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뒷수습 (2)
신재현이 민치호에게서 갑작스러운 청장 방문의 소식을 통보받고 있을 때, 강혜원 역시 기사를 읽고 있었다.
-도르륵
스마트폰이 글자와 함께 사진을 뱉어 냈다.
익숙한 얼굴의 청년이 강의실에서 손경진과 대치하고 있었다.
사진 자체는 뒤에서 찍었는지 교육생들의 뒤통수와 복도 창을 통해 구경하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도 깨알 같이 보였다.
그렇게 강의실 전경을 찍은 사진이 나온 후, 그 아래에는 신재현과 손경진만 줌인해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강혜원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휴우~ 우리 팀장님은 여전하시네. 이거 업무 중일 때의 얼굴이잖아.”
2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해 왔기에 알았다.
하루 24시간 중 야근, 초과근무까지 포함하면 가족들과 보낸 시간보다 팀원끼리 함께 있던 시간이 훨씬 많다.
아마 다른 세무서에 있는 팀원들도 사진을 보자마자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뭐 보고 계세요?”
강혜원이 피식거리자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직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신재현 팀장님 기사 보시는구나.”
강혜원이 서인천 세무서에 온 후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강혜원을 견제하던 직원이었다.
같은 여성에 비슷한 나이대인지라 지금이야 친한 동료가 되었지만 첫 만남은 정말 최악이었다.
-강혜원 씨죠?
-제 이름을 어떻게…….
-유명인이잖아요. 신문에 이름도 나오고.
내용과는 달리 말투는 차가웠다.
물론 강혜원 역시 예상한 바였다.
신재현 팀이라는 것 자체로 이미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으니까.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게다가 나는 일개 팀원이니까.’
-강혜원 씨. 여기서는 조용히 계셨으면 좋겠네요. 괜히 다른 사람들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강혜원이 아니었다.
강혜원은 아예 첫날부터 직접적으로 물었다.
-절 왜 싫어하시죠?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신재현 팀은 다들 이랬다.
좋게 말하면 영향을 받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물들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대놓고 물으니 옆자리의 직원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걸 묻는 거예요?
-네. 저희 팀장님께 보고 배운 게 있어서요. 합당한 이유를 알려 주시면 싸가지를 다시 장착하든가 해 볼게요.
-뭐야. 그 팀은 팀원도 미쳤잖아.
여직원은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질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솔직히 그 팀은 신재현 원맨 팀 아닌가요? 신재현이 다 하는 거잖아요. 강혜원 씨는 그저 운이 좋아서 그 사람 눈에 띈 것뿐이죠. 안 그래요?
아, 하고 강혜원은 침음했다.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신재현 없이 팀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누굴 데려다 놓아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재현을 보필해 온 자신에게도 자부심은 있었다.
-뭐예요? 할 말 있으면 어디 해 봐요.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지레 겁먹은 직원이 쏘아붙였지만 강혜원은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라면 쉽네요. 저희 팀장님한테 먹칠하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뭐야, 진짜.
강혜원의 결론은 간단했다.
그동안 자신이 본 신재현을 따라 하는 것.
신재현은 3년도 안 되는 경력과 어린 나이로 청장 직속 특수팀 팀장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보면 낙하산이고, 초기에는 뒤에서 말도 많이 나왔다.
그럴 때 그는 결코 말로 해명하지 않았다.
모두들 꺼려하는 난감한 건을 스스로 맡았으며 군더더기 없이 처리해 냈다.
실력으로는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도록.
강혜원 역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음? 어째 제 담당 건이 하나같이 좀 그러네요?
-글쎄요. 불만 있으면 과장님한테 건의해 보시든가요.
옆자리 직원의 반응에서 이것이 괴롭히기의 일종임을 알았다.
왜인지는 모른다.
신재현이나 자신이 마음에 안 들었든지, 그동안 해결하기 난감해서 미루고 미뤄두었던 건을 마침 비정기 발령으로 뚝 떨어진 직원에게 미루기로 결정한 것인지.
-아뇨. 오히려 잘됐네요.
-진짜 미치겠네.
그 말을 끝으로 옆자리 직원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이해를 포기한 것이다.
강혜원은 그 후, 자신에게 할당된 건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고 복잡한 것만 골라 해치웠다.
약 열흘이 지나자 옆자리 직원이 슬그머니 말을 걸어왔다.
-괜히 사고 치지 말고 못하겠으면 미리미리 말해요. 가뜩이나 결재기한 가까운 거 많이 섞여 있을 텐데.
정말 걱정해서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만약 사고가 터졌을 경우 뒷수습을 걱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강혜원은 당당하게 답했다.
-이번 달 기한인 건 이미 다 결재 올렸는데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숫자가 몇 갠데 그걸 다 해요?
-확인하면 탄로 날 거짓말을 왜 해요?
-설마 대충해서 넘긴 건 아니죠?
-뒷수습을 어떻게 감당하려고요. 확인해보세요.
옆자리 직원뿐 아니라 같은 과 다른 조사관들까지 과장에게 달려갔다.
졸지에 직원들의 주목을 받게 된 과장은 강혜원의 것부터 먼저 결재를 열었다.
결과는 전부 통과였다.
-미친.
-하긴 내가 그럴 것 같았어. 괴물하고 일하는데 그냥 그런 실력으로 붙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인지 얌전히 자리에 돌아온 옆자리 직원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저 소리 듣겠다고 일부러 그 많은 걸 한 거예요? 호구예요? 그냥 못 한다고 하고 담당 재분배 해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평소 하던 거에 비하면 편안한데요. 보셔서 알겠지만 야근도 1시간밖에 안 했잖아요. 한 건 실패하면 지방청 전체가 날아갈까 봐 가슴 졸이지 않아도 되고. 저는 오히려 마음 편하게 했는데요?
-……진짜 그 팀은 대체 무슨 마굴이에요?
이 일 이후로 강혜원에게 힘든 건만 배당되는 일은 없었다.
암묵적으로 강혜원을 같은 과 일원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 후로는 옆자리 직원도 친하게 말을 걸어오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신재현 팀장님은 어딜 가든 주목받는 사람이네요.”
친해지고 나서 강혜원이 느낀 것이 있다.
이 직원은 신재현을 꽤 좋아했다.
첫날부터 자신에게 날을 세운 이유가 신재현 때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친해진 후에는 서울청에서 있었던 얘기를 들려달라며 조르는 것으로 보아 거의 확실했다.
“가까이 있으면 끌려가는 사람이죠.”
“저도 궁금하네요. 어떤 느낌인지. 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옆자리 직원은 기사에 뜬 사진을 가리켰다.
“글쎄요. 사진 보니까 많이 화나신 것 같아서 분위기가 꽤 살벌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응? 이게 화난 거예요? 되게 침착해 보이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화나면 얼굴에 티가 났는데, 몇 달 전부터는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우셨더라고요.”
“아…… 사회생활 익숙해지셨구나. 일이 엿 같아도 몇 년 구르다 보면 웃으면서 욕하는 법을 알게 되죠.”
“비슷하긴 한데 이거는 진짜 빡친 거예요. 어휴, 살벌했겠다.”
강혜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옆자리 직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으나 그녀로서는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그렇, 군요…….”
직원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강혜원은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느라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팀원들은 어떻게 하고 있으려나. 나랑 상황 비슷하겠지? 장세훈 조사관님이 욱해서 사고 치지 말아야 할 텐데.’
내려가자마자 기삿거리를 터뜨린 신재현보다 정작 다른 팀원의 안부가 걱정인 강혜원이었다.
***
국세청장 오낙현이 오기로 한 날.
나는 렌트한 차에 오낙현을 태우고 교육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민치호는 나에게 반드시 직접 오낙현 청장을 모시라고 말했다.
‘반드시’라는 말이 들어갈 정도면 뭔가 있다는 뜻이었다.
처음엔 무슨 뜻인가 긴가민가했는데 교육원으로 향하는 길에서 청장의 반응을 보고 감이 왔다.
“청장님, 시간은 많습니다. 이왕 오신 것, 중간에 어디 들릴까요?”
제주도에 온 후로 나름 관광명소에 대한 공부는 했다.
강의가 없는 날과 주말만 골라 어머니와 돌아다니다 보니 많이 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교육원 근처의 지리는 나름 꿰뚫었다고 자부한다.
“아냐. 옆으로 샐 것 없어. 바로 교육원으로 가지.”
오랜만에 보는 오낙현은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던가.
특유의 경계하는 듯한 분위기가 사그라들자 오낙현의 인상 자체가 확 바뀐 것처럼 보였다.
“교육원에 볼 게 있는데 다른 데를 왜 들르겠어.”
오낙현은 싱글벙글했다.
볼 게 있다라.
역시 오낙현은 손경진을 끝장내기 위해 온 것이 틀림없다.
“청장님. 오늘 혹시 교육원 많이 뒤집어집니까?”
“응? 그건 왜 물어보지?”
“교육원 교수님들과 직원들은 내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간 있었던 일만으로도 당혹스러울 텐데 지금 청장님까지 내방하신다고 해서 반쯤 넋이 나간 상태입니다. 그분들이 받아들일 한계치를 넘어서는 것 아닌가 싶어서요.”
갑작스럽게 통보된 국세청장 내방 소식에 교육원 사람들은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무려 국세청의 수장 아닌가.
하다못해 청소라도 해야 했고 환영 인사 준비도 해야 했다.
그런데 결정권을 가진 손경진은 원장실에 틀어박혀 버렸다.
일체의 결재를 거부한 채.
결국 또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직접 모시라고 일임받은 상황이기도 했다.
-미리 언질 받았습니다. 다른 건 다 생략하세요. 환영 인사만 하면 됩니다. 기자들 왔을 때처럼 강당에 모여서 뭐 하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애초에 준비할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오낙현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아마 도착하자마자 인사고 뭐고 바로 손경진한테 쳐들어가겠지.
그래서 손경진이 기자들에게 했던 것 비스무리한 행사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인사만 하자고 미리 얘기를 해 두었다.
지원팀에서 내 말을 받아들일지가 의문이었는데 의외로 직원들은 쉽게 승낙했다.
기자들의 견학을 수습한 이후 어쩐지 내가 결정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 있었다.
나야 편하긴 했지만.
“그래서 거창한 행사 같은 건 없습니다, 청장님. 불쾌하시더라도 너그럽게 봐 주십시오.”
룸미러로 넘겨다 보자 청장은 눈을 껌뻑이더니 이내 웃었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갑자기 온 내 잘못이긴 하지. 교육원 식구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서야 쓰나.”
청장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걱정 마. 내 용건은 딱 하나야. 손경진. 그놈 얼굴만 보면 돼.”
역시 목적은 그거였군.
내가 올린 보고서가 쓸만하긴 했나보다.
이렇게 내려왔다는 것 자체가 손경진을 침묵시킬 기회를 잡았다는 것이니.
이 상황은 내게도 나쁘지 않았다.
손경진 쪽만 정리되면 교육원은 금방 평화로워질 것이다.
“그럼 빠르게 모시겠습니다.”
나 역시 기분 좋게 액셀을 밟았다.
***
“곧 청장님 오신다고 합니다! 1층으로 모여 주세요!”
신재현이 제주공항으로 나선 후에는 황민우가 공지 역할을 맡았다.
여전히 손경진은 원장실에서 두문불출하는 상태였고 뭘 어떻게 하라는 지시는 일절 없었다.
황민우의 안내에 따라 1층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삼삼오오 뭉쳐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인사만 해도 되는 겁니까? 그래도 국세청장님이 교육원 방문하시는 건데.”
기자와 국세청장은 그 이름값부터가 다르다.
급작스럽게 방문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교육원 사람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며칠 전 기자들 견학 때문에 청장님이 긴급 시찰을 오신 것 아니냐는 소문이 있어요.”
“타이밍을 보면 그거밖에 설명이 안 되지요.”
“그러니까요! 기자들 맞을 때도 강당에서 따로 식순을 가졌는데 청장님 방문이면 더 거창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의전이 괜히 있는 게 아닌데.”
직원들은 눈치를 보듯 흘끔 무리 맨 앞에 선 황민우를 응시했다.
그는 신재현과의 연락을 위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원장님께 여쭤봤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 선생 얘기를 따르는 건 실수가 아니었나 싶네요.”
“하지만 청장님 지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오낙현 청장님이 서울청에 계실 때부터 모셨다고 하니 문제 되지 않게 잘 하겠지요.”
“허어, 너무 두 손 놓고 맡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원장이 없으면 그다음 실권자라도 맡아야 하는 법인데 일이 터지고 나니 누구도 총대를 메려 하지 않았다.
원장이 교육원 운영에서 손을 놔 버린 이상 더더욱 그랬다.
덕분에 한참 윗줄의 경력자들이 교육원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7급 공무원에게 실무를 맡기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단 두고 봅시다. 신 팀장이 이런 일을 많이 겪어 봤을 테니 믿어도 되겠죠.”
직원들이 짧게 한숨을 내쉬던 때,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황민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청장님 오십니다!”
저 멀리 교육원 입구에 차 한 대가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