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등산길에 만난 손님 (1)
제주도 한라산 둘레길.
산의 외곽으로 펼쳐진 야트막한 등산로를 100명가량의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20대에서 30대 사이였으며 간간이 50대도 섞여 있었다.
양옆으로 우거진 숲에서는 청량한 풀내음이 났다.
관광지이기도 한 동백길은 등산보다는 산책길에 가깝도록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삼삼오오 짝지어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국세공무원교육원의 사람들이었다.
교육생 중 아픈 사람 몇을 뺀 전원이 참석했고 직원과 교수진 중에서도 반 정도가 참석했다.
동기간의 친분과 결속을 다지기 위한 명목으로 꼭 한 번은 하는 행사였는데 오늘 이 등산에는 특이하게도 손경진이 끼어 있었다.
손경진.
전직 중부지방청장이자 현직 교육원장.
그는 저번 주에 국세청장이 다녀간 이후로 평소대로 돌아왔다.
밀린 결재는 야근까지 해 가며 해치웠고, 결정사항이 있으면 자세한 보고를 들어가며 도장을 찍었다.
원장의 이름으로 행하던 예외적 조치는 모두 취소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있던 특강을 빙자한 훈화도 없어졌다.
직원과 교육생들 모두 환호한 것은 물론이다.
놀랍게도 교육원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손경진은 명색이 중부청장이었던 지휘력을 맘껏 발휘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거느리던 규모에 비하면 교육원쯤은 별것 아니다.
다만 놀라운 것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릴 것처럼 굴었던 손경진이 굉장히 열정적으로 운영에 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일전에는 교육원을 망치고 누군가를 괴롭히는 데에 힘을 쏟아 부었다면 지금은 교육원다운 교육원을 만드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오늘 등산에 손경진이 끼어든 것도 윗사람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워, 원장님도 가신다고요?
-뭐가 이상한가? 교육생들은 힘들게 산행 보내놓고 윗대가리는 드러누워서 쉬고 있으면 좋은 소리 못 들어. 같이 고생해야지.
-그, 그럼 저희도.
-직원들은 가고 싶은 사람만 가라고 해.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가면 업무 효율성만 나빠질 뿐이야. 사람마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다른데. 교육생도 아픈 사람은 쉬라고 해. 대신 참석하면 가산점 있다고 하고. 단합 때문에 가는 거라 교육생은 어쩔 수 없어.
손경진은 지극히 합리적으로 판단했다.
덕분에 교육생들은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스트레스 받을 요소가 줄어드니 걸으면서도 잡담이 절로 나왔다.
“저번 주에 청장님 왔다 가셨다면서요? 아쉽다.”
“그러게요. 그때 딱 봤어야 하는 건데!”
이들이 발령 나면 국세청장 얼굴 보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행사가 있다면야 가능하겠지만 그 전에는 본청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사람이니까.
청장에게 화제가 쏠리자 자연히 따라 나오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저 멀리 앞서 나가는 청년의 검은 뒤통수가 한들거렸다.
여기 있는 교육생들과 비슷한 나이지만 이들 모두를 휘어잡을 만한 경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
지난주 청장이 다녀간 이후로 그의 소문에는 한 가지가 더 더해졌다.
“국세청장님이 회 사주셨다면서요? 이야, 부럽다. 얼마나 능력 있어야 청장님한테서 회를 얻어먹을 수 있는 거지?”
신재현이 어머니를 모시고 황민우, 청장과 함께 밥을 먹은 건 주말에 바로 소문이 퍼졌다.
황당하게도 소문의 원인은 두 팀장이었다.
손경진 원장의 손발 취급받는 그 팀장들 말이다.
그들은 손경진을 손절하기로 마음먹은 후 국세청장에게 어떻게든 엉겨 붙어 보려다가 실패했다.
그들이 지방청으로 복귀하려면 가장 빠른 방법이 청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장이 그 둘을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주인을 버리고 갈아타려는 놈들이라면 더더욱.
만사를 포기한 둘은 진창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렸는데, 그 과정에서 손경진과 청장 사이에 있었던 일이 그만 흘러나가고 만 것이다.
때문에 자세히는 모르더라도 그날의 일은 대강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기사에서 좌천이라고 했을 때도 저는 안 믿었어요.”
“진짜 좌천이면 국세청장님이 직접 내려와서 밥 사 줄 리가 없죠.”
“그냥 밥이 아니고 회라니까요? 누가 아무나 회를 사 주겠어요.”
“저는 국세청장님 아니어도 되니까 상사한테 회 한 번 얻어먹어 봤으면 좋겠네요. 크, 그게 바로 인정해 준다는 뜻 아니겠어요?”
민치호의 노림수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
신재현을 데리고 다닌 것만으로도 직원들에게는 눈에 띌 만한 사안이었다.
거기에 회까지 얻어먹었다?
원장과 청장이 밥을 먹은 것도 아니고 콕 짚어서 신재현과 나갔으니 당연히 이목이 집중될 만하다.
원장실에서 있었던 일이 어느 정도 까발려진 상황이라면 더더욱.
“근데 저는 솔직히 좀 무서워졌어요. 국세청도 다른 회사랑 다르지 않구나, 싶어서.”
“윗대가리들 싸움질하는 거야 어디든 안 그렇겠어요? 그래도 국세청 정도면 훌륭하지. 신재현 같은 사람이 멀쩡하게 다니잖아요.”
“하긴. 엄청 믿음직스럽긴 해요. 윗분들이 막 나가거나 하면 막아 주시겠죠?”
“7급인데도 저 정도니까 나중에 더 올라가면 아무도 못 건드릴 거예요.”
교육생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인지 마침 신재현이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치자 살짝 어색함이 담긴 미소를 생긋 지어보인 후 도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두 분이 지금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을까요? 막 세법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하는 중이겠죠?”
동경에 가득 찬 눈빛이 반짝이는 가운데 정작 장본인들은 손경진에 대한 이야기로 한창이었다.
“원장님이 무조건 쓰고 버리고 갈구는 사람은 아니었나 보네요.”
황민우는 누가 들을까 잔뜩 목소리를 낮췄다.
신재현은 의외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적이긴 했지만 명색이 국세청을 삼분하던 사람입니다. 민치호 국장, 오낙현 청장을 생각해 봤을 때 원장님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죠.”
오낙현은 그렇다 쳐도 민치호는 판을 짜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그런 민치호와 몇 년 간 물밑에서 싸워 왔다면 손경진 역시 그만한 능력은 있다는 뜻이다.
“그게 지금 좋은 쪽으로 발휘되는 것 같네요.”
“다 포기하신 것 같죠?”
“그렇죠. 말하자면 이 교육원을 영지로 삼으신 건데, 저 상태라면 적어도 여기만은 완벽하게 운영하실 겁니다.”
“걱정 없겠네요.”
황민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국세청장이 직접 와서 담판을 지었지만 내심 걱정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손경진은 정말 모든 걸 털어 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그토록 미워했던 신재현과 마주치면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
“합리적인 분이니까요. 끝난 일에 감정적으로 굴 사람이 아닙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본인이 합리적이네 어쩌네 해도 결국 다 같은 사람이에요. 감정 조절이 그렇게까지 가능한 사람이 있어요?”
“저도 좀 놀랐습니다. 저라면 절대 못 하거든요.”
“팀장님도 요즘엔 많이 느셨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말이죠?”
“그럼요. 예전에 어땠는지는 정말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 드리고 싶네요. 이번엔 어떤 막말이 날아갈까 조마조마한 제 심정도요.”
신재현이 머쓱하게 웃는 걸 보며 황민우는 생각했다.
‘경험이 부족한 건 보고 들으며 채워 넣으면 되는 거니까.’
확실히 민치호나 이선균,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면서 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재현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가끔 보면 청장과 어울리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러워 보일 때가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얘기에 맞게 높은 급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행동거지를 배우고 있는 것이리라.
“근데 왜 그때는 안 말리셨어요?”
“그때는 분노가 많아 보였거든요. 세상 모든 부당함과 혼자 싸우는 느낌? 그럴 땐 막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요. 다른 분들이 이래저래 뒷수습은 해 주는 것 같고, 그럼 선만 안 넘게 옆에서 보필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여러모로 폐를 끼쳤네요.”
신재현이 머리를 감싸 쥐며 끙끙댔다.
황민우가 신재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직 어리시니까요. 용산에 있을 적부터 못 참고 뛰쳐나가는 성격이신 건 이미 알았고요. 그러니 모시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각오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팀장님은 그렇게 날뛰시는 게 어울려요.”
“예, 예?”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눈치 보는 거 안 어울린다고요. 꽉 막힌 공무원 사회에 팀장님 같은 분 한 명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요? 그래서 안 막았습니다.”
황민우는 즐거운 듯 웃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럼요. 칭찬이죠.”
그 덕분에 여기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하고 황민우는 웃음기를 거뒀다.
진심을 섞은 말이긴 했지만 여기서 더 놀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제 좀 유해지려는데 정말 칭찬인 줄 알고 신나서 예전처럼 돌아가도 난감하고, 그렇다고 주눅 들면 더 곤란하니까.
“원장님께 많이 배우긴 했습니다. 속으로는 어떻든 겉으로는 저렇게 멀쩡하잖아요. 감탄스러워요.”
둘은 가볍게 주고받으며 잘 정돈된 등산로를 걸었다.
슬슬 찬바람이 불 시기인데도 한참 걷다 보니 땀이 흘렀다.
교육생들도 하나둘 지치기 시작했을 때 갈림길이 나왔다.
더 가면 동백길 끝까지 가지만, 중간에 하산할 수도 있는 삼거리다.
이 코스를 다 돌면 무려 13km라서 딱 여기까지만 돌기로 한 참이다.
먼저 갔던 원장이 삼거리에 서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미 원장과 알던 사이인 것처럼 한 남자가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팀장님, 누굴까요?”
“원장님 대하는 태도나 나이대를 봐서는 아랫사람 같은데요.”
“그럼 세무공무원일까요?”
“평생 공무원하신 분이니 제주도에도 아는 사람 하나쯤은 있으시겠죠.”
황민우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끝난 줄 알았는데 설마 또 다른 걸 꾸미시는 걸까요?”
신재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멍청한 분은 아닙니다. 또 뭔가 꾸밀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죠. 하지만 진짜 뭘 꾸밀 거면 이렇게 제 앞에서 만나진 않을 거예요. 계획단계부터 제 경계를 받을 텐데요.”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재현은 가만히 옆으로 비켜섰다.
딱히 숨은 건 아니라 고개만 돌리면 눈에 보인다.
하지만 원장의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의 거리였다.
“잠시 지켜보죠.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견제 효과는 될 테니까요.”
혹시라도 또 이상한 마음먹은 거라면 여기서 멈춰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둘이 길가에 멈춰 서자 교육생들이 하나둘 인사하며 지나쳐갔다.
그렇게 스무 명쯤 삼거리를 지났을 때였다.
“뭐야, 안 내려가? 그러면 잠깐 이리로 좀 와 봐.”
시야 끝에 어른거려서인지 손경진이 길 한쪽에 있던 신재현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언제 으르렁대며 싸웠냐는 듯 덤덤한 말투였다.
신재현 역시 어디까지나 상사를 대하는 공손한 자세로 답하며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원장님.”
손경진과 대화하던 중년 남자가 신재현을 보더니 움찔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둘이 한 자리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며칠 전 뉴스에 나온 기사와 국세청 내부 소문을 조합하면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기겁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둘은 아랑곳없이 대화를 나눴다.
“할 일 없지?”
“그렇습니다.”
“잘됐네.”
저번 주까지만 해도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던 사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친근한 대화였다.
마치 자기 부하직원처럼 마구 부려먹는 것도 그랬다.
“소개해 줄게. 이쪽은 신재현. 자세히 얘기 안 해도 알지?”
“예, 모를 수가 없죠. 제주도까지 명성이 자자한 신재현 팀장님 아닙니까. 반갑습니다.”
중년 남자가 먼저 오른손을 내밀었다.
신재현은 90도로 푹 고개를 숙이며 손을 마주 잡았다.
중년 남자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놈 보게? 젊은 나이에 팀장 달았다고 거만할 줄 알았는데 인사는 깍듯하네?’
남자가 슬그머니 손경진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쪽은 제주세무서 법인세과장이야. 예전에 어디였더라? 하여튼 어디 세무서에서 내 밑에 있었던 놈이야. 쓸 만해.”
“과찬이십니다, 원장님.”
그의 라인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손경진이 쓸 만하다고 할 정도면 꽤 괜찮은 사람일 것이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재현이 인사를 건네자 남자가 쑥쓰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더 영광입니다. 오늘 등산 오길 잘했네요. 교육원 일정에 등산 잡혀 있다길래 혹시나 하고 왔는데.”
남자의 말에 신재현의 눈이 번뜩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 미리 작정하고 만난 건가?’
신재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손경진이 덧붙였다.
“송 과장이 나 만나러 온 건 맞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냐. 제주세무서에 일이 좀 생겼는데 보는 눈이 많아서 교육원에 오기가 어렵다잖아.”
손경진이 대놓고 말하자 중년 남자가 뜨악했다.
보는 눈이라 함은 대표적으로 신재현 얘기였다.
원장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옛 부하직원이 방문한다는 건 시기상으로 안 좋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지야.”
“괜찮아. 얘는 거를 거 다 거르고 알아먹어.”
“그래도 원장님…….”
어쩔 줄 몰라 하는 중년 남자를 놔두고 손경진이 신재현에게 턱짓했다.
“제주세무서 갔다 와.”
진의는 무엇일까.
신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