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제주세무서 (5)
제주특별자치도.
그 명칭에서 볼 수 있듯 여타 지역과는 구조가 조금 달랐다.
특별자치도로 지정된 이후, 그 산하에 있던 제주시와 서귀포시는 자치시에서 행정시로 격하되어 도지사가 시장을 임명하게 되었다.
기초자치단체가 없다는 뜻이다.
또한 지방경찰청과 검찰청 외에 제주자치경찰단이라는 도지사 직속 조직도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제주도는 도지사에게 꽤 많은 권한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두 명의 부지사가 있었는데 행정부지사는 1급 고공단 가급으로 전형적인 공무원이었고, 정무부지사는 별정직이었다.
한마디로 내무를 담당하는 행정부지사와 다르게 정무부지사는 외부에서 데려와 임명한 인사라는 뜻이다.
도지사의 초청을 받고 재작년부터 정무부지사 자리에 앉은 배하심은 법조인이었다.
왕년에 부장검사까지 올라갔으며 불미스러운 일로 옷을 벗고 로펌에 들어간 변호사.
과거야 어쨌든 간에 로펌에서는 꽤 유명했다.
승소율도 높았고 몸값도 점점 세졌다.
거기에 운 좋게도 인맥까지 잡아 제주도 정무부지사 자리에 앉았으니 지금이 바로 배하심의 전성기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배하심에게는 하나의 비밀이 있었다.
제주도에 온 후 쥐게 된 돈줄.
어느 카지노 사업체를 말하는 것이다.
배하심이 정무부지사 자리에 앉게 된 후 뒤에서는 이런저런 유익한 제안들이 슬금슬금 들어왔다.
여러 정책을 검토하고 시행하며 도의회와 국회의 가교가 되어 주는 정무부지사로서 잘 살펴 주시길 바랍니다 등등.
그가 바라 마지않던 일이다.
임기만 잘 끝내면 국회 진출도 꿈은 아니다.
그런 장밋빛 희망찬 미래가 그의 머리에서 펼쳐질 때였다.
날벼락 같은 소식이 하나 들어왔다.
“카지노 쪽을 파고 있답니다.”
비서의 보고를 들은 배하심이 얼굴을 찌푸렸다.
“거길 왜? 누가?”
“제주세무서입니다.”
“아, 세무서.”
배하심은 혀를 끌끌 찼다.
재수 없으면 걸린다는 그 세무조사에 걸렸구나, 대충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럼 어쩐다. 이미 국세청 눈에 걸렸으면 빼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경찰 쪽에 걸렸다면 내사종결이든 뭐든 사건으로 취급하기 전에 묻어 버릴 수 있었다.
검찰이라면 좀 골치 아프지만 법조계에 있는 인맥으로 어찌해 볼 수 있었다.
명색이 그도 법조계에 있던 사람이니까.
국세청이라면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쪽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있다 해도 근 몇 년 간 시끄러운 국세청은 현재 잔뜩 날을 세우고 있는 상태였다.
국세청 쪽에도 줄을 만들어 볼까, 했다가 포기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요즘 국세청은 건드리기가 너무 무섭다.
“골치가 아프네. 제주세무서에서 적당히 하고 손 뗄 것 같아?”
비서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듣기로는 신재현이 제주세무서에 합류했답니다.”
“신재현이 누군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어. 직함이나 배경을 말해야…… 잠깐, 신재현?”
툴툴거리던 배하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떡 벌어진 입에서는 완성된 문장이 아닌 조각난 말이 흘러나왔다.
“그, 그놈이 대체. 왜, 뭐 하러 여기 세무서에, 왜 와 있는 거야? 서, 설마 국세청에서 나를 타깃으로…….”
온갖 안 좋은 상상이 휘몰아쳤다.
신재현이라는 이름은 법조계에서도 유명했다.
거리가 있는지라 휘말리지는 않았지만 만약 그가 서울에 있었다면 골치깨나 썩였을 것이다.
단순히 이를 드러내는 놈이라면 먹이를 물려주거나 때려 패서라도 조용히 하게 만들면 된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튀어 올라 목덜미를 노릴지 모르는 놈은 무섭다.
배하심은 자기도 모르게 조심스레 목을 쓸었다.
“정말 나 때문에 온 건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며칠 전부터 제주세무서에서 제주마이더스 카지노라는 회사를 조사할 예정이라는 정보는 돌았습니다.”
“그거 출처는 어디야.”
“제주세무서 법인세과의 직원입니다.”
배하심은 몇 달 전, 비서에게 ‘제주세무서 안에 끈 하나 만들어 봐라.’라고 지시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신재현이 한참 날뛸 때였기 때문에 혹시나 제주세무서에서도 영향을 받고 칼춤 추는 건 아닐까 싶어 보험 차 내린 지시였다.
비서는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럼 거의 확실하다는 거네.”
배하심의 눈이 흐려졌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조사대상인 회사나 그 관계자로부터 배하심까지 타고 올라오는 날에는 끝장이다.
그렇다고 건드리자니 자꾸만 한 명의 이름이 걸렸다.
“신재현, 신재현, 신재현.”
겨우 7급 공무원 한 명 때문에 위기감을 느낀다는 게 말도 안 되긴 하지만 현실이 그랬다.
얕봤다가 모가지가 날아간 사람을 봤으니까.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신재현 그놈을 만나서 회유해 봐? 아니지, 그런 게 가능했으면 진작 회유당했겠지.”
“신재현이 대단했던 건 맞지만 그건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좌천당했다고 소문이 파다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배하심이 눈가를 꿈틀거렸다.
명백한 짜증과 경멸이었다.
“목숨이 걸린 일에 그렇게 안일하게 판단하나? 그놈이 날개를 잃지 않았다면? 정말 뒷배를 잃었는지 좀 더 관찰한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아.”
“……죄송합니다. 제가 판단이 짧았습니다.”
배하심은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고는 몇 가지 방안을 생각해 냈다.
“세무서 직원 놈한테 좀 찔러 주고 정보 좀 캐 오라고 해. 그 조사에 참여해서 핵심 내용을 빼 오면 두 배를 준다고 하고. 그다음에 언론 움직여서 신재현을 좀 귀찮게 해 봐.”
“악성 기사를 내면 되겠습니까?”
“그런 거 이미 다른 놈들이 다 해 봤잖아. 안 통해. 그거 말고 이걸로 하자고.”
비서가 지시를 받아 적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배하심은 먹잇감을 찾은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적셨다.
“신재현, 술에 취해 말실수. 이런 촌구석까지 떨려 나온 처지라는 등의 막말. 비하 발언.”
비서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재현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막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제주도를 비하했다는 기사 자체가 중요했다.
이곳은 넓지만 결국 섬이다.
평생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으며 자신들의 고향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었다.
요즘 들어 외부인이 많이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제주도 비하 발언 기사 한 방이면 신재현은 순식간에 적이 될 것이다.
“그 후에는 그놈이 무슨 말을 하든 믿어 줄 사람이 없을 테지.”
정치에 관심이 많은지라 부지사의 선택지도 마찬가지로 더러운 공작의 행색을 띠고 있었다.
“목표는 하나야. 세무서에서 회사까지만 조사하고 끝내는 거.”
그거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조금씩 옥죄어 가면 방법은 생긴다.
급할 것 없다.
아직까지의 배하심은 덧없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
제주세무서 서장은 앞에 놓인 보고서를 읽었다.
그리고 한 줌이 채 안 되는 자료를 내려놓으며 숨을 툭툭 끊어서 내뱉었다.
종이를 만지는 손길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정말이라 이거죠.”
앞에 서 있던 조사과장이 앓는 소리를 냈다.
긍정의 뜻이다.
“상대가 너무 큽니다. 아니, 그것보다 먼저 궁금한 게 있어요. 사실대로 대답하세요.”
“말씀하십시오, 서장님.”
“임시 팀 만든 게 겨우 하루 전입니다. 어떻게 오늘 이런 결과가 나옵니까. 혹시 어디서 언질 받은 게 있습니까?”
서장은 지금 과장을 의심하고 있었다.
보고서를 보아하니 정무부지사를 비롯해 세 명의 유력자에게 자금이 새어 들어간 정황이 보이긴 했다.
조사하다 보면 언젠가 밝혀졌을 일이었다.
그러나 하루 안에 찾을 만한 내용은 또 아니었다.
미리 알고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타깃을 잡고 조사를 시작했거나 작정하고 몰아갔다는 뜻이 된다.
여기에 어떤 정치적 의사가 개입했는지 서장은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장은 길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이 조사는 지방청과 본청도 지켜보고 있어요. 만약 여기에 털끝만큼도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부정한 청탁은 말고 깔끔한 부탁은 있었습니다.”
“무슨……?”
조사과장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라 말하든 믿게 만들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신재현,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과장님.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제가 농담하는 것 같아요?”
과장은 정색했다.
서장조차 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의 표정이었다.
“서울청장 민치호의 칼입네 어쩌네 할 때는 그냥…… 그 왜 있잖습니까, 자기 심복한테 그럴듯한 타이틀 붙여 주는 건 줄 알았습니다.”
조직에서 칼이라 칭할 때는 보통 주인 대신 적의 모가지를 쳐 날리는 저격수를 의미했다.
실력 있고 두려움의 상징이 되지만 언제든 쓰고 버림받을 수 있는 사냥개.
그래서 신재현이 ‘민치호의 칼’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불리기 시작한 초기에는 비웃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리 쓰고 버린다 해도 새파란 애송이를 데려다 놓은 건 너무 어설프지 않느냐는 평이었다.
신재현이 드러나기 시작한 후에는 그런 말이 쏙 들어갔지만 취급이 조금 달랐다.
저격수, 그러니까 사냥개라고 치부할 놈이 아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칼’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거라고.
그러니 굳이 따지자면 민치호의 왼팔쯤 되겠다는 말이 많았다.
둘의 차이는 크다.
칼은 버릴 수 있지만 팔은 버릴 수 없다.
민치호의 태도도 그와 비슷했고.
그래서 ‘민치호의 칼’이라는 타이틀은 이미 과장급들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놈 칼 맞아요.”
서장은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허허.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그야 칼 맞죠.”
“아뇨. 날이 시퍼렇다고요. 잘못 다루면 우리 목도 날아갈 정도로.”
서장은 그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알아들었다.
“우리 목이 날아간다고요?”
“예. 칼자루를 쥔 주인이 우리가 아닌데도, 그저 그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요. 신재현은…….”
과장은 힘들게 말을 골랐다.
그러나 막상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괴물이라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재해, 재난. 하, 정말 국세청이 왜 급박한 보고를 듣고도 신재현만 딸랑 보냈는지 알 것 같네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유능하다는 말이라고 알아들으면 되겠습니까?”
“예. 드럽게 유능합니다. 이 보고서에 나온 세 명의 이름을 어떻게 하루 만에 정리해 왔냐고 물으셨죠? 하루가 아닙니다. 단 몇 시간 만이에요.”
과장이 속사포처럼 쏟아 부었다.
“어제 팀이 생기고 나서 저녁 6시쯤 신재현이 이 세 명의 이름을 적어 왔습니다. 뒤에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고요. 상상해 보세요. 겨우 회사 통장이나 뜯어 봤을 단계에서 장막을 걷고 그 뒤에 있는 놈들을 끄집어 올렸다고요.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놈들을 치겠다고 하는 겁니다.”
미지는 공포를 부른다.
그저 일 잘하는 줄 알았던 한 명의 직원은 조사과장의 말을 통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되었다.
서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예 처음부터 우리와 보는 방식이 달랐던 겁니다. 회사 세무조사는 안중에도 없었어요. 그건 곁다리인 겁니다. 그 위에,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들. 그는 애초에 그것까지 다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정치인이고 뭐고 다 쳐 버릴 생각이라고요. 지금 좌천까지 된 상황에도!”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감당할 수는 있는 선입니까?”
제대로 쥐지 못하면 파멸이다.
서장은 스멀스멀 다가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과장의 말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예 맡겨 보려고요.”
“뭘 한다고요?”
“생각해 보니 팀장으로 뛰었던 경력도 있고. 지휘권 줘도 잘 할 것 같아서요.”
“과장님. 지금 제가 똑바로 들은 것 맞습니까? 아니면 책임을 전부 신재현에게 미뤄서 안위를 도모하겠다는 계획입니까?”
아무리 겁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서장은 정색했다.
“제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러겠습니까. 다만 인정하는 겁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신재현이 저보다 더 지휘에 어울립니다. 어차피 과장 밑에 팀장급이 실무 지휘하는 것도 이상할 것 없잖습니까. 그리고…….”
과장은 정색을 풀더니 약간의 긴장이 서린 얼굴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저놈들 뿌리 뽑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날뛸 수 있게 돕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까 제가 재난이라고 했잖습니까. 지금은 그 재난이 우리 편인 겁니다.”
과장의 눈에 서린 각오를 봤을 때, 서장이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과장님의 판단이 그렇다면 맡기겠습니다.”
평소라면 말렸겠지만 지금은 어쩐지 믿고 싶어졌다.
“그 재난이 우리까지 휩쓸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렇게만 된다면 최고의 우군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