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제주세무서 (2)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구는 환호성을 질렀고 누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나이 지긋한 누군가는 자리에 앉은 채 자그맣게 박수를 쳤다.
저마다 표현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분명 나를 환영하고 있었다.
처음엔 무슨 꿍꿍이인가 했는데 저들의 눈동자에는 그런 모략의 기색이 없었다.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분위기였다.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겠다.
그리고 사태 파악이 안 될 땐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게 상책이다.
짐작 가는 게 하나 있긴 한데, 아마 민치호가 손을 쓴 결과일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할 시간도 벌 겸 나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환호가 더욱 커졌다.
“자자, 멀리에서 오신 분입니다. 너무 놀라게 하면 안 돼요.”
한라산 둘레길에서 본 원장의 옛 부하라는 과장이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단순히 교육원에서 왔다고 해도 섬 반대편에서 온 것이니 멀리서 온 게 맞다.
그리고 서울에서 왔다고 치면 더더욱 멀리서 온 것이 된다.
그의 말은 중의적인 뜻을 담고 있었다.
“다들 진정하시고 두 분은 절 따라오세요. 서장님과 인사 하셔야죠.”
“네.”
우리는 과장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섰다.
그리고 법인세과 사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조용히 물었다.
서장실에 가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생각보다 성대한 환영인데요.”
“아, 우리가 배척할 거라 생각했습니까?”
“그날 과장님께서 하신 말씀도 있으니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저희를 반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날 과장은 분명 내 파견을 꺼려했다.
그 사정은 이해한다.
한 명의 이레귤러가 초래할 수 있는 파장을 우려하는 것은 책임자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겨우 5명뿐인 팀이지만 명색이 책임자 자리에 있어 봤다고 그의 입장이 이해가 갔다.
“그랬죠. 우리 관할에서 일어난 일 하나 처리 못해서 외부인 끌어들인다고 욕먹을 일 아닙니까. 우리 힘만으로 하려고 했는데.”
과장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상황이 좀 바뀌었어요. 제가 말을 좀 잘못 해서 서장님이 반쯤 설득이 됐는데…….”
“말을 잘못 해요?”
과장은 뭐라 말하려고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손을 저었다.
“그런 게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신재현 팀장님 편을 들게 돼서.”
과장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한 사정을 생략했다.
내가 오는 걸 반대했던 사람이 내 편을 들었다니 뭔가 엄청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근데 딱 국세청장님 이름으로 공문이 내려왔어요. 임시 파견의 형태로 두 분을 제주세무서 소속으로 한다고. 그 공문이 도착하고 서장실이 발칵 뒤집혔는데 직후에 민치호 청장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렇군요.”
민치호가 직접 나섰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과장은 설명을 시작했다.
“정말 사람 혼을 쏙 빼놓는 재주가 있는 분이에요. 신재현 팀장은 자신이 키운 사람 중에 한 손에 꼽을만하다. 빌려줄 테니 마음껏 써라. 그가 있는 한 외부의 압박이나 부당한 처사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굽히지 않는 성정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도 돌아가는 놈이니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감탄했다.
이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을 짚어주면서 달랜다.
그리고 마치 내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처럼 상황을 만들어 놨다.
“우리 과 직원들이 사실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어렵고 골치 아픈데 자칫 실수라도 했다간 엄청난 역풍을 맞을 테니까. 그런데 거기서 실제로 국회의원과 장관 모가지를 날려 버린 신재현 팀장님이 온다고 하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여기 있다고 해도 서울에서 일어난 일은 전해 들었으니까요. 거의 전설이 눈앞에 나타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눈앞에서 금칠을 해 주니 얼굴이 근질거렸다.
과장은 머쓱해 하는 나를 보더니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이보다 더한 얘기도 들었을 사람이 이거에 부끄러워해요? 거참, 풋내기인지 노련한 건지 모르겠네.”
“저는 일만 하는 것뿐이니까요. 어느 순간부터 이런 평가가 따라붙으니 민망합니다. 그래서, 과장님은 이제 반대하지 않으십니까?”
“일이 이렇게 됐는데 반대는요. 오히려 저도 고맙습니다. 귀찮은 일에 앞장서서 끼어들어 줘서. 사실 그날 하산하고 집에 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깟 자존심, 그깟 관할이 뭐가 중요하냐. 같이 하면 천군만마일 텐데.”
우리는 계단을 타고 3층으로 내려갔다.
서장실이 보였다.
“그런고로 탈세 조사하는 데만 온 신경을 쓰시면 됩니다. 우리는 같은 편이에요.”
“감사합니다.”
바라던 바다.
어느 정도 내가 부딪치며 마음을 돌릴 생각도 했는데 민치호가 이미 완벽한 무대를 마련해 두었다.
-달칵.
송 과장이 서장실을 열고 들어가자 눈부신 햇빛과 함께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서장이 보였다.
“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어서 와요.”
서장실에는 반갑게 맞이하는 서장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색 없는 시커먼 정장에 넥타이도 하지 않은 남자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딱 봐도 내 방문을 환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할 순 없지.
다만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앞으로 함께 일할 관계자라는 뜻이다.
내 시선을 느낀 서장이 그를 소개했다.
“아, 이쪽은 하정태 조사과장이에요. 이번 항해의 선장을 맡으실 겁니다.”
한마디로 대장이며 지휘권자라는 뜻이다.
나는 정중하지만 비굴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뭐든 도움이 되겠습니다.”
조사과장은 일단 인사를 받긴 했지만 여전히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도움이라.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중간에 낀 서장과 법인세과장이 헙, 하고 숨을 들이켜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답했다.
“뭐든 굴려주세요.”
“뭐든이라. 자신 있습니까?”
“지휘를 잡으신 건 과장님이십니다. 저를 어디에 쓰시든 따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효율을 얻을지는 과장님의 지휘력에 따라 다르겠지요.”
하라는 대로 해 주겠다, 그러나 너도 잘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뜻을 담아 말하며 씨익 웃자 과장이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저 얼굴에 떠오른 것을 옮긴다면 대충 이럴 것이다.
‘이놈 봐라?’
조사과장은 흠, 하고 잠시 나를 살펴보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카지노 다뤄봤어요?”
“아뇨.”
“당당하네요.”
경력 3년에 그런 걸 해 봤을 리가 없지.
의외로 경력이라는 것은 무시할 바가 못 된다.
내가 지금까지 경력을 뛰어넘는 실적은 낸 건 인정한다.
그렇다고 안 해 본 걸 해 봤다고 할 순 없지 않은가.
모르는 건 잘못이 아니다.
모르는데 배우려 하지 않는 게 잘못이지.
그래서 나는 당당할 수 있다.
“조금 공부해왔습니다.”
그 말에 조사과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서장과 법인세과장도 움찔했다.
순간 아차 했다.
내 설명이 부족했구나.
하긴, 내가 이런 얘기를 들으면 어이가 없어서 웃었을 것이다.
조사과장이 뭐라 퍼부으려다가 서장의 필사적인 만류에 도로 목구멍으로 삼키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는지 명확하게 보였다.
-여기가 학교인 줄 압니까! 공부 좀 해 왔다고 다예요? 당장 실전 투입해도 모자랄 판국에 뭐, 공부?
대충 이런 소리를 하려고 했겠지.
당장 오늘부터 세무조사를 위한 준비에 들어가야 하는데 멋모르는 놈이 와서 설친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경험이 없는 건 사실이기 때문에 뭐라 말하든 변명일 뿐이다.
언제나 그래왔듯 열심히, 잘 하는 수밖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했다.
서울청에서 내가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하면 기겁해서 말리기 일쑤였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고깝게 보고 있다.
그 눈빛이 굉장히 신선해서 웃음이 났다.
“그래요. 기대하겠습니다.”
말과는 정반대로 잔뜩 힘 빠진 목소리가 돌아 왔다.
***
“잘 하고 있으려나.”
자신의 책상에 앉아 홀로 최신 판례를 정리하던 이제학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저물어가는 노을이 테이블 위에 길게 꼬리를 드리웠다.
당장 어제만 해도 이 시간에는 두 명의 청년이 저 자리에 앉아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교수님, 부탁이 있습니다. 카지노 탈세에 대해 가르쳐 주세요.
처음 다짜고짜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을 땐 무슨 일인가 했다.
당장 며칠 후에 제주세무서 파견을 갈지도 모른다고 했을 땐 기겁했으며, 조사 내용이 카지노라고 했을 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여기 제주도까지 와서 어려운 길로 보내는 그의 윗선이 야속하기도 했고 어찌 보면 부럽기도 했다.
현지에 있는 사람을 바로 현지에 투입한다는 것은 그만큼 믿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제학은 둘을 빤히 쳐다보다 물었다.
-저한테서 배워도 됩니까?
-충분합니다. 법인세과 과장이셨고 현재 법인세를 가르치고 계시잖습니까. 법인세 쪽에 통달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알았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곧이어 납득했다.
서로 뒷조사를 끝낸 아주 훈훈한 사이다.
자신에게 배울만한 가치가 있으니 왔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천하의 신재현 팀장님을 가르칠 수 있다니 어디 가서 자랑해도 되겠습니다.
이제학은 허허 웃으며 수락했다.
단,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수강료, 승진, 기타 등등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한테 배웠으면서 어설프게 안 상태에서 실무 나가는 건 용납 못해요. 빡세게 할 겁니다.
두 청년은 바라던 바라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뜬금없게도 1:2 카지노 속성 강의가 시작되었다.
셋은 교육원 강의와 속성 과외를 병행하면서도 어느 한쪽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단 며칠 만에 이론에서부터 실무에 쓰이는 탈세 방법까지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었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제학은 재미를 느꼈다.
-아, 거기서 브로커가 낀다구요? 잠깐, 현금은 어떻게 운반합니까?
-아……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매출누락이 가능하군요.
-교수님, 이 경우엔 이중장부가 있지 않을까요?
-교수님이 주신 사례에서 제가 계산한 거랑 숫자가 맞지 않는데요. 어디서 틀린, 어? 아차, 관광진흥기금이 있었구나.
둘이 번갈아 가면서 질문하고 이제학은 대답했다.
지난 며칠간 쭉 그랬다.
시간이 부족해서 저녁 12시, 1시까지 공부하기도 했다.
피곤할 법도 했지만 셋의 눈에는 열기가 넘쳤다.
그리고 둘이 어떤 방식으로 그간 어려운 조사 건을 헤쳐왔는지도 알 수 있었다.
‘신재현은 말 그대로 괴물이야. 가르치면 척척 흡수하고. 그렇다고 천재는 아닌데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어떨 때는 딱 경력 3년짜리 같다 싶은 질문을 하다가도, 어떨 때는 날카로워서 깜짝 놀랄 때도 있고.’
문제 풀이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답을 내놓은 것처럼, 믿기지 않는 예리함을 보여 줄 때가 있었다.
반대로 황민우는 딱 그 나이대의 평범한 공무원 같았다.
다만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어린 상사를 모셔온 탓에 자신을 후 순위로 돌리는 것에 익숙했다.
한마디로 충성도가 높고 눈치가 빠르다는 것이다.
또한 참을성이 강하고 조용히 파고드는 경향이 강했다.
신재현보다 더 많이 겪어온 경험에 이런저런 성향이 합쳐지니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흡수해나갔다.
신재현이 예리한 통찰력으로 중간중간을 건너뛰어 이해해간다면, 황민우는 조금 느리지만 하나부터 순차적으로 익혀나갔다.
결과적으로 직관력은 신재현, 응용력은 황민우로 나뉘었다.
한 팀으로 묶으면 밸런스가 좋았다.
‘그래서 같은 팀인가?’
어느새 노을이 졌다.
새카만 밤의 장막이 시야를 가리기 전, 보랏빛의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이제학은 주홍빛도 아니고 암흑도 아닌 경계의 색을 응시했다.
제주도 한가운데에 우뚝 선 한라산, 그 너머 반대편에 제주세무서가 있다.
지금쯤 이미 퇴근을 했을까, 아니면 가자마자 야근일까.
어찌 되었건 크게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제학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테이블 한쪽에 쌓인 책으로 향했다.
신재현과 황민우가 참고삼아 보기 위해 뽑아 두었던 것인데 그 양이 상당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부족함은 없다. 그 둘은 알아서 잘 할 거야.’
이제학은 푸근하게 미소 지으며 제주세무서의 광경을 떠올렸다.
신재현을 보고 역시나, 하며 납득할지 뜨악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