고 나온 듯한 질문이었다.

거기에는 심지어 비서 자신에 대한 조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치겠네! 잘못하면 오늘 끝장나겠다!’

비서는 잔뜩 긴장한 채 신경을 곤두세웠다.

당장에라도 부지사가 나와 도와줬으면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지사는 더한 고충을 겪고 있었다.

“부지사님 친인척 중에 명확한 자금 출처 없이 부동산을 매입한 정황에 대한 목록입니다. 저희는 이것을 부지사님의 차명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순서대로 질문드리겠습니다. 먼저 반년 전 배우자 명의의 건물 하나가 처분되었는데…….”

소파에 마주 보고 앉은 신재현이 내민 목록을 대충 스윽 훑어보자마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집무실에 부산청장이 들어오지 않은 걸 보고 잠시 숨통이 트인다 싶었는데 소파에 앉자마자 이 꼴이다.

“……또한 올해 여름에 미성년자 조카분께서 제주도에 위치한 땅을 매입하셨더군요. 조카분께서는 현재 학생으로 별다른 수입원이 없는데요.”

이 자리에는 황민우까지 셋이 있었지만 말하는 것은 주로 신재현이었다.

어떤 질문에도 배하심은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생각이 잘 나지 않으신다구요? 그럼 이것도 체크해 두겠습니다.”

소명하지 못한 건에 체크만 늘어났다.

미리 알았더라면 뭐라 변명이라도 했을 텐데.

배하심은 식은땀만 흘렸다.

“……이때 1억의 돈이 통장에서 빠져나갔는데 이 금액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게 기억이 잘…….”

결국 배하심은 그 어떤 건도 제대로 소명하지 못한 채 제주세무서의 급습이 끝났다.

그리고 부지사 집무실에서 어느샌가 사라진 부산청장은 얼마 후 도지사와 함께 나타났다.

부들부들 떠는 배하심에게 부산청장이 약 올리듯 말했다.

“으하하! 인사차 찾아갔더니 도지사님께서 우리 직원들 좀 보겠다고 하지 뭡니까!”

부산청장은 한 발짝 물러서며 직원들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딱 봐도 인사를 핑계로 일부러 도지사를 찾아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도지사도 세무서 직원들을 만나러 왔다지만 실상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러 온 것이리라.

“세무서 조사관님들이 고생 많으십니다.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말고 철저하게 조사해주십시오. 우리 제주도청의 명예가 달린 일입니다.”

“그럼요. 저희 국세청에서도 최고의 조사관들이 나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청장님. 그리고 배하심 부지사님은 조사 끝나고 나 좀 봅시다.”

도지사의 냉랭한 태도에 배하심의 얼굴이 까맣게 죽었다.

***

우리가 제주세무서로 돌아왔을 때, 세무서는 휑했다.

카지노로 조사 나간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뒤져볼 곳이 많다는 뜻이니 이것은 희소식이었다.

브로커에게 수수료를 떼준 장부나 고객 장부를 압수해오면 최고인데.

카지노 쪽 팀이 돌아오기 전에 우리도 얼른 정리를 해야 했다.

게다가 내가 함께 나간 직원들은 법인세과 팀원들이다.

그들은 빌려온 사람들이라 얼른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 줘야 했다.

조사해 온 것을 전해 듣고 정리하고 있을 때 카지노로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뭔가 잔뜩 박스를 들고 들어오는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활짝 피어 있었다.

“뭔가 좋은 걸 가져오셨나 봅니다.”

“대박 건졌습니다! 이놈들이 글쎄! 뇌물 준 장부도 금고에 고이 모셔두고 있지 뭡니까!”

조사과장이 크하하, 소리 높여 웃었다.

뇌물장부까지 얻은 거면 엄청난 수확이다.

아직 조사과에 남아있던 법인세과 직원들까지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렸다.

“어이쿠, 이번에 우리 과에서 크게 한 건 하네요!”

“이놈들이 뭐가 무서운지 브로커랑 고객 숫자, 매출을 일일이 적어놨어요!”

장부를 못 찾으면 어쩌나 걱정도 했는데 다행이었다.

하긴, 브로커와 카지노 회사는 신뢰 관계가 아니다.

서로 언제든 손 털고 돌아설 수 있는 이들이다.

이제학 교수의 설명으로는 서로 매출액을 속여 수수료를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분명 장부가 남아있을 거라고 했었다.

그걸 찾느냐 못 찾느냐가 관건이라고.

그래서 부지사 쪽과 카지노 중 어느 쪽을 따라갈지 굉장히 고민했었는데 과연 조사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축하드립니다, 과장님!”

“아이고, 우리 모두의 공이죠. 부지사 쪽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표정을 보니 잘 해결한 것 같네요. 잘 됐습니다, 잘 됐어요.”

과장은 한 손에 두터운 장부를 든 채 연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서로의 공치사와 함께 은근한 자랑이 이어졌다.

둘로 나뉘어 급습했는데 둘 다 쉽지 않은 상대였다.

말은 안 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걱정했다.

무사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돌아 왔으니 서로의 수확물을 자랑하는 부족장처럼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금고는 제가 발견했습니다. 대표실 들어갔는데 대놓고 금고가 있는 거예요. 그거 깠는데 별것 없네? 이때 딱 감이 왔죠. 얘들이 따로 숨겨놓는 데가 있구나!”

“아하핫! 김 조사관님이 아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세요? 눈에 불을 켜고 그림 뒤부터 뒤지는데 무슨 방탈출 카페 온 줄 알았어요! 비밀 버튼 같은 거는 없다고, 그런 건 드라마에나 나오는 거라고 우리가 말렸거든요.”

그림 뒤부터 뒤진다니, 드라마를 많이 보긴 했나보다.

“그림을 떼어냈는데 아무것도 없으니까 실망해서 서로 눈치만 봤거든요. 근데 김 조사관님이 눈이 뒤집혀 가지고 책장을 훑기 시작하는 거예요. 거기서부터가 진짜 영화 같았어요.”

“제가 책장을 봤는데 뭔가 실금 같은 게 살짝 보이는 겁니다. 무슨 비밀 스위치 같은 게 있나 해서 책장 훑었는데 그런 건 없고, 책장이 밀리더라고요……?”

조사관 하나가 당시의 모습을 재연하자 다른 조사관들이 깔깔대며 웃었다.

“그 안에 진짜 작은 금고가 하나 있었는데 과장님이 대표를 어르고 달래 가지고 열었어요.”

조사관이 과장의 목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세무서에서만 조사하는 줄 알아요? 검찰한테 얘기해서 영장 갖고 오라고 할까? 엉? 우리는 시간 아주 많아요! 야근이 일상이라고. 여기서 밤새볼까?”

“아, 똑같다!”

과장 앞에서 과장을 흉내 내고 있다.

조사과장이 멋쩍게 웃으며 한 손에 든 장부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거참, 내가 그렇게 말했나? 나는 뭐라 말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잘도 외우고 있네. 일단 카지노 쪽은 과세자료 충분히 털었습니다. 도청 쪽은 어땠습니까?”

일단은 내가 현장 책임자로 되어 있으니 간단히 정리해서 보고했다.

사무적인 어투로 간결하게 말하고 나니 이번엔 나와 함께 갔던 직원들이 흥분해서 거들기 시작했다.

“이쪽은 부지사님하고 싸웠다니까요? 무슨 일 벌어지나 싶었어요.”

“결국 부지사가 가만 안 있었나 보네요.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아니요, 저희는 구경만 했어요. 부지사가 책임자 데려오라면서 배 째라 식으로 나오는데 신재현 팀장님이 버티고 서서 싸웠어요. 한 치도 안 밀렸다니까요.”

카지노 회사 쪽에 갔던 조사과 직원들이 수군거렸다.

“오, 그것도 볼만했겠는데. 저쪽으로 갈 걸 그랬나.”

내 옆에 있던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보니까 부산청장님이 도지사도 끌고 오셨던데요?”

“도지사를요?”

“그렇다니까요! 솔직히 없어진 줄도 몰랐거든요. 근데 부산청장님이 도지사 데리고 온 다음에 윙크하신 거 보니까 이건 작정하신 게 분명해요. 부지사 물 먹이려고!”

“뭔가 씩씩대면서 벼르고 계시더니 결국 부지사를 나락으로 보내시네요.”

“탈세에 뇌물까지 받아놓고도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던 사람이에요. 부산청장님이 잘하신 거죠, 뭐!”

“못했다는 게 아니라 좋다는 뜻입니다.”

조사팀의 분위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자 과장이 장부를 손으로 탁탁 쳐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기뻐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저쪽에서도 우리가 뭘 조사하는지 아니까 세무대리인 사서 최대한 방어하려고 할 겁니다. 우리도 과세 준비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넵!”

과장의 말이 맞다.

아직 중요한 과정이 남아있다.

우리가 다시 자료에 눈을 돌리기 시작할 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이번에는 부산청장이 세무서장을 대동하고는 찾아왔다.

우리가 세무서에 내릴 땐 분명히 있었는데 어느샌가 또 사라져 있다 싶었더니 서장실에 갔었나 보다.

덩치도 꽤 큰 사람이라 눈에 굉장히 잘 띄는 사람인데 어떻게 조용히 빠져나가는지 의아할 정도다.

부산청장은 한참 바쁘게 움직이는 우리를 보더니 뺨을 한차례 긁적이고는 풍채에 어울리지 않게 멋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흠흠, 오늘은 다들 고생도 했고 바쁠 것 같아서 초밥 주문해놨습니다. 먹고들 해요. 법인세과 분들도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넉넉하게 시켰으니 식사하고들 가요.”

초밥이라는 말에 직원들에게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 감사합니다!”

솔직히 앞으로 며칠 야근해야 하나 살짝 지치는 느낌도 있었다.

그랬던 것이 ‘이 정도면 야근해도 되겠는데?’ 정도의 감상으로 바뀌었다.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회식 한 번 갑시다. 술도 좀 먹어야지!”

직원들이 다시 한번 환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산청장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었다.

술 얘기하면서 왜 나를 보지?

그러다 문득 부산청에서 들었던 그의 습관이 생각났다.

마음에 드는 직원이 있으면 술을 먹여본다고 했던가.

저번엔 받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작은 병으로 받았는데 이번엔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와 눈을 마주친 부산청장이 손가락을 구부려 술잔을 기울이는 자세를 취했다.

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부산청장이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열심히 조사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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