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저울에 어디까지 걸 수 있는가 (1)
정무부지사는 밖으로 나다니는 일이 잦다.
그리고 한 주의 마지막 업무일인 금요일, 정무부지사 배하심은 굉장히 바빴다.
아침 일찍 열린 업무 보고에 도지사, 행정부지사와 함께 참석했다.
그다음엔 몇몇 사업에 관한 공청회가 있었다.
점심식사 후에는 도의회에 출석해 의견을 나눴다.
물론 말이 의견이지 사실상 의원들의 추궁을 능수능란하게 회피하는 자리였다.
하루의 일정이 굉장히 꽉 짜여 있었기 때문에 배하심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덕분에 배하심의 머릿속에 세무조사에 관한 걱정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어느 샌가 씻은 듯이 까먹어 버렸다.
거기에는 나름 합당한 이유도 있었다.
다음 주 초에 조사가 나온다는 정보가 있었으니 이번 주는 잠잠할 것이고, 만약 조사가 나온다 해도 이제 배하심과는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조사 대상은 카지노 회사였고, 거기서 연결 고리를 찾아 더듬어 올라오는 것이 걱정이었던 것뿐이다.
세무서장에게 따로 언질도 줬다.
자신이 연관되었다는 언급만 없으면 카지노 회사가 조사를 받든 세금을 때려 맞든 사실 상관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카지노 건은 배하심의 머릿속에서 잊혀진 지 오래였다.
해결된 건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도의회가 끝난 후 도청으로 돌아갈 때 그 앞에 서 있는 검은 승용차 무리를 봤을 때 의아함이 들었다.
“오늘 누구 정부 요인 오기로 했어?”
도의회 건물과 도청 건물은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서 있다.
그 거리를 차 타고 이동하기엔 욕먹기 딱 좋아서 걸어서 돌아가던 참이다.
주차장도 아니고 정문에 저렇게 승용차가 늘어설 정도면 뭔가 중요 인사가 방문했다는 뜻이다.
배하심은 옆에서 따라오던 수행비서에게 물었지만 그도 당혹스러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잊은 게 있나 싶어 급히 일정표를 뒤지던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정부 인사 방문 일정은 없습니다.”
“그럼 뭐지, 지역 유지?”
“방문 일정 자체가 없습니다.”
“뭐야, 긴급 방문이야?”
배하심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도지사보다는 정무부지사인 자신의 업무로 할당될 확률이 높았다.
내부 일은 행정부지사가, 외부 일은 정무부지사가.
정무부지사는 도지사의 정책적 동반자다.
“쯧. 미리 말이라도 하고 와야 할 거 아냐. 얼른 가서 누군지 알아봐.”
배하심은 걸음을 늦췄다.
상대와 인사를 나누기 전에 이름이나 직함이라도 알고 있어야 결례를 범하지 않는다.
얼굴을 마주하면 아무것도 모른 체 인사를 나눠야 하니 일부러 시간을 끌기 위해 느리게 걷는 것이다.
그래 봤자 공무원인데 무슨 복잡한 셈법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별정직인 정무부지사는 상황이 좀 다르다.
그는 공무원이라기보다 정치인에 가까웠다.
서둘러 튀어나간 비서가 승용차로 다가갔다가 흠칫하며 발을 멈췄다.
배하심은 의아해졌다.
얼른 가서 누군지 알아보고 돌아와서 전달을 해야지.
대체 누구길래 저렇게 굼뜬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비서는 멀리서 봐도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뒤를 돌았다.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상사를 쳐다본 거겠지만 어쩐지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씨, 거기서 나를 보면 어떡해!”
배하심은 분통을 터뜨리며 다시 속도를 높였다.
비서가 돌아봤다면 상대도 그 시선을 따라 자신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적잖이 높은 분이라면 지금 이렇게 걸어가는 것 자체가 결례가 될 수도 있었다.
10미터쯤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승용차 너머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배하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니 차림새부터 훑었는데 그들은 그닥 값나가는 것을 걸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도청에서 자주 보는 직원들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중저가의 정장은 꾸밈없는 무채색이었고 책상물림의 먹물 냄새가 났다.
한마디로 딱 보아하니 공무원 같다는 소리다.
“어디서 오신 분인가 알아봤나?”
배하심은 비서를 불렀다.
얼른 네 일을 하라는 종용이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비서는 사회초년생처럼 행동했다.
누굴 보든 의연하게 수행해야 할 비서가 어리바리하게 서 있는 것이다.
‘쯧. 네가 모시는 나도 높은 사람이다, 인마. 정신 빠져 가지고!’
배하심은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말을 주워 삼키며 비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진정해. 뭘 봤는데 그래?”
“부, 부지사님…….”
비서가 못 볼 걸 본 것처럼 손가락을 들었다.
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 또한 엄청난 결례다.
“오늘따라 왜 그래?”
배하심이 결국 한 소리 하려는 순간, 비서가 가리킨 곳을 보고 말았다.
승용차 옆에 선 정장 차림의 남녀에 둘러싸여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는 청년.
손에는 결재판과 펜을 들고 있었는데, 판에는 종이가 고정되어 있었다.
뭔가 빼곡히 쓰여 있는데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저 청년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 아주 큰 문제다.
“국세청 직원들이 왜 여깄어?”
정확히는 제주세무서 소속이었지만 그걸 따질 경황이 없었다.
배하심조차 순간 평정심을 잃고 속마음을 말할 정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배하심의 목소리에 세무공무원들의 고개가 일제히 움직였다.
족히 열 쌍에 달하는 눈이 그에게 향했다.
시선이야 자주 받는 것이니 무서울 것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시선 한 쌍이 있었다.
거기에 무슨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끈적한 무게가 느껴졌다.
‘허, 이놈이 바로 그 신재현이란 말이지?’
배하심은 안일했던 생각을 수정했다.
이 느낌, 부지사인 배하심으로서는 종종 마주하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의회에서 능구렁이 의원들이 저런 끈적한 눈빛을 보내곤 했다.
물론 노회한 정치인에 비하면 아직 덜 벼려진 느낌이 있었지만 이 나이대의 공무원이 얻기엔 이른 것이었다.
거기에 이들의 구도도 이상했다.
신재현 주위에는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은 이들이 포진해 있었다.
어쩌면 이 무리에서 그가 가장 어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손에 펜과 종이를 든 것은 신재현 하나뿐이었고, 뭔가 적힌 목록을 들여다보던 것도 그 하나였다.
다른 직원들은 그를 둘러싸고 지켜보며 무언가를 듣는 것에 가까웠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이건 마치 현장 지휘권이라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평소 다른 자리에서 만났다면 흥미가 크게 솟았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보아하니 제주세무서 분들이신 것 같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협조할 일이 있다면 미리 공문을 보내시지 않고요.”
배하심은 먼저 운을 떼었다.
인사라기보다는 추궁에 가까웠다.
공무원은 절차가 생명이다.
무슨 자료 하나가 필요해도 기관에 공문을 보내는 조직이다.
그러니 이렇게 기습하듯 찾아온 것에 대한 항의이기도 했다.
공무원들은 말없이 서로를 훑었다.
누군가가 대답하기 전에 배하심이 입을 열었다.
“음, 대표자가 어느 분이죠? 잠깐 얘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
배하심은 공무원 무리를 스윽 훑었다.
순간적으로 내린 판단이었다.
일단 돌려보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필 보는 눈도 많은 도청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으니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남의 일에 팝콘 뜯는 사람이 소문내는 건 순식간이니 여기서 실랑이를 벌이면 더욱 이목이 쏠린다.
그러니 대표자 격인 사람 하나만 데리고 조용한 곳에서 대화로 풀어 볼 생각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배하심은 설마 자기 때문에 왔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껏 해 봤자 카지노 회사를 조사하는데 협조를 구하거나, 도청의 허가 부서에 질의하러 나온 줄 알았다.
어찌 되었든 조용히 처리하고 싶은 것이 조직 책임자의 마음이다.
“잠깐이면 됩니다. 협조해 드리려고 그러는 거니까 얘기 좀 나누시죠.”
나름 부지사의 입장에서는 타당한 말이었다.
이들이 도청으로 들어가면 분란이 일어날 수 있으니 최대한 조용히 원하는 걸 얻고 돌아갈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는 소리 아닌가.
여기까지는 딱히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대표 격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들은 먼 산 보듯 관심 없는 표정을 했다.
“저희는 사실 부지사님을 뵈러 온 겁니다.”
앞으로 나선 것은 신재현이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그가 이 무리를 이끌고 왔단 말인가.
배하심은 은근하게 끓어오르는 불쾌감을 숨기고 웃는 낯을 했다.
“저를요? 무슨 일이실까요. 그 전에 제가 그쪽 분을 뭐라 불러 드리면 되겠습니까?”
누구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한 것은 일부러였다.
너 따위는 내 안중에도 없으며 두렵지 않다는 정치적 언어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안에서 그런 정치적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신재현이 조금 알아먹긴 했지만 그는 듣자마자 무시했다.
“국세조사관 신재현입니다.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조사관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신재현은 명함을 내밀었다.
이동한 후로 새로 명함을 파지 않았기 때문에 국세청 로고가 새겨진 명함에는 서울청 소속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 펜으로 줄을 긋고 현재 소속을 적어 넣은 명함이었다.
배하심은 그걸 보고 기가 찼다.
‘명함을 펜으로 수정하네. 기본이 안 되어 있군.’
국세청 공무원은 이동이 잦은 관계상 새 명함이 나오기 전에는 펜으로 연락처와 소속을 수정해서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배하심의 머릿속에서는 신재현의 평가가 수직 하강했다.
“저랑 얘기하시면 됩니다만, 어디서 말씀하시겠습니까? 자리를 옮길까요? 아니면 차에 타시겠습니까?”
차에 타서 문을 닫으면 방음이 된다.
그래서 말한 것이었는데 배하심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방금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대표 격이라고 한 것은 책임자와 얘기하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조사관님이 아니라요.”
분명 웃는 얼굴이었고 책잡힐 데 없는 업무용 말투였으나 내용은 심상치 않았다.
분위기가 급속히 냉랭해지기 시작하자 세무공무원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지금의 배하심은 잔뜩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공문도 없이 다짜고짜 쳐들어온 것, 별정직 1급 취급인 부지사 앞에 7급 세무직이 나선 것, 일부러 서장에게 전화까지 했는데 귀찮게 한 것 등.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였다.
“제가 왜 조사관님하고 얘기해야 합니까?”
“제가 책임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지사님.”
“책임? 7급 조사관이 무슨 수로 책임을 집니까? 책임이라는 말은 본인이 그런 능력이 됐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거든요. 오늘 이 자리에서 조사관님이 실수한다면 누구의 목까지 걸 수 있습니까? 기껏해야 조사관님 한 명만 징계 받고 끝나는 것 아닌가요?”
공무원들의 불안한 시선이 이리저리 얽혔다.
신재현은 오른손에 든 펜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걸 수 있는 거야 많긴 한데…… 지금 왜 걸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글쎄요. 조사관님이 오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계신지도 모르죠.”
“저는 사고는 쳐도 실수 같은 건 잘 안 하는데…….”
“지금 저랑 말장난하십니까?”
이제 기분이 안 좋은 걸 대놓고 표시하는 배하심에게 신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말장난이 아니라…… 오늘 저희는 배하심 정무부지사님에 대한 탈세 의혹을 조사하러 온 겁니다. 그리고 오늘에 한해서는 그 누구도 목이 날아갈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 부지사님은 빼구요.”
한 치도 밀리지 않은 채 맞서는 청년을 보며 배하심의 평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그렇게 서장에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감히 자신을 조사하러 왔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10분간 자신이 떠든 것은 쇠귀에 경 읽기였다는 뜻 아닌가.
“지금 무슨! 더 할 말 없습니다. 책임질 수 있는 사람 데려오세요.”
나를 조사하려거든 그에 걸맞은 목을 저울 위에 얹어라.
배하심의 말을 알아들은 신재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걸 수 없어서가 아니다.
여전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배하심이 전혀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자 뒤쪽 차의 문이 덜컥 열리더니 풍채 좋은 한 중년 남자가 내렸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배하심을 스윽 훑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진짜 사람 말 안 들으시는 분이네. 신 팀장이 책임자 맞다니까.”
딱 봐도 책임자 같은 남자가 나타나자 배하심이 잘 만났다는 표정을 했다.
“그쪽이 책임자십니까? 저랑 따로 얘기 좀 하시죠.”
배하심은 신재현을 까맣게 무시한 채 새로 등장한 남자를 데리고 한쪽으로 가려 했다.
그러자 남자가 일갈했다.
“책임자? 내가 이 제주도 관할 책임은 맞지! 경상남도와 부산, 울산, 제주도를 책임지는 부산지방국세청장입니다.”
“뭐, 뭐요? 청장?”
제자리에 얼어붙은 배하심을 향해 부산청장이 자신의 옆을 가리켜 보였다.
“얘하고 말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부산청장인 내 말도 무시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