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교육원 견학 (1)
2022년의 11월. 초겨울.
내륙 지방에는 하얀 눈이, 제주도에는 비가 내렸다.
누렇게 변해가던 잔디에 빗방울이 스미고, 먼지가 쌓여 뿌예진 간판이 오랜만에 원래의 빛을 되찾았다.
넓고 고즈넉한 교육원에 몇 대의 자동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추적거리는 빗줄기 속에서 내린 기자들이 장비 가방을 소중하게 안았다.
커다란 우산을 뒤집어쓴 이들은 웅장하게 늘어선 교육원의 건물들을 올려다보았다.
“어후, 정말 멀리도 있네요. 공항에서 정반대잖아.”
“관사에서 바다 보이겠는데요. 이야, 진짜 풍경 좋다.”
기자들은 넓은 부지를 바라보며 감탄에 잠겼다.
이들은 대부분 처음 교육원에 들어와 본 이들이었다.
“이런 데서 공부하면 살맛나겠네.”
“국세청이 워낙에 잘 공개를 안 해서요. 가장 최근에 공개한 게 2015년이던가.”
기자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삼삼오오 본관으로 향했다.
먼저 원장의 인사를 듣고 나서 교육관으로 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저희야 기삿거리 생기니까 좋긴 한데. 소중한 신입들이라고 잘 공개 안 하던 교육원을 왜 갑자기 떡하니 공개하셨을까.”
“글쎄요. 7년 전에도 자체적으로 영상 찍고 편집해서 자료만 기자들한테 돌렸던 거로 기억하는데. 이번엔 아예 문을 활짝 열어준 게 신기하긴 해요.”
“원장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니 분명 입김이 들어갔겠죠?”
안 하던 짓을 한다면 당연히 그 결정권자가 의심을 받는 것이다.
전적이 화려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기자들은 빗속을 걸으며 손경진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신임 교육원 원장이 손경진 전 중부청장이잖아요. 여기 계신 분들은 다 국세청에 빠삭하신 분들 아닙니까. 뭘 모르는 척하세요?”
“크흠…….”
기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대부분 경제 파트, 그중에서도 국세청과 기재부 관련 기사를 주로 쓰는 이들이었다.
서울지방국세청에서 무슨 사고만 터졌다 하면 기자들이 몰려가 1층 입구에서 진을 치는데, 이들은 서로 얼굴이 익었다.
서울청에서 하도 많이 마주쳐서다.
“그럼 들어가기 전에 우리끼리 얘기 좀 해보고 갑시다.”
기자들은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본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ㄱ자로 붙은 또 다른 건물이 있었는데 거기에 지붕이 붙은 현관이 보였다.
기자들은 본관 건물을 오른쪽으로 끼고 정면에 보이는 건물로 향했다.
가까이 가고 보니 매점이었다.
아직 한창 강의가 진행 중인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혹시 들어가면 교육생이나 교수들과 마주칠까 싶어 기자들은 현관 앞에 모였다.
빗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를 지워주고 있어 비밀스러운 대화를 하기엔 딱이었다.
“뭔가 일어나는 게 맞는 것 같죠?”
“여기 모인 면면을 보이면 뻔한 것 아닙니까.”
우산을 털던 기자 하나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여기 모인 여섯 명의 기자는 모두 손경진과 따로 인터뷰를 해본 적 있는 사람들이었다.
1:1 인터뷰는 나름 안면을 튼 사람만 가능하다.
그러니 이들은 손경진과 전화번호를 주고받을 정도의 친분 정도는 있다는 뜻이다.
“손경진 원장님이 뭔가 노리고 있는 건 확실하죠?”
“그렇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이들은 국세청 내부 사정에 빠삭했다.
네 명의 기자가 담배를 빼 물었다.
“손경진 원장 라인 다 잘려나간 거 아니었어요? 지금 청장이 가만 놔둘 사람이 아니라서 다 뿔뿔이 흩어졌다고 들었는데요.”
“뿔뿔이 흩어졌다 뿐입니까. 같은 라인은 절대 한 곳에 겹치지 못하게 세심하게 분배해서 발령 내 놨다고 합니다. 오낙현 청장하고 친한 기자한테 들었어요.”
“키야. 철저하네.”
“정리하는 속도도 엄청 빨라서 오낙현 청장 다시 봤습니다. 소리소문 없이 그렇게 조용하게 반대파 수장을 제주도로 보내버린 거 보세요. 기사 한 줄 안 떴잖아요.”
“에이, 그건 좀 잘못 알고 계시네.”
한 여자가 담배를 깊게 빨더니 그 끝으로 상대를 가리켰다.
시선이 단번에 쏠렸다.
“그거 민치호 청장 솜씨에요. 예전부터 판 깔고 멀리까지 내다보면서 수 놓는 건 대단했잖아요. 지금 청장에 대한 협력의 증표인지 뭔지, 안팎으로 구설수 안 나오게 세력 잘 해체해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분배했잖아요. 진짜 무서운 건 민치호라니까요.”
“근데 제가 좀 궁금한 거는 민치호가 사실상 손경진보다 아랫급 아닙니까. 지금이야 민치호가 득세하고 있지만 어떻게 라인을 해체해요?”
여기자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짙고 매캐한 연기가 비에 섞여 흩어졌다.
“그러니까 여러 복잡한 과정이 있었던 거죠. 손경진의 시선을 돌리고 힘을 빼고. 기회가 오니까 국세청장이 된 오낙현과 손잡고 싹 쳐 버린 겁니다. 물론 거기에는 신재현도 큰 몫을 했죠.”
“신재현이야 민치호의 칼로 유명하니까요. 그래도 손경진 축출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잖습니까. 손경진이 힘을 잃기 시작했을 때 신재현은 한창 자기 형 치느라 바쁘지 않았나요?”
“으이그, 국세청 전담 기자분이 이렇게 파악이 느려서야. 민치호는 신재현을 위해 판을 깔아 주고, 신재현은 민치호를 위해 양손에 칼 들고 날뛰고. 그것도 모르고 국세청 기사 쓰는 기자님도 계시나요?”
여기자의 면박에 남자가 무안한 얼굴을 했다.
“오낙현과 민치호가 정확히 뭘 했는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내부의 세력 간에 지각변동이 있었던 이상 겉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치열한 무언가가 오고 갔을 거예요.”
여기자의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알음알음 들었던 국세청 내부 얘기와 방금 여기자의 말을 조합해 보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한 남자가 문득 떠오른 듯 말을 꺼냈다.
“그럼 지금 우리를 부른 이유는 뭘까요? 다른 누구도 아닌 손경진입니다. 심심해서 불렀을 리가 없어요.”
일단 기자들은 부르길래 왔다.
별 사건이 없다 쳐도 모처럼 교육원 안을 둘러볼 기회였다.
그러다 신재현과의 인터뷰라도 따내면 더욱 좋고.
와도 손해는 없는 일이었지만 이들의 후각은 특종의 낌새를 잡아냈다.
“아! 여기 신재현 있잖아요!”
“네. 다들 알고 내려왔는데요. 그게 왜요?”
“아니! 둘이 반대파 아니에요? 민치호의 왼팔 신재현! 아까 그랬잖아요! 오낙현하고 민치호가 손잡고 손경진 깔끔하게 쳐낸 거라고!”
“아, 설마 그건가? 손경진이 신재현을 이용해서 민치호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그러나 다른 기자들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신재현도 같이 좌천된 처지인데요. 신재현 잡는다고 민치호가 잡힙니까?”
“왼팔이니까 민치호의 치부를 알고 있을 수도 있죠. 여기서 폭로전이라도 하면…….”
“그건 너무 나간 것 같네요. 신재현이 민치호 치부를 왜 까요?”
“……신재현도 어떻게 보면 버림받은 거잖아요. 손경진하고 손잡고 민치호의 치부를 깐다! 이야, 그러면 특종인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남자를 보며 다른 기자들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다른 분들 손경진 원장님한테 뭐 들은 거 없죠?”
“없습니다.”
“에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말씀 드렸죠.”
숨기는 것이 없는지 기자들은 매서운 눈빛으로 서로를 훑기 시작했다.
정보가 자산이다 보니 아마 각자 끝까지 숨긴 무언가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금 나눈 대화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신재현! 신재현을 찾아야 해!’
‘손경진하고 신재현이 교육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캐야 한다!’
손경진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흐르고 있었다.
손경진을 따라온 팀장 둘은 친하게 지냈던 기자들이 여전히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사를 써줄 거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이들은 손경진에 대해 의리를 지켜줄 생각이 없었다.
딱 한 명, 그간 손경진에게서 받아먹은 기사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했다.
‘그래도 정이 있으니 교육원에 대해서는 좋게 써 드리겠습니다, 원장님.’
그 기자마저 저 멀리 본관에 도착한 사람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게 누구야! 나학진 기자까지 왔네!”
기자들이 헐레벌떡 우산을 펼치며 나학진에게로 달렸다.
이미 손경진에 대한 것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지 오래였다.
“어어, 나 기자님! 오랜만입니다! 혹시 뭐 들은 거 있으신가요!”
“나 기자님! 신재현 씨하고 요즘에도 연락 하세요?”
기자들이 비를 헤치며 달려오자 나학진은 잠시 그들을 지켜보며 한마디를 남겼다.
“오늘 초청에 응해 오신 분들은 꽤 재밌는 걸 보실 겁니다.”
“나 기자님, 무슨 뜻이죠? 잠깐만 얘기 좀 해요!”
기자들이 헐레벌떡 뒤를 쫓았지만 나학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관으로 들어갔다.
***
기자들이 본관에서 두 팀장의 안내를 받는 동안 대강당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현재 수업 중인 교수와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직원 몇 명을 제외한 교육원의 모든 인원이 모였다.
신재현과 황민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맨 뒷자리에 앉아 분위기를 살폈다.
최근에는 일부러 본관에 찾아가지 않았지만 교수들의 분위기는 이제학을 통해 매일 전해 듣고 있었다.
“이번 원장님은 참 쓸데없는 일을 하시는군.”
“임기 내에 좋은 모습 보이고 싶은 건 어떤 분이든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교육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해야지요. 듣자 하니 며칠 전에 교육관에서 소동이 있었다고 하던데.”
교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뒷자리로 향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눈빛을 감출 줄을 몰랐다.
“신재현 선생도 참 너무해요. 아무리 불합리한 일이 있어도 상대는 원장님인데 아랫사람이 참을 줄을 알아야지.”
교수들의 여론은 대부분 이랬다.
신재현이 일방적으로 손경진에게 무언가 당한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이들은 손경진을 대놓고 욕하기보다는 신재현을 탓했다.
폐쇄적인 위계질서가 당연한 공무원 사회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든다는 것은 이들에게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들은 신재현이 어떤 사람인지 소문으로만 들은 탓이기도 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받는다는 것에 대한 내성이 없는 것이다.
“신 선생 얘기는 그만합시다. 젊은 사람이고 부당한 걸 못 참으니 그렇게 된 거겠지. 그보다 이건 언제 끝나나요? 마지막 달 보충자료 만들어야 하는데.”
교수들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불만을 표시했다.
“직원들이 나서서 가이드 해주면 되는 일 아닌가요? 어째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실까.”
“조금만 참읍시다. 그래도 원장님이신데 우리가 따라야지요.”
시간이 다가오자 문이 열리고 기자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무리에 섞여 따라 들어온 나학진은 행사에는 관심도 없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맨 뒷자리에 앉은 신재현을 발견하고는 더없이 환한 얼굴이 되었다.
나학진이 통로에 서서 정중하게 꾸벅 고개를 숙이자 신재현과 황민우도 마주 인사했다.
교수들이 술렁였다.
“아는 사람인가?”
“기자인가 봐요.”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먹이를 노리는 매와 같은 눈빛으로 나학진을 감시하던 기자들이 도로 우르르 몰려왔다.
“신재현 팀장님!”
“안녕하세요! 저 서울청에서 한 번 뵌 적 있으시죠!”
“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일전에 기자 회견하실 때 바로 제가 맨 앞에서 대표로 질문드렸었는데요. 기억나시나요?”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앉아 있던 교수들이 놀라서 입을 떡 벌릴 정도였다.
그러나 기자들은 인터뷰를 해달라느니 뭘 알려달라느니 들러붙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는 것처럼 일정 거리를 둔 채 열띤 인사 경쟁을 벌였다.
그 모습이 조금이라도 눈에 띄기 위해, 그러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안달 난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다른 교수나 직원은 안중에도 없었다.
“뭐, 뭐죠?”
“지금 제가 뭘 보는 겁니까?”
유력자를 대하는 것처럼 거리감 있게 인사하는 기자들을 보며 교수와 직원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런 대우는 7급 공무원이 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쯤 강당으로 오고 있을 원장쯤이나 되어야 받을까 말까 한 대우 아닌가.
“기자들이 잘못 본 거 아닌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펼쳐지다 보니 기자들의 실수 아니냐는 의문도 나왔다.
정작 장본인은 어떤가 하고 신재현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는 놀랍게도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담담하게 자리에 앉아 있던 신재현은 기자들의 인사가 일단락되자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 단추를 잠갔다.
그리고 정자세를 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인사였다.
순간 기자들이 약속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신재현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신재현 역시 익숙하게 입을 열었다.
“먼 곳까지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손경진 원장님께서 초청하셨죠? 마음마저 깨끗해지는 아름다운 제주도에서 신입 공무원들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지 잘 취재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신재현과 기자들의 대화는 더더욱 놀라웠다.
누가 주최자인지 헷갈릴 정도로 자연스럽게 덕담을 건네자 기자들이 또 당연하게 대답하는 게 아닌가.
교수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같은 공무원일 텐데, 자신들만 모르는 세계에 던져진 것 같았다.
“대체 왜…….”
혼란에 가득 찬 얼굴로 홍대안이 중얼거렸다.
그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있던 이제학은 왠지 모를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사람은 잘 봤네.’
이제학은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혼란으로 웅성거리는 가운데 유일하게 편안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