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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망나니-290화 (290/500)

290화. 저울에 어디까지 걸 수 있는가 (2)

청장의 등장은 그야말로 끝판왕이 등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껏해야 과장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부지사는 먼저 의심의 눈초리부터 품었다.

“부산청장님이요? 청장님이 대체 여기에 어쩐 일이십니까.”

“그렇게 격이 맞는 사람하고 대화하고 싶다던 분이 이젠 제가 여기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드십니까?”

당연히 지방청장 정도면 격에 맞다 못해 넘칠 정도다.

그러나 그게 마냥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배하심 자신이 마음대로 찍어누를 수 있는 인사가 아닌 데다, 국세청에서 지금 이 사안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얼른 승진해야지, 7급에 있으니까 어중이떠중이들이 자꾸만 권위를 부리잖아.”

“어중…… , 이보세요. 아무리 청장이라 해도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배하심의 자존심을 단박에 긁는 말이었다.

잔뜩 독이 오른 부산청장은 되레 화를 냈다.

“존중을 받고 싶으면 먼저 존중 받을 행동을 하세요, 이 사람아. 내가 보고서 대충 읽어 봤는데 부지사님은 빼도 박도 못하고 탈세가 맞아요. 탈세는 그렇다 쳐. 그 기사는 대체 뭡니까? 부지사님 머리에서 나온 거죠? 참, 사람이 치졸하시대. 제가 그 기사 읽자마자 열 받아서 바로 튀어온 겁니다.”

속사포처럼 쏟아붓는 부산청장의 말에 배하심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도저히 청장이라고 볼 수 없는 언동이었다.

“청장님, 제가 하겠습니다. 들어가 계세요.”

“그러니까 너는 빨리 6급 올라가라니까.”

“그건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청장님. 공무원법에 정해져 있는데요.”

자기는 안중에도 없이 둘이 투덕거리기 시작하자 배하심이 입꼬리를 씰룩였다가 바로 정색했다.

“장난하지 마시고. 얘기 좀 합시다.”

***

-황민우 : 지금 도청 갑니다.

-강혜원 : 오 재밌겠다 나도 가고 싶따ㅏㅏㅏ

-안길진 : 검사님도 같이 가세요?

-황민우 : 아뇨. 한꺼번에 덮쳐야 될 것 같아서 조사과장님은 법인세과 직원들 데리고 카지노 법인 세무조사 가셨어요. 검사님은 세관 쪽 하고 브로커 조사 중이래요. 제주지검 가신 것 같던데.

-장세훈 : 검사님 오니까 일이 편하긴 하네

-강혜원 : 남의 편이면 괴롭고 같은 편이면 좋은 사람~ 우리 팀장님도 그렇지만~

황민우는 잠시 짬이 생기자 메시지를 보냈다.

적당히 탈세 수법과 조사 방법에 대해서만 말하고 끝내려고 했는데 어느새 실황 중계가 되어 버렸다.

팀원들이 신나서 다음엔 어떻게 됐냐고 물어보는 통에 대답을 끊을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황민우 : 도청 왔는데…….

-장세훈 : 왔는데 뭐. 60초 후에 계속됩니다. 이런 거 할 거면 너 한 대 맞는다.

-황민우 : 아니; 도지사님 먼저 만나서 사정 설명을 할까, 그냥 부지사 덮칠까 얘기 중이었는데 부지사가 등판함;

-안길진 : 예?

-강혜원 : 지금 도청이라면서요. 입구 어디서 마주침? 복도?

-장세훈 : 타자 빨리 쳐라. 연차 내고 제주도 가기 전에.

-황민우 : 와씨 책임자 나오라고 난리 치는 중입니다.

-강혜원 : 재밌겠다. 직접 보고 싶다. 영상 중계 안 되나요?

-황민우 : 도청 밖에 차 세우고 잠깐 회의 중이었는데 길 건너에서 부지사 옴. 책임자 나오래서 부산청장님이 등판하심. 실랑이 중임.

-장세훈 : 안 되겠다. 나 연차 내러 간다.

-강혜원 : ??? 주사보님. 어디 가요? 지금 가도 어차피 상황 끝이거든요?

-강혜원 : 야! 진짜 갔어?

-안길진 : 주사보님 와서 채팅 보시면 불같이 화내실 텐데요.

-강혜원 : 지우면 되죠.

강혜원의 ‘야! 진짜 갔어?’는 순식간에 [삭제된 메시지입니다]라는 안내 문구로 바뀌어 있었다.

황민우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실랑이 중인 셋을 바라보았다.

부지사는 부산청장과 단둘이 얘기하기를 원했고 부산청장은 결단코 거부했다.

이제는 물러서려 해도 물러설 수가 없는 고위공무원의 자존심 싸움이 되어 있었다.

“그니까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시간 많이 뺏지도 않겠습니다. 5분이면 돼요.”

“무슨 제안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우리 제주세무서장한테도 한소리 했다면서요? 그것도 10분씩이나.”

“그건, 염려와 격려차…….”

“자기 조사하지 말라는 염려와 격려겠죠!”

“청장님, 아까부터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고위공무원이시면 그에 맞는 언동을 하세요!”

“그러는 부지사님은 그에 맞는 언동을 하셨습니까? 아까 말씀하신 그 염려와 격려, 제가 직접 들었거든요. 제가 비행기 타고 날아온 게 며칠 전입니다!”

“……그걸 들었다고요?”

배하심이 잠시 멈칫했다.

자신의 발언 중에 문제가 될 법한 것이 있나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허, 이분 진짜 안 될 분이네. 지금 와서 그걸 생각하고 있어요? 아주 막장이구만!”

둘의 실랑이는 의외로 길어졌다.

처음엔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직원들도 이제는 ‘이 정도면 담배 피우고 와도 되겠는데’라며 농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황민우가 꼿꼿이 서서 지켜보고 있자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언제쯤 끝날까요?”

황민우는 시선을 돌려 신재현의 옆모습을 보았다.

가만히 있는 모습이 언뜻 보면 두 고위공무원의 거친 말싸움에 자칫 밀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가 지금 타이밍을 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슬슬 끝나겠네요. 지금 담배 피우러 가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어? 그래요?”

황민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재현이 말싸움에 끼어들었다.

일부러 청장이 아닌 부지사가 따지고 있을 때 뚝 끊은 참이었다.

“저는 분명히 부지사님과 대화하려고 했습니다. 아까 하실 말씀 있으면 제게 하라고 말씀드렸죠? 이제는 부지사님의 입장은 생각지 않고 밀어붙이려 합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길게 이어진 말싸움에 지친 배하심의 참을성이 떨어져 가는 시점이었다.

부산청장은 얼씨구나 하고 손뼉을 쳤다.

“잘한다! 네가 명실상부한 책임자니까 깔끔하게 마무리해!”

부산청장은 아예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배하심은 일부러 신재현과 말을 섞으려 하지 않던 참이었으나 더는 피할 수가 없었다.

부산청장이 서 있던 자리에 신재현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제가 왔다고 해서 국세청에서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제가 왔기 때문에 국세청은 진심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자신 있는 모습이어서 배하심은 할 말을 잃었다.

뭐라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신재현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부지사님께서는 제 목이 아닌 더 대단한 걸 원하시는 것 같군요. 그러면 지금 이 자리에서 부산청장님과 서울청장님, 두 분 청장님의 이름을 걸면 만족하시겠습니까?.”

배하심은 표정관리를 잊을 정도로 놀랐다.

자연히 고개가 한 발짝 물러선 부산청장에게 향했다.

‘네가 왜 내 이름을 거냐’라며 화를 내도 부족한 판국에 부산청장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부하를 믿고 맡기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지금 이놈에게 미래를 걸겠다는 소리 아닌가.

“상황에 따라서는 국세청장님의 이름도 빌려올 수 있습니다. 부지사님께서 원하시는 게 이런 것인가요? 이 정도 권위면 부지사님과 말을 나눌 수 있는 겁니까?”

자존심 싸움에서 배하심이 가장 큰 무기로 내세웠던 것은 권위였다.

거기서 국세청장까지 입에 올린 지금 배하심이 더 꺼낼 패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저는 그 어느 분의 이름도 걸지 않을 겁니다. 저울에 올라갈 것은 제 이름이면 충분합니다. 탈세하신 것을 조사하러 왔는데 대체 국세청장이 왜 필요합니까? 부지사라는 이유로 저희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으실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탈세 조사를 왜 나한테 하냐고!’라며 배하심이 답답함을 토로하려는 순간 부산청장이 귀신같이 끼어들었다.

“흐하하! 말 잘 하네! 암, 그렇고말고! 아직도 분위기 파악 안 되는 것 같아서 한마디만 더 거들겠습니다, 부지사님. 교육원에서 애들 가르치고 맛있는 거나 먹으러 다니던 애가 왜 갑자기 불려왔겠습니까. 부지사님 같으면 중요 사건 터졌는데 연수원에 나가 있던 애를 불러서 시키겠어요?”

부지사는 당혹과 분노가 섞인 가운데서도 냉철하게 생각했다.

자신이라면, 아니 다른 공무원이라도 이런 선택은 불가능하다.

일이 터졌는데 누군가를 불러왔다면 그건 그 직원이 ‘해결사’라는 뜻이다.

비로소 배하심은 고개를 번쩍 들어 신재현과 눈을 마주쳤다.

“이 사안은 손경진 국세청장님 결재라인까지 올라갔습니다. 신 팀장은 선발대예요. 일이 길어지거나 일손이 더 필요할 것 같으면 우리 부산청 조사국이 출동할 거고 상황이 더 장기화 되면 본청 조사국이 나올 겁니다. 이제 좀 파악이 되십니까, 부지사님?”

배하심은 여전히 신재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일단 부지사님 사무실부터 훑겠습니다.”

“뭐, 잠시만! 이들이 한꺼번에 들어가면 곤란합니다! 최소 인원만 조용히 처리할 수 없겠습니까!”

비로소 제대로 그를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다.

신재현이 말했듯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대담의 자리는 지나갔다.

“그러게 처음부터 협조하시면 좀 좋았겠습니까. 저희가 뭐 경찰도 아니고 세금 부과는 얼마나 적절할지 조사하러 나온 건데 대체 왜 그렇게 배척하시는 겁니까.”

“그럼 신 팀장님과 보조할 분 한 분만 들어오시면 제가…….”

“그건 곤란할 것 같습니다. 제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보조랑 둘이서 부지사님을 조사하겠습니까.”

비꼰 것이라는 걸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부지사가 허둥대며 붙잡았지만 신재현은 오히려 빙긋 웃었다.

부지사는 이유 없이 불안해졌다.

“걱정 마세요, 부지사님. 소명하실 기회는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공무를 집행하러 온 거예요. 세금은 과세해야 하는 부분에만 과세합니다. 소명하시면 되죠!”

굉장히 간단하게 말하지만 작정하고 나온 세무조사가 그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다.

신재현은 떨어진 곳에 있던 공무원 무리에게 시선을 보냈다.

조사팀 공무원들이 뭘 말하는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알아들은 황민우가 다가왔다.

아까부터 신재현과 배하심을 관찰하며 대기하던 황민우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가방에서 투명 파일을 꺼내더니 공손히 건넸다.

말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는데 척하면 척이었다.

그것만 봐도 둘이 얼마나 많은 현장을 돌아다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부산청장은 호오, 하고 눈썹을 꿈틀했다.

“국세기본법에 따르면 본래 세무조사는 사전에 통지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에는 통지 없이 조사가 가능합니다.”

부산청장은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공문이 있으니 읽어보시고 이쪽은 저희 세무공무원의 서약서입니다. 납세자보호헌장은 이쪽입니다.”

“아, 무슨 서류가…… 흐어, 참!”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복잡한 서류 몇 장이 오고 갔다.

부산청장은 내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짜고짜 쳐들어가게 되면 급박한 현장이 되는지라 흔히 하기 쉬운 실수가 있다.

절차.

공무원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특히 이런 이해관계가 얽힌 건이라면 더더욱.

‘누가 가르쳤는지 참 잘 배웠구만!’

부산청장은 공문의 어려운 문장을 더듬어 읽는 배하심을 보며 뒤로 더욱 물러났다.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싶었는지 조사팀 공무원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이제는 현장 실무자들이 나설 때였다.

자신은 뒤에 가만히 있으며 눈을 부라려주면 족하다.

“그럼 부지사님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들어가실까요? 일단 들어가서 조사자료 설명해 드리고 소명 듣겠습니다.”

무작정 몰아치는 것도 아니다.

몰아붙일 때는 몰아붙이면서도 어디까지나 공무원으로서의 본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부산청장은 맨 뒤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쟤 진짜 빨리 6급 올라가야겠네.’

얼른 조사가 끝나고 술이나 한잔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승진 시험 준비부터 하라고 조언해야겠다.

부산청장은 품 안에 든 자그마한 술병을 만지며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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