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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망나니-277화 (277/500)

277화. 이만 끝냅시다

나는 내 바로 앞에 앉은 오낙현의 뒤통수에서 눈을 떼고 손경진을 바라보았다.

한 때는 둘도 없는 경쟁자이자 피 튀기게 싸웠던 사이.

지금은 승리자와 패배자.

긴 싸움을 끝내자는 말 자체가 승리 선언이나 다름없다.

지금 손경진의 심정이 어떠할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과연 손경진은 울컥한 듯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끝내자라…… 이미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원장님의 행동은 보니 다른 생각을 품고 계신 것 같아서요.”

전 청장끼리 나누는 대화 같지가 않았다.

사극에서 이런 비슷한 대사를 본 것 같은데.

누구 하나가 난을 일으켜 성공한 후, 상대 세력에게 포기를 종용하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공무원이라기보다 정치인에게 어울리는 대화였다.

“제주도로 가라고 해서 왔잖습니까. 12월까지 버틸 수도 있었습니다. 송별회도 없이 갑작스러운 인사 이동 명령에도 군말 않고 와드렸습니다. 더 이상 뭘 해 드려야 합니까?”

손경진의 얇고 길쭉한 얼굴에 날 선 말투가 더해지자 확실히 분위기가 금방 살벌해졌다.

물론 이 안에서 이 정도로 겁먹는 사람은 없었다.

“손경진 원장님께서 제게 서운한 점이 많으신 점 이해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시죠. 원장님이어도 그렇게 하셨을 것 아닙니까.”

“지금 약 올리는 겁니까?”

“현실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손경진 원장님께서는 앞으로 몇 년간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고 명예롭게 은퇴하시면 됩니다. 그 명예만큼은 제가 지켜드릴 거예요. 하지만 자꾸 원장님께서 딴 마음을 품으시면 제가 강경책을 쓸 수밖에 없잖습니까.”

“명예? 이미 그 명예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나는 이제 잃을 게 없다는 뜻이에요. 남은 건 이 원한을 푸는 건데요. 퇴직까지 내가 뭐 대단한 영향을 끼치진 못하더라도 청장님의 발목을 잡는 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떻습니까. 청장님이 귀찮아지실 것 같습니까? 임기 내내 신경 쓰일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제 성공인데요.”

얌전히 지낼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국세청 수장 자리를 다투던 사람 치고는 목표가 너무 쪼잔하게 변하지 않았나.

아니면 그만큼 오낙현이 미웠을 수도 있겠다.

하긴 나한테도 그렇게 치졸하게 한 걸 보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방청장 자리에 오르며 스케일이 커졌을 뿐.

“아까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원장님의 명예로운 은퇴를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 원장님을 불명예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본격적으로 협박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끝까지 가자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진흙탕 싸움으로 가면 누가 더 불리할 것 같습니까? 나야 말마따나 여기서 끝입니다. 은퇴하면 될 사람이에요. 반대로 청장님은 어떨까요. 이제는 청장님이야말로 몸을 사리셔야 하는 처지 아닙니까? 제가 은퇴하는 날까지 똥물 튀기면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내가 모르는 손경진이 보였다.

더럽다, 더럽다 말로만 들어봤다.

본인 입으로 물귀신처럼 끌어들여 먹칠하겠다는 말을 실제로 들으니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그러나 오낙현이 이런 전개를 예상 못했을 리가 없다.

과연 오낙현은 흐으음, 하고 팔걸이를 토도독 두드렸다.

머리를 굴릴 때 손가락을 두드리는 버릇은 여전했다.

“얻는 것은 없지만 원한 하나만으로 양쪽 다 죽는 싸움을 하시겠다? 뭐, 좋습니다. 그것이 원장님의 방식인 건 익히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앞으로 제가 뭘 할지를 알려드리죠.”

오낙현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제가 돌아가자마자 원장님의 징계가 전국적인 뉴스를 탈 겁니다. 5급 이상의 공무원은 징계도 차원이 다른 거 아시죠? 인사혁신처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얼굴 팔리고, 징계도 먹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사로 모시던 사람이 징계받는다고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나오면 참 좋아하겠네요, 그렇죠?”

오낙현은 아예 손경진의 자존심을 공략 포인트로 잡은 것 같았다.

이 기회에 완전히 기를 누르려는 오낙현과 끝까지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손경진.

우리는 둘의 대화를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앞으로 최소 몇 년간은 싸움 없이 하나가 되는 국세청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끝나지 않은 지리멸렬한 개싸움이 이어질 것인가.

불행하게도 국세청의 향방이 여기 두 명의 대화로 결정되려 하고 있었다.

“청장님은 안전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물론입니다. 예전의 대등했던 관계가 아니에요, 원장님. 가뜩이나 약점이 기자들에게 까발려져서 입지도 안 좋으신 분 아닙니까. 거기에 이번 교육원에서 있었던 일까지 겹치면 모든 시선이 원장님께 쏠리겠죠. 여의도에서는 신재현과 원장님을 거의 동급으로 싫어합니다. 신재현이 제주도 발령으로만 끝나서 꽤 불만이 크신데 국민 청원 때문에 꾹꾹 억누르고 계시거든요. 그 앞에 원장님을 던져주면 그들이 얼마나 좋아할까요?”

오낙현은 그답지 않게 능글맞은 말투로 에둘러 말했다.

직접 어떻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승자만 풍길 수 있는 여유가 느껴졌다.

이제 벽에 몰린 것은 손경진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청장님도 마냥 깨끗하게 살아온 건 아니실 텐데요.”

“원장님이 던지는 것은 계란에 불과합니다. 잠시 불쾌하겠지만 그뿐. 제겐 큰 타격이 없습니다. 반대로 원장님은 어떨까요? 여의도에서 떡밥을 물면 그때는 정말로 감당이 어려우실 텐데요. 지금은 옛날과 다릅니다. 어떤 해명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고 도와줄 사람도 없을 겁니다.”

오낙현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상상해 보세요. 국세청의 한 축을 담당하던 라인의 수장이 온갖 혐의를 뒤집어쓰고 징계위에 출두한다니. 기자들도 몰려들 것이고 온갖 헛소문도 나돌겠죠. 원장님의 전 부하들은 그 기사를 보고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 콧대 높던 중부청장이 이렇게까지 추락했다’라고.”

손경진의 얼굴이 시시 때때로 변화했다.

애써 무시하려는 듯 오낙현과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아예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다가 나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와락.

손경진이 오늘 보여준 것 중 가장 큰 표정 변화였다.

“원장님. 저는 기회를 드리려는 겁니다. 이제 원장님께 남은 건 함께 국세청을 삼분했던 그 명예 아닙니까. 명예를 지켜드리겠다는 것은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 신재현도 있으니까요. 이놈이 얼마나 살벌한지 아시죠?”

오낙현은 농담처럼 가볍게 얘기했지만 손경진은 바로 표정이 굳었다.

그가 잡아먹을 듯 나를 노려보았다.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청장급 인사 둘인데 느닷없이 원장과 나의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제가 원장님께 바라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조용히 은퇴하십시오. 쉬운 일이잖습니까.”

한참을 나와 눈싸움하던 손경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자리에 갈 수도 있었어. 네가 내 처지가 될 수도 있었어.”

잔뜩 긴장하면 목이 아플 때가 있다.

지금 손경진도 그런 듯했다.

아니면 화를 삭이느라 계속 이를 갈고 있었던지.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갈라져서 새어 나왔다.

존댓말도 이미 치워 버린 후였다.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뭔데. 청장 자리에 어울리는 건 나야. 냉철하고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사람. 너 같이 소심한 놈이 아니라.”

청장급 간의 대화 치고는 점점 급이 낮아지고 있었다.

“계급장 떼고 속 시원히 얘기해 보자 이겁니까? 좋죠.”

오낙현이 얼씨구나 하고 받았다.

곁눈질로 보니 손경진 뒤에 앉은 저쪽 팀장 둘은 어찌할 바를 몰라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자신이 모시던 상사가 이렇게 무너지면 혼란스러울 만하지.

하지만 나는 홀가분했다.

손경진이 마음속에 담았던 말까지 끄집어낸다는 것은 정말로 끝까지 몰렸다는 뜻이다.

조금만 힘을 주면 밀려 떨어질 것이다.

“오낙현, 정말 네 힘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해? 천만에. 청장을 만든 놈은 따로 있어. 너는 그저 그 앞에 우연히 서 있었을 뿐이야. 지나가는 기차에 네가 올라탄 것뿐이라고!”

“그래서?”

사람 열 받게 하는 치트키 같은 말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래봤자 너는 패배자야.

상대의 신경을 살살 긁고 있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이 유치하기 짝이 없다.

“네가 서울청장이었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신재현이 왔고, 그래서 네가 선택된 거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국세청장은 내 자리였어. 내 것이었다고!”

“그러니까 결론은 억울하다 이건가? 하긴, 끝맺음이 없긴 했지. 차라리 우리끼리 싸워서 누구 하나가 끝장난 거였으면 승복했을 텐데.”

결국 이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하나였다.

둘은 제대로 부딪히지 않았다.

민치호의 판에 놀아나 정신을 차려 보니 절벽인 기분이었을 것이다.

소모되지 않은 감정은 고스란히 남았고, 손경진은 불복했다.

오낙현도 그것을 알고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세상에는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하지. 오낙현, 너는 신재현과 민치호에게 선택받았을 뿐이야. 너 역시 그들 손에서 놀아나고 있는 거라고.”

“여기까지 와서도 이간질인가? 인재를 거두는 것도 그 사람의 능력이야. 너는 어떻지? 네 주위엔 어떤 사람이 있나? 네가 수십 년을 일궈 온 결과가 바로 저 둘 아닌가?”

손경진이 뭐라 외치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정말 우연이었다.

나는 계속 손경진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손경진은 이어서 자신의 뒤를 홱 돌아보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아까부터 잔뜩 흔들리던 눈동자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야, 신재현. 딱 하나만 묻자. 정말 나는 안 되는 거였나?”

팽팽하게 당겨진 실 같은 아슬아슬함이 느껴졌다.

내 말 한마디에 끊어질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이 대화가 끝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가, 심호흡과 함께 다잡았다.

그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끝내는 것이 맞다.

“두 분 중 한 분을 선택하라면 오낙현 청장님이십니다.”

-핑.

손경진을 유지하고 있던 무언가가 잘려나갔다.

그는 하, 하고 숨을 내뱉더니 시선을 떨궜다.

“……다들 꺼져.”

끝났다.

오낙현도 그것을 느꼈는지 도로 존댓말로 돌아와 확인했다.

“여기서 조용히 지내시는 겁니다.”

“알았으니까 꺼지라고. 꼴도 보기 싫으니까. 앞으로 너는 두 번 다시 교육원에 발도 들이지 마. 최소한 여기는 내 관할이야. 다른 누구든 상관없지만 너만은 안 돼. 그게 내 조건이야.”

사실상 항복 선언이다.

동시에 손경진의 눈빛에 살기가 돌아왔다.

오낙현을 당장에라도 잡아 죽일 것처럼 기세가 등등했다.

오낙현은 아무 말 없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완벽한 승자가 되었음에도 승리 선언은 없었다.

대신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어느 때보다 묵직했다.

“여기 있는 동안 원장님을 잘 모시도록.”

이미 항복을 받아 두고도 못 믿는 걸까.

또다시 손경진의 감시를 부탁 받았다.

나는 대답 없이 손경진에게 고개를 숙인 후 원장실 밖으로 나가는 오낙현의 뒤를 따랐다.

“너희도 나가.”

“원장님.”

“쓸모없는 놈들. 여기 있어 봐야 아무 도움도 안 되니 꺼지라고!”

-와장창!

결국 손경진 손에서 던져진 핸드폰이 박살 났다.

팀장 둘이 헐레벌떡 원장실을 뛰쳐나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 문틈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손경진의 모습이 보였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순식간에 몇 년은 늙은 듯한 공허함이 감돌았다.

그를 채웠던 열기가 모조리 빠져나간 것 같았다.

쫓겨난 두 팀장이 복도에서 아예 대놓고 투덜거렸다.

“우리가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충신을 이렇게 대해도 되는 겁니까?”

“저러니까 천운이 따르지 않은 거예요!”

두 팀장은 은근슬쩍 오낙현에게 다가왔다.

이제 제주도에 남아 있을 필요도 없겠다, 다시 지방청으로 복직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들은 쓸개라도 빼줄 것처럼 간절한 얼굴로 오낙현에게 굽신거렸다.

지금이 아니면 붙잡을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간절해졌을 것이다.

덕분에 그들이 태세 전환은 더욱 추악해 보였다.

“청장님. 먼 길 오셨으니 저희가 괜찮은 곳 안내드려도 되겠습니까?”

오낙현은 대번에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주인이 쓸모없어졌다고 바로 갈아타는 꼬락서니라니. 오늘 내 수행은 이 둘이면 충분해.”

매몰차게 뒤를 도는 오낙현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보다 황민우가 빨랐다.

현장을 자주 뛰는 나와 하도 붙어 다녀서인지 이런 놈들을 차단하는 것은 굉장히 잘했다.

팀장들을 가로막은 황민우에게 나는 슬쩍 엄지를 치켜 올렸다.

“뭐 하나? 빨리 와. 제주도 왔으니 회는 먹고 가야 할 거 아냐. 어머니도 함께 오셨다고 했나? 모셔와. 이럴 때 같이 드셔야지.”

“네.”

벌써 오낙현은 복도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는 두 팀장을 남겨둔 채 우리는 서둘러 오낙현의 뒤를 따라 잡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손경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업무에 복귀했다.

교육원에 평화가 찾아오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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