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79화 (279/500)

279화. 등산길에 만난 손님 (2)

나는 손경진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조금 버릇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나에게 제주세무서에 나가라니 굉장히 뜬금없는 말 아닌가.

“뭘 그렇게 놀라.”

“놀란 게 아니라…….”

우리 둘만 있는 상황이라면 몰라도 세무서 과장 앞에서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내가 위아래 없이 대들었어도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이미 마무리된 상황에서 대드는 것은 당당한 것이 아니라 하극상일 뿐이다.

게다가 과장 앞에서 이유 없이 원장하고 싸워 봤자 국세청 간판에 먹칠하는 꼴이고.

“할 말 있는 표정인데. 그냥 물어봐. 짐작은 간다만.”

나는 최대한 예의바르게 보이도록 말을 골랐다.

“제 소속은 현재 교육원입니다. 제 마음대로 이탈할 수는 없습니다.”

“원장인 내가 허락하잖아.”

정말로 무슨 생각이지?

나 없는 사이에 뭘 하려고?

나는 조금 직설적으로 물었다.

“……저 떼 놓으시려구요?”

“불안하면 황민우 놓고 가든가.”

손경진이 좀 떨어져 서 있는 황민우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가 꾸벅 인사했다.

정말 미치겠군.

그냥 확 물어볼까?

내가 망설이고 있자 손경진이 툭 던지듯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 그냥 물어보라고.”

“제가 뭘 여쭐지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원장님, 이미 다 끝난 일 맞죠?”

“끝났지.”

생각보다 속 시원히 대답하네.

보통 응어리나 뒤끝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계속 의구심 어린 눈빛을 보내자 손경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네가 교육원에 없어도 상황이 귀에 들어오잖아. 그 정도 그물망은 깔아 둔 거 아냐?”

이미 짐작하고 있었나.

하긴, 그 역시 물밑작업 많이 해 본 사람이다.

가장 먼저 정보 수집부터 하는 법이니 내가 교육원 교수를 포섭한 건 짐작했을 것이다.

“네가 교육원에 있든 말든 이젠 상관없는 상황이잖아. 순수하게 너 보내는 게 맞아서 그래.”

우리를 지켜보던 과장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만 원장님, 너무 문제가 커지는 건 원치 않습니다. 저는 조언과 약간의 도움을 얻으려 했던 겁니다.”

과장이 쩔쩔매며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나는 더더욱 의아해졌다.

“과장님이 먼저 요청하신 게 아닌가 보네요.”

과장이 또 당황했다.

손경진에게 누가 될까 봐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손경진을 의심하고, 손경진을 속내를 보이지 않고, 과장은 그 사이에 껴서 당황하고 있다.

나는 결국 상황 정리를 시작했다.

“원장님은 제가 제주세무서로 가길 원하시는데 과장님은 아닌 것 같은데요. 먼저 두 분의 의논이 끝나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과장이 이때다 하고 거들었다.

“원장님, 신경 써 주신 것은 정말 감사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신재현 팀장님이 제주세무서에 나타나 봐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과장은 말이 끝나자마자 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신재현 팀장님. 표현이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비하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이해합니다. 어떤 상황인지 잘 알겠습니다.”

내가 덤덤히 대답하자 과장이 오히려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다.

제주세무서에 뭔가 까다로운 건이 생겼다.

자체적으로 해결하자니 걸리는 점이 있어서 손경진을 찾아왔다.

마침 예전에 상사로 모셨던 친분도 있고, 바로 몇 달 전까지 지방청장으로 근무하던 사람이다.

조언을 구해야겠는데 교육원이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시끄러우니 등산로에서 만나길 기다렸다는 것 아닌가.

과장이 듣고 싶었던 것은 조언뿐, 내가 가는 건 예상에도 없었던 듯하다.

하긴, 지금은 시기가 안 좋긴 하다.

남들은 다 내가 나대다가 좌천된 줄 안다.

물론 기사나 내부 상황을 듣고 대충 짐작하는 사람도 있지만 문제는 내가 외부인이라는 것이다.

제주세무서의 일에 아무 권한도 없는 내가 끼어든다는 것 자체가 욕먹기 딱 좋다.

제주세무서에 뭔가 일이 생긴 건 알겠다.

그래서 예전에 잠깐 상사로 모셨으며 나름 이런 일에 정통한 손경진을 찾아왔다는 뜻이겠지.

“교육원 문제는 원장님께서 잘 마무리하셨으니 앞으로는 편하게 교육원으로 오시면 됩니다. 오늘 얘기는 제가 끼어들기엔 부담스러우신 것 같으니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습니다. 나중에 한번 들르겠습니다.”

과장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손경진이 피식 웃으며 나를 붙잡았다.

“가긴 어딜 가. 내가 불렀는데.”

“원장님…….”

“자세히 설명해 줄게. 황민우도 불러와.”

“원장님!”

과장이 기겁했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 거리감을 두고 있었다.

혹시 뭐 걸리는 게 있나 싶어 머리 위를 확인해 봤는데 탈세는 아니다.

일단 명령이 떨어졌으니 황민우부터 불렀다.

적당히 인사를 나누자 손경진이 가볍게 툭 던졌다.

“카지노 탈세야.”

“흡!”

바로 반응이 온 것은 황민우에게서였다.

황민우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점점 거칠어지는 그의 숨소리만 들어도 이 건이 얼마나 심각하고 복잡한 건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원장님. 저 카지노 탈세는 다뤄 본 적 없습니다. 잘 몰라요.”

“제주세무서에도 잘 다뤄 본 사람 몇 없어. 송 과장이 한 번인가 두어 번 해 봤지, 아마?”

“두 번입니다. 서울에서 한 번, 영월세무서에서 한 번이요. 그나마도 영월에서는 중부지방국세청에서 세무조사 할 때 자료 넘긴 것밖에 없습니다.”

“거봐. 거기나 너나 상황은 비슷해. 가서 그냥 하면 돼.”

상황이 어느새 파견 쪽으로 흘러가자 과장이 기겁하며 다시 이야기를 원래 방향으로 다잡았다.

“원장님. 말씀드렸듯 분위기가 안 좋습니다.”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돼. 분위기, 눈치. 겨우 그런 걸로 적재적소에 사람을 못 쓴다는 게 말이 되나?”

합리성을 먼저 따지는 사람답다.

손경진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과장은 매우 난감해 보였다.

그런데 과거에 손경진 밑에 있었다면서 이렇게도 저 사람을 모르나?

손경진에게는 ‘분위기가 나쁩니다.’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낫지.

“그럼 반대로 원장님께서 말씀해 주세요. 제가 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제주세무서에는 절 환영하지 않을 텐데요. 제가 없어도 알아서 잘 하지 않겠습니까?”

“제일 큰 이유는 이거야. 네가 잘 들이받으니까. 카지노 건이면 금액도 클 거야. 몇 백 억이 왔다 갔다 했겠지. 거기에 뒤 구린 놈이 안 얽혀 있다는 보장이 있나? 적당히 얻어먹은 정치인이나 지역 유지 한둘은 있을 것 같은데.”

아, 이건 납득이 간다.

카지노 관련해서는 다뤄본 적이 없지만 뇌물이나 배임, 횡령은 내 전문이지.

정확히는 처먹은 놈들 쥐어 패는 게 내 전문이다.

“둘째로는 네 뒤에 있는 놈들 때문에. 카지노 탈세면 환치기에 외국 놈들까지 엮여서 복잡할 거야. 제주세무서 혼자 소화하긴 힘들어. 근데 너는 검찰청에도 아는 사람 있잖아. 협조 구하기도 쉽고.”

“이건 굳이 저 아니어도 될걸요. 본청에 보고 올라가면 그쪽에서 검찰에 얘기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셋째로는…….”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손경진은 내가 아닌 과장을 바라보았다.

“얘가 좀 잘해. 많이 잘해. 카지노 안 다뤄봤어도 금방 감 잡을 거야. 인재는 적재적소에 써먹어야지. 교육원에서 놀고 있으면 뭐 해. 월급 아깝게. 데려가면 쓸 만할 거야.”

“원장님…….”

과장이 이마를 짚었다.

나도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간 그렇게도 싸웠는데 나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후하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히 결정되는 게 아니니까요.”

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나야 그런 일이 있다면 당연히 가고 싶다.

하지만 당장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과장을 보니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원장님도 아시다시피 각자 절차라는 게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일단 위에 보고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가라, 마라 얘기가 있겠죠. 이거면 될까요?”

“위……? 위라면 어딜 말씀하시는 겁니까?”

과장이 손경진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위는 제주세무서장이나 손경진 정도인 것 같았다.

그래서 자꾸만 손경진에게 눈치를 보내고 있었다.

“얘가 말하는 위는 국세청장 오낙현하고 서울청장 민치호야.”

“……예에?”

과장이 까무러칠 듯 놀라며 주춤거렸다.

그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서장님 아니고요? 너, 너무 얘기가 커지는데요. 저는 그냥 원장님의 고언이면 족한데요.”

괜히 왔다 싶은 표정으로 과장이 연신 마른 입술을 핥았다.

나는 과장을 위로했다.

“위에서 허락하면 가겠다는 얘깁니다. 무작정 가는 것도 아니니 과장님께서 피해 보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제주세무서에서도 차라리 제가 가는 게 유리하지 않을까 싶네요. 얘기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상대하기 어려운 까다로운 놈 조사하는 데는 자신 있습니다.”

내 말에 손경진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미친놈.”

“……워, 원장님.”

과장이 혼이 쏙 빠진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은 표정이라 의아해졌다.

왜지? 걱정거리가 하나 줄어든 것 아닌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황민우도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이 얘기는 이만하면 됐고, 교육생들도 다 내려간 것 같으니까 우리도 슬슬 가자고. 그럼 송 과장, 조만간 연락할게.”

“예, 원장님…….”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등산로에 길게 늘어섰던 교육생의 행렬은 이미 저 멀리 삼거리 아래로 사라진 후였다.

그러고 보니 슬슬 배가 고프다.

우리가 갈림길을 지나치자 과장이 터덜터덜 쫓아오기 시작했다.

꽤 고민이 많은 모습이었다.

***

서울지방검찰청의 지현석은 요즘 매우 바빴다.

신재현과 함께 조사했던 건도 조사 마무리를 해야 하고 그 외에도 쌓인 건이 여럿이었다.

과세당국에서는 탈세와 배임, 횡령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서 넘기면 끝이지만 검사는 거기부터 시작이다.

기소해서 판결이 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신재현과 자신이 잠도 쪼개 야근하고 발품 팔아가며 잡은 건이다.

끝까지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당연했다.

“신재현 씨는 제주도에서 느긋하게 놀고 있겠지. 아, 부럽다.”

누가 들었다간 미쳤다고 할 만한 소리였다.

좌천당해 레일에서 튕겨 나간 사람이 부럽다니.

그러나 내막을 잘 알고 있는 지현석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신재현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가 할 일을 다 했다.

차고 넘칠 정도다.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아, 그래도 이건 좀 벅차다…… 힘들다, 죽겠다. 연차 내고 싶다.”

넥타이를 반쯤 풀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지현석이 중얼거렸다.

지현석 검사실에서 근무하던 사무관이 애써 못 들은 척했다.

-부우웅!

설상가상으로 핸드폰 액정에는 자신이 모시는 상사의 이름이 떠 있었다.

서울서부지검 차장검사 송대희.

민치호의 친구이자 같은 길을 걷는 동료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전화가 올 때는 항상 ‘일’이 생겼다.

“예, 차장님.”

-서울지방국세청에서 연락이 왔다.

“신재현 씨 복귀한답니까?”

-그건 아니고. 복귀하기 전에 판을 좀 깔자는데.

지현석은 단숨에 잠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벌써? 좀 빠르지 않나? 아니 그보다 판을 어떻게 짤 생각이길래 검찰이 필요하지? 이쪽은 아직 바쁜데 국세청 쪽에서는 준비가 끝난 건가? 아니, 총선 생각하면 시간이 없긴 하구나. 빠듯하네.’

순식간에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단 두 마디였다.

“준비하겠습니다. 상세하게 알려 주십시오.”

-오늘 저녁. 한식 먹을래, 회 먹을래?

“회요.”

-그래. 항상 보던 데서 보자.

전화를 끊자 지현석 검사실에서 함께 자료를 훑던 수사관이 미소와 함께 말을 걸었다.

“그렇게 기쁘십니까?”

“아, 티가 났어요?”

“아까까지만 해도 지겨워서 뛰쳐나가려 하시던 분이 생기가 넘치십니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하하, 얼른 신재현 씨도 서울로 불러들여서 고생시켜야 하지 않겠어요? 혼자만 노는 건 반칙이죠.”

“곧 올라오시는 거군요.”

“국세청 쪽에서 뭘 준비하나 봅니다. 저쪽은 단계적으로 잘 밟아 가네요. 우리도 분발해야겠어요.”

저녁때 차장검사와 밥 먹으러 나가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골무를 낀 지현석의 손가락이 바빠졌다.

얼굴에는 기대 어린 미소를 띤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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