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74화 (274/500)

274화. 뒷수습 (1)

세종시에 위치한 국세청 본청.

청장실에 두 명의 중년 남자가 마주보고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은 분명히 한 명이건만 둘 중 누구를 봐도 이 청장실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단순히 여유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둘 중 어느 누가 국세청장의 자리에 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둘에게서는 수장의 풍모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많이 여유로워 지셨습니다. 보기 좋네요.”

각진 얼굴에 험악한 인상의 50대 남자, 민치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인상 탓에 처음 보는 사람은 마주보지도 못한다는 그 민치호가 오늘은 어쩐지 한층 부드러웠다.

건너편에 앉은 현 국세청의 수장, 오낙현은 소파에 편안히 등을 기대며 웃었다.

“그런가요? 민치호 청장님께서 좋은 소식을 들고 오시니 제가 한결 마음이 편해졌나 봅니다.”

오낙현은 기실 자기 안위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성격이었다.

한마디로 소심하다는 뜻이다.

그동안에는 민치호와 얘기할 때도 항상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그의 힘으로 수장 자리에 오른 것임에도 한동안은 민치호와 대화할 때 긴장한 기색을 내비치곤 했다.

그러던 그가 이렇게나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좋은 소식이라.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인데요.”

민치호 역시 허허 웃으며 편안하게 자세를 잡았다.

오낙현 국세청장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민치호가 더 이상 자신의 적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차기 청장의 자리는 민치호의 것이다.

그런 암묵적인 동맹을 통해 오낙현이 먼저 청장이 된 것이기도 했다.

오낙현으로서도 민치호를 내칠 필요가 없다.

이미 국세 공무원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동맹인 민치호가 후임으로 앉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민치호가 가져온 소식은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경계마저 풀 정도로 기분 좋은 것이었다.

“민치호 청장님께서 그렇게 깊게 안배하고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오낙현이 청장이 된 후에도 마음 한편에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제주도에 있는 손경진 원장 때문이었다.

청장이 된 오낙현은 체제를 정립하면서 가장 먼저 손경진이 재기할 수 없도록 손을 썼다.

손경진의 라인을 전국으로 흩어 버린 것은 민치호의 섬세한 밑그림이었지만 정기 발령까지 기다리지 않고 시간을 앞당긴 것은 오낙현의 요청 때문이었다.

정기 발령까지 얼마 안 되는 그 몇 달조차 기다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손톱 밑에 박힌 작은 거스러미.

오낙현에게는 손경진이 바로 그것이었다.

“신재현을 제주도로 보내신 이유가 이거였습니까? 손경진을 사냥해 오다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민치호가 손경진을 가만 놔둘 리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대항마로 신재현을 선택했다고 했을 때는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기도 했다.

그렇다고 정말 신재현이 손경진을 잡아 올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기껏해야 견제, 또는 그의 계략을 미연에 방지하는 정도.

그런데 지금 이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는 해도 천하의 손경진을 잡아 내다니!

-사락.

오낙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뭉치를 훑었다.

[국세공무원교육원장 손경진의 공무원 품위 훼손에 대한 보고서]

거기에는 1급 공무원으로서 손경진이 저지른 실수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물론 치명적인 건 아니다.

평소의 손경진이라면 겨우 이런 걸로 타격을 입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이거면 충분했다.

손경진을 지켜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보아하니 손경진 원장님께서 거기서도 제 버릇이 나온 모양입니다. 이렇게까지 추락하다니. 쯧쯧.”

오낙현은 혀를 차면서도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눈엣가시 같던 손경진을 이렇게 빨리 침묵하게 만들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 당장 제주도로 날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손경진 앞에서 신재현과 악수라도 하면 그의 표정이 얼마나 보기 좋게 변할까.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이거면 어디까지 가능하시겠습니까?”

민치호가 확인 차 물었다.

“일단 가볍게 징계위원회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손경진, 그 양반 성격에 본청에서 징계위에 서는 것만으로도 온갖 자존심 다 구겨질 테니까요.”

그 결과로 해임이나 파면 같은 대단한 걸 원하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감봉만 나와도, 아니 본청에 소환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득이다.

손경진의 투지는 꺾이고 말 것이다.

그 후는 완전한 오낙현의 국세청이 되는 것이다.

민치호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다만 공짜로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오낙현에게 민치호가 찬물을 끼얹었다.

‘올 게 왔군.’

불쾌하진 않았다.

오히려 뭐라도 쥐여 주는 것이 마땅했으니까.

“물론입니다.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시죠.”

“내년, 새해가 밝자마자 신재현을 불러 올릴 겁니다.”

“벌써요?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텐데요.”

오낙현 역시 신재현이 정말 좌천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여의도에서 난리를 치기 전에 선수를 쳐서 그들을 달래기 위한 술수.

“시국이 잠잠해지면 부르겠지 생각은 했습니다만.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아직도 심심찮게 신재현이 실검에 오릅니다. 게다가 이번 손경진 건으로 제주도에 간 기자들이 신재현 관련 기사를 몇 개 써냈고요. 차라리 아예 총선 끝나고 잠잠해지면 부르시죠.”

민치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총선 전에 끌어올려야 해.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오낙현 청장님은 겁을 먹을 거다. 오히려 신재현을 데려오는 걸 방해할 수도 있어.’

민치호와 신재현의 목표는 거물들.

일을 도모하려면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눈치를 보고, 여론의 관심이 모이는 총선 전이 적기였다.

그러나 민치호 라인이 뭘 준비하는지 알면 오낙현은 분명 반대할 것이다.

지금 미리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민치호는 다른 이유를 둘러댔다.

“너무 잊혀도 곤란합니다. 저기 윗분들 중에 신재현을 적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에게서 신재현을 지켜주려면 저희 힘만으로는 힘들어요. 언론에서 잊히는 순간, 신재현은 한쪽 날개를 잃는 겁니다.”

오낙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생각하던 것이다.

민치호는 계속 설득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신재현에 대한 과열된 반응이 가라앉은 상태입니다. 사회면 랭킹 30개 중에서 신재현에 대한 기사는 4개에 불과하죠. 한 달 전에 29개가 신재현 기사였던 것에 비하면 많이 잠잠해진 겁니다.”

오낙현은 민치호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다.

“겨우 두 달 만에 복귀하면 윗분들이 가만있겠습니까?”

결국 오낙현이 신경 쓰는 것은 그것이었다.

자신에게 불똥이 튀어 손경진처럼 불명예스럽게 추락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답을 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안위에 대한 보장을 원하는 거다.’

민치호는 눈에 힘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일변했다.

“오낙현 청장님께서는 저와 한 배를 탔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정도 진실은 숨기면서도 믿음을 주는 말로 운을 떼었다.

“약간의 압박은 있을 겁니다. 아직 윗분들은 신재현의 이름을 잊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총선이 코앞입니다. 이쪽에 신경 쓸 겨를은 없을 겁니다. 조금만 버티시면 되는 일이에요.”

“압박이라…….”

“전임 국세청장의 지원사격도 있을 겁니다.”

“정상훈 전 청장님이 도와줄 거라 어떻게 확신합니까? 그야 같은 식구긴 했지만 그분도 야망 깊은 분이에요.”

“제가, 저희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오낙현이 바라는 그대로, 민치호의 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무심코 민치호의 계획에 동참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구체적인 방법은요?”

“아직은 틀을 잡는 과정입니다. 세 가지 정도 방안을 마련해 두었으니 상황을 봐서 가장 괜찮은 쪽으로 결정하겠습니다.”

“세 가지라…….”

오낙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동안 민치호, 그리고 신재현과 손을 잡아서 나쁜 적은 없었다.

비록 신재현이 직속으로 있을 때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를 지켜보느라 가슴 졸이긴 했지만, 지금껏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그 셋 중 가장 부작용이 없는 쪽으로 결정했으면 좋겠군요. 내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허락의 뜻이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청장님께서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민치호가 조건을 덧붙이자 오낙현이 미미하게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대단한 선물을 가져오긴 했지만, 수지가 너무 안 맞으면 저도 난감한데요.”

“이번 건은 오낙현 청장님께도 괜찮은 제안일 겁니다.”

민치호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청장님, 제주도에 한번 다녀오시죠.”

신재현 어깨에 힘 좀 실어주고 와라, 민치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낙현은 이렇게 알아들었다.

-밥상 차려 줬으니 마무리는 직접 하십시오. 손경진 꽉 누르고 오세요.

이미 비슷한 상상을 해 본 오낙현이다.

“이야,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 주시네요.”

오낙현이 군침을 삼켰다.

***

-전 중부청장의 막말 파동!

-“신재현처럼 날뛰지 말아라” 현 국세교육원장의 경고 논란

나는 손경진 관련 기사를 꼼꼼히 읽은 후 신문을 접었다.

일부러 편의점에 나가서 사 온 신문이다.

기사야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지만 나는 종이 신문 몇 면에 기사가 올랐는지 보고 싶었다.

교육원에 다녀간 기자는 열 명 남짓.

그들이 이번 사건의 중요도를 어떻게 보고 다루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는 제2면.

1면이 총선을 비롯한 정치권 기사니 나름 크게 다룬 셈이다.

며칠 전 교육원에 기자들이 온 날, 손경진과 그의 팀장들은 전혀 수습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기자들을 밖으로 불러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유난히도 담배가 그리워지던 날이었다.

-오늘 안 좋은 모습 많이 보여드렸네요.

내가 한숨을 섞어 그렇게 말하자 기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혹시 오늘 일을 기사로 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십니까?

-제가 그렇게 말하면 정말 안 쓰실 겁니까?

실제로 기사를 덮을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들이 현재의 나를 어떻게 봐주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자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들의 생각이 훤히 잡힐 듯 읽혔기 때문이다.

내게 호의를 보일 겸 빚을 지우겠다는 뜻이다.

내 가능성을 높게 점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거래였다.

언론과 연을 터두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굳이 이런 식으로 책잡힐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감히 언론에 손을 쓴다거나 그럴 생각 없습니다. 사실대로 쓰세요.

오히려 기자들이 놀랐다.

-있는 그대로 써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저도 한 말씀은 드리고 싶네요. 아시다시피 저희 국세청도 내부 사정은 꽤 복잡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단 한 번도 국세청의 존재 의의를 잃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세법에 따라 납세 의무를 돕는다. 앞으로도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제가 그런 일 없게 할 거예요.

-……이해했습니다.

기자들은 어쩐지 멍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정말 이해한 게 맞는지 긴가민가했는데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것 같다.

교육원을 공격하는 논조는 거의 없었다.

손경진의 막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기사의 대부분은 그의 자질을 의심하는 데에 글자 수를 할애했다.

이제 남은 건 본청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인데.

내가 보낸 보고서로 징계위까지 열릴지는 잘 모르겠다.

기사야 손경진을 작정하고 물어뜯고 있긴 한데, 말실수로 누를 수 있는 잔챙이가 아니라서 그렇다.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당장 민치호나 이선균에게 전화해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그러나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는가.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내게도 연락이 오겠지.

지금은 기다리면 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어서려는 순간,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핸드폰이 울렸다.

민치호 청장이다.

“예, 청장님.”

-바로 받네? 요즘 한가해?

말투만 봐서는 태만하다고 혼내는 것 같지만 이건 그 나름의 장난이었다.

“너무 한가해서 심심할 정도죠.”

-어허, 한 건 해 놓고도 몸이 찌뿌둥한가? 그럼 모레 시간 있나?

“모레뿐이겠습니까. 청장님이 원하시는 날은 항상 비어 있죠.”

-놀라고 보냈더니 기름칠 좀 했나 봐? 아부가 많이 늘었네.

“과찬이십니다.”

-허허. 그럼 모레 오후 2시까지 제주 공항으로 가.

“청장님, 설마 제주도 오시게요?”

-나 말고, 오낙현 국세청장님.

뜬금없이 국세청 수장의 출몰을 예고한 민치호는 당부를 덧붙였다.

-반드시 네가 직접 모셔. 오낙현 청장님이 제주도 계시는 내내 네가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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