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76화 (276/500)

276화. 뒷수습 (3)

검은 승용차는 부드럽게 정문을 통과해 본관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주차장은 저 아래에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이 차에 탄 사람에게는 해당이 없는 사항이었다.

-끼익.

승용차가 멈췄지만 차 안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오낙현이 잠깐 기다리라며 내리려는 신재현을 제지했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을 위해 수십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는 기막힌 광경이었지만 다들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국세 공무원의 정점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길들이기에 가까웠다.

청장이 나올 때까지 1층 로비에 모인 사람들은 끽소리도 못한 채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유일하게 오낙현의 행동을 탐탁지 않게 보는 사람이 있었다.

“내려도 되겠습니까?”

신재현의 질문에 오낙현이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석에서 내린 신재현이 재킷 단추를 잠그고 차를 빙 돌아 뒷문을 열었다.

때맞춰 황민우가 서둘러 뛰어나오더니 본관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린 오낙현은 느린 걸음으로 본관 문을 통과했다.

바로 뒤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신재현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민우는 둘이 로비로 들어설 때까지 깊이 고개를 숙인 채 들지 않았다.

신재현까지 로비에 발을 들이자 황민우가 소리도 없이 문을 닫고 뒤를 지켰다.

단순한 마중이었지만 신재현과 황민우 둘 다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본 티가 났다.

보통 어느 조직이든 수장의 뒤를 챙긴다는 것은 보통 정신으로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그만큼 정신적 압박감을 받는다.

스물여덟의 청년이 맡기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신재현의 평온한 얼굴을 본 직원들은 침음성을 삼켰다.

‘의외인데. 이런 자리가 어울리다니.’

나이에 전혀 맞지 않는 침착함이었다.

교수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의 발견이었다.

국세청의 수장인 청장 바로 뒤에 서 있다는 것이 이토록 잘 어울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원래 자신의 자리라는 듯 딱 맞는 느낌이었다.

-저벅.

오낙현이 1층 로비에 멈춰 서자 신재현이 한 발짝 뒤에서 손을 펼쳐 직원들을 가리켰다.

“소개 올리겠습니다. 왼쪽은 국세공무원 교육원의 교수님들, 오른쪽은 교육원에서 강의 지원을 맡는 직원 분들입니다.”

“……원장은 없군.”

오낙현의 말에 직원들이 움찔했다.

그러나 신재현은 뭐라 양쪽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손끝을 오낙현에게 향했다.

“오낙현 국세청장님이십니다.”

오낙현을 소개하는 데는 군더더기가 필요 없었다.

청장이라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으니까.

손경진이 직접 마중 나오지 않은 것 때문인지 교육원 식구들은 눈에 띄게 불안에 떨었다.

그것을 진정시키듯 신재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일부러 교육원까지 들러 주신 겁니다. 청장님께 환영 인사부터 드리도록 하죠.”

“헛!”

아무리 당황했다고는 하지만 감히 청장을 인사도 없이 로비에 세워 둔 것이다.

직원들이 당황하며 저마다 고개를 숙였다.

“쯧.”

오낙현이 작게 혀를 찼다.

불만족스럽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구심점 역할을 할 대표자가 없다 보니 다들 중구난방이 되어 보기 안 좋은 듯싶었다.

결국 신재현이 얕게 한숨을 내쉬더니 앞으로 나섰다.

-저벅.

그가 멈춰선 곳은 교육원 식구들과 오낙현 사이의 중간지점이었다.

청장을 향해 돌아선 신재현은 자세를 바로 하고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교육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청장님.”

신재현이 선창하자 그제야 교육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아까보다는 훨씬 정돈된 모습이었다.

“환영합니다!”

급조한 것 치고는 꽤 질서정연했다.

곧 죽어도 공무원이라 누군가 구심점만 맡아준다면 뭉치는 것은 잘 하는 사람들이었다.

수십 명의 우렁찬 외침에 로비가 웅웅 울렸다.

그러나 신재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끝난 줄 알고 빼꼼 고개를 들었던 몇몇 직원은 신재현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 도로 머리를 숙였다.

로비 안의 사람들을 쭉 둘러본 오낙현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시니 기쁩니다.”

오낙현이 인사를 받아 주자 그제야 신재현을 필두로 교육원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신재현이 옆으로 비켜서자 오낙현은 덕담을 건넸다.

언제 기를 잡으려 했냐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일부러 나와 저를 맞아주시니 고맙고 죄송스럽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인지라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번 방문은 공식 일정은 아닙니다. 신입 공무원들의 교육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여러분이 얼마나 고생하고 계시는지, 혹여라도 부족함은 없는지 제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온 것입니다.”

오낙현은 조금의 막힘도 없이 인사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 교육원은 공무원의 요람입니다. 그만큼 중요성은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여러분의 노고는 제가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국세인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예, 청장님!”

인사 겸 덕담은 짧고 굵게 끝났다.

연설자가 국세청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교육원 사람들이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공사다망하신 관계로 환영 인사는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모두 원래 업무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청장님은 제가 책임지고 모시겠습니다.”

교수와 직원들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길을 텄다.

신재현이 그 사이로 오낙현을 이끌었다.

“손경진 원장님께서는 원장실에 계실 겁니다. 청장님, 모시겠습니다.”

오낙현이 끄덕이자 신재현이 앞장섰다.

황민우까지 합쳐 셋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남아 있던 교수들은 숨을 돌렸다.

“어후, 분위기가 왜 이렇게 살벌하답니까? 언뜻 표정을 봐서는 괜찮았는데.”

한 교수의 말에 이제학이 지나가듯 말했다.

“원장님이 안 나오셨잖습니까. 세상에 회장님이 오셨는데 방에 틀어박혀 안 나오는 본부장이 어디 있답니까? 안 그래요?”

“일반 회사로 빗대서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그럼 오히려 짧게 끝난 건가?”

“우리를 배려해 주신 거겠죠. 아까 공적인 방문이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이제 인사 했으니 다른 일정에 우릴 부르지 않겠다는 뜻이니까요.”

“그럼 이제는 사적인 볼일이라는 겁니까? 원장님 만나는 건데?”

“원장님을 만나니까 사적인 볼일이겠죠.”

그 어느 때보다도 사적인 만남이 아닐까, 하고 이제학은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학과 잡담을 나누던 교수는 저 멀리 구석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이 교육원에서 노골적으로 신재현을 싫어하는 티를 내던 홍대안 교수였다.

“어? 홍 교수님이시네요. 며칠 동안 코빼기도 안 비치시더니.”

기자 견학이 있었던 이후로 그는 식당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강의도 시원찮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쯧쯧. 그러게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되는 건데 말이에요.”

“뭐, 본인의 생각이 그러셨던 건데 어쩌겠습니까. 이제 강의에만 집중하시면 되겠네요.”

-번뜩.

대화가 들린 건지 시선을 느낀 건지 홍대안이 눈을 부릅뜨며 이제학을 노려보았다.

예전의 총명함보다는 노기에 잔뜩 찌든 눈빛이었다.

이제학은 코웃음을 치며 그 눈빛을 떨쳐 냈다.

“교육원은 학생들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해야죠. 안 그렇습니까, 교수님?”

시선은 홍대안에게 고정했지만 질문은 옆에 있던 교수에게 향한 것이었다.

교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홍대안은 잠시 이제학을 노려보다가 곧 힘없이 고개를 돌리고 계단을 올랐다.

***

손경진은 원장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그랬다.

푸른 하늘 아래에 펼쳐진 초록빛 바다.

하루 종일 지겹지도 않은지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결재 서류가 쌓여 있었지만 처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거 정말 맛이 간 거 아냐? 대체 뭘 저렇게 보고 있는 거야.’

‘천하의 손경진이 저렇게까지…….’

손경진의 손발이라 할 수 있는 두 팀장은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온 것은 약 30분 전.

오낙현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경쟁 관계이긴 했지만 그래도 청장이니 인사라도 나가지 않으면 무슨 시빗거리가 생길지 모른다.

그래서 손경진이 최소한 마중은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오낙현의 도착 예정시간이 지나도록 손경진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재촉해도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바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바다가 아닐지도 모른다.

저 멀리 자신이 근무했던 중부청의 집무실, 그리고 자신이 입성할 것이라 믿었던 국세청장의 자리.

손에 움켜쥘 수 있었던 찬란한 미래와 과거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손경진으로서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겠으나 두 팀장에게는 답답한 일이었다.

‘지금 저러고 계실 때가 아닌데 왜 안 움직이는 거야.’

두 팀장도 처음에는 초조했으나 이제는 이내 담담해졌다.

어느 정도 포기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들도 알고는 있었다.

이제 손경진에게 미래는 없다는 걸.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가를 때 손경진이 문득 입을 열었다.

“너희 둘 생각이 궁금한데.”

이제껏 두 팀장에게 의견을 물은 적이 없었기에 둘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 은퇴 전에 육지 땅을 밟을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나?”

제주도에 갇힌 건 아니니 당연히 밟을 수 있다.

하지만 손경진이 말하는 건 그것이 아니었다.

국세청장, 하다못해 지방청장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

교육원에서 은퇴해야 하는가.

그 가능성을 묻고 있는 것이다.

“…….”

“그건…….”

그들에게도 손경진이 복권할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손경진이 의견까지 물어봤는데 둘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안쓰러움과 미안함에 두 팀장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잠시 기다리던 손경진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너희에게 그런 계획이 있을 리가.”

“워, 원장님…….”

상황이 이렇게 되어도 취급은 여전했다.

잠깐 들었던 미안한 마음조차 사라져 버릴 지경이었다.

울컥한 팀장 하나가 뭐라 말하려 할 때, 누군가 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며칠째 결재에서도 손 놓은 원장을 찾아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두 팀장은 소파에서 일어나 한쪽에 섰다.

들어오라는 대답이 없었는데도 문이 벌컥 열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신재현의 얼굴이었다.

‘저, 저 싸가지 없는 놈! 저번에도 그러더니!’

팀장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드러낼 수는 없었다.

신재현이 문을 열고 비켜서자 바로 뒤에 국세청장 오낙현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오낙현은 적막하고 특별할 것 없는 집무실을 둘러보더니 피식 웃었다.

승자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였다.

바로 뒤에 신재현과 황민우가 따라 들어오자 팀장이 나섰다.

“신재현 씨, 황민우 씨. 두 분은 나가 계시죠.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청장님께서 제주도에 계시는 동안 불편함 없이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거랑 이거는 다른 얘깁니다. 나가 계세요.”

서로 조금도 지지 않으려는 팽팽한 기 싸움이 이어졌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7급한테 밀릴 순 없지.’

그러나 팀장의 힘겨루기는 끝판왕의 말 한마디에 깨져 버렸다.

“그러는 자네는 뭔데 내 보좌에 명령인가? 내가 보기엔 여기서 나가야 할 사람은 자네 같은데.”

이 자리에서 현 국세청장에게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팀장이 얼굴을 구기자 손경진이 삐걱거리며 의자를 돌렸다.

“그쯤 하시죠. 부하들 면박 주며 기 싸움 하는 거 이젠 의미 없잖습니까.”

손경진의 눈빛에서는 독기가 많이 빠져 있었다.

대신 지친 듯한 나른함이 뚝뚝 묻어났다.

“무슨 얘기 할지 대충 짐작은 갑니다만. 얼른 얘기하시고 돌아가 주시죠.”

“뭐, 그렇게 합시다.”

오낙현은 자신이 주인인 양 소파에 털썩 걸터앉았고 손경진은 터덜터덜 걸어와 그 건너편에 앉았다.

둘 중 누구도 상석이라 할 수 있는 1인석에는 앉지 않았다.

서로 대등하게 대화하겠다는 뜻이었다.

두 팀장은 손경진 뒤에, 신재현과 황민우는 오낙현 뒤에.

각자 자리를 잡자 오낙현이 용건을 꺼냈다.

“길고 길었던 싸움을 끝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종전의 요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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