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마음을 돌릴 때는 진심으로 (3)
교육관 로비 1층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
강의실에 앉아 시험지를 두고 토론하던 교육생들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나온 것이다.
그들이 나오자마자 본 광경은 살벌했다.
손경진과 신재현.
세무공무원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누군지 안다는 사람들이다.
이제 막 세무서에 발을 내미는 교육생들 입장에서는 거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 둘이 서로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데 그 주위의 모습은 더 희한했다.
“저분은 교육지원과 팀장님 아닌가요? 옆에는 누구지?”
“교육기획과 교육운영팀장님이요. 우리 근태 관리하고 기자재 관리하는 팀 있잖아요.”
“아! 기자재 점검할 때 본 것 같네요. 근데 오늘 세 분이 교육관에는 무슨 일이시지?”
교육지원과의 지원 2팀장과 교육기획과의 교육운영팀장.
과도 다르고 팀도 다르다.
물론 과가 다르다고 해도 같은 교육원 내에서 일하고 있으니 서로 친할 수 있다.
교육관에 일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 셋이 동시에 있으니 조합이 꽤 이상했던 것이다.
교육생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눈에 알아채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신재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 방금 황민우 선생님 봤어요? 신재현 선생님한테 아무도 못 가게 막았는데.”
황민우는 곁다리로 따라온 게 맞지만 교육생들은 똑같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저 영화에서 저런 거 본 적 있어요.”
“저는 기사에서 봤는데요. 서울청 특수조사 2팀 얘기로 막 사회면, 정치면, 경제면 도배됐던 때 있잖아요. 그때 특수조사 2팀 일원에 대해 자세히 파헤친다! 그런 느낌의 기사가 있었는데…….”
“신재현의 그림자에 가렸지만 그들 또한 주목해 봄직 하다, 뭐 이런 거요?”
“그때 인상 깊었던 문구가 있어요. 신재현은 머리이며 4명의 직원은 손발이다. 2팀은 그렇게 하나의 유기체처럼 신재현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중에서도 황민우는 신재현의 충복으로 알려져 있다. 국세청 인물이라면 다들 아는 얘기다.”
“근데 그럼 두 팀장님들이 더 이상한데…… 황민우 선생님이야 그렇다 쳐요. 팀장님들도 약간 그런 느낌 들지 않아요? 말로 설명하긴 힘든데.”
“원장님이니까 팀장님들이 막아주는 거 아니에요? 신재현 선생님도 화가 많이 나신 것 같고.”
“음, 아뇨. 지금 이 구도, 제가 회사 다닐 때 꽤 봤습니다.”
교육생들이라고 바보는 아니었다.
다만 국세청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기에 여기에도 파벌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실감하지 못했을 뿐.
일반 회사를 다니다 온 사람들도 꽤 있었으니 이들의 관계에 대해 눈치를 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신재현이 힌트를 주듯 조금씩 기묘한 이야기를 뿌렸으니 호기심을 돋우는 데는 최상이었다.
그리고 온갖 이목이 몰린 순간, 신재현의 한마디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 싸움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들의 시험까지 망칠 만큼, 그런 가치가 있습니까? 원장님, 제주도에 내려오시면서 그 명석함과 날카로움은 전부 어디로 갔습니까!”
1층 로비뿐 아니라 2층까지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단순히 화를 낸다기보다는 무언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애절함을 담아낸 것처럼 들렸다.
그의 외침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감정은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생각해준 거 맞죠?”
“뭔가 있었던 거구나. 역시 그럼 그렇지. 신재현 선생님이 그럴 리가 없어. 이유가 있었던 거야.”
순식간에 여론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곧 죽어도 신재현이라며 기숙사 내에서도 팬으로 유명한 한 교육생은 교육원에서 친해진 옆 사람의 등을 마구 두드렸다.
“이거 봐봐.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신재현 선생님이 우릴 엿 먹일 리가 없지! 우리 편이라고!”
“그, 그래. 알았어. 잠깐만, 아악! 아프다고!”
분위기가 바뀌자 손경진은 주위를 스윽 둘러보았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이를 으득 갈며 뒤를 돌았다.
아예 무시하겠다는 투였다.
손경진이 빠른 걸음으로 교육관을 떠났지만 이번엔 신재현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얻을 것은 다 얻었기 때문이다.
신재현과 손경진 사이에 흐르던 살벌함이 사라지자 교육생들이 조금씩 목소리를 높였다.
그중에는 신기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원장님도 1급 아니에요? 방금 신재현 선생님이 하나도 안 지고 맞붙은 거 맞죠?”
“솔직히 두 분 사이에 무슨 일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관심도 없거든요. 근데 이건 진짜 신기하네요. 이게 일반 회사로 치면 주임급이 본부장하고 맞다이 깐 거 아닌가요?”
“공무원은 일반 회사보다 더 폐쇄적이고 위계질서 중시한다고 들었어요. 제가 방금 뭘 본 거죠?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
딱히 신재현의 팬이 아닌 사람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확실한 건, 저 정도는 되어야 장관이나 국회의원 하고도 맞붙을 수 있다는 거네요. 와, 저게 진짜 깡이구나.”
이상한 데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
원장실로 돌아온 손경진은 문이 닫히자마자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대리석 명패를 집어 들었다.
물리적으로 폭력을 쓴 적이 거의 없는 손경진이었다.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깔끔하게.
차라리 그 사람의 승진을 취소시키고 지방으로 발령시키는 등의 방법을 즐겨 쓰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난데없이 명패를 들고 다가오니 두 팀장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허억, 원장님!”
“고정하십시오!”
둘의 말은 손경진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
“고정?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예전 같았으면 너희 둘은 방금 이 자리에서 끝이야. 알아?”
그 말 또한 사실이었다.
두 팀장이 계획했고, 거기에 허술함이 있었다.
신재현의 숨통이 트였고 반등할 기회를 얻었다.
손경진이 원했던 것처럼 꽉꽉 눌러 바닥을 기게 만들지 못한 이상 이미 반은 실패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손경진은 실패한 자에게 관대하지 않다.
“나는 능력에 합당한 결과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이걸 용서하면 내가 뭐가 되겠어? 어?”
손경진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명패를 내리쳤다.
-퍼억!
일부러 급소를 피해 등과 옆구리를 때렸다고는 하나 아픈 건 매한가지였다.
팀장들의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흑, 원장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좀 더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확실하게? 나는 그런 두루뭉술한 표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 아직 정신을 덜 차렸나!”
“예, 예! 어차피 지금은 중간 과정일 뿐입니다! 기자들 앞에서 개망신을 주겠습니다!”
신음 섞인 팀장의 말에 손경진은 그제야 명패를 내려놓았다.
손경진이 소파에 앉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래도 팀장 둘은 차마 소파에 앉지 못하고 양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옆에 섰다.
손경진 역시 둘에게 앉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신재현 이놈이 약은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비상할 줄은 몰랐네.”
손경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말로 즐거워서 웃는다기보다는 비웃음과 자조에 가까웠다.
이때다 싶은 팀장이 잽싸게 들러붙어서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았다.
“신재현 그놈이 운 하나는 최고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음엔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기자는 일부러 저희와 친한 쪽으로 섭외해 뒀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쾅!
손경진이 발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두 팀장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팀장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아니면 내 화를 풀겠답시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주워섬기는 건가? 만약 말로만 하는 거면 재활용 가능성이라도 있지. 진심으로 말한 거라면 너희는 구제 불능의 쓰레기다.”
팀장들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무슨 소리를 해도 욕을 먹을 것 같아서다.
손경진은 두 팀장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신재현 그놈이 미리 알고 그 구도를 짰을까? 말해 봐. 내가 교육관에서 그놈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놈이 알았겠어?”
“모, 몰랐을 겁니다. 원장님께서도 즉흥적으로 결정하신 거니…….”
“그래. 그놈은 오늘 그런 일이 일어날 걸 몰랐어. 시험에 손을 쓴 것도, 내가 거기 있다는 것도.”
혹시 시험에 수를 썼다는 걸 안다 쳐도 거기에 손경진이 나타났다는 것은 알 수가 없다.
손경진은 그것에 주목했다.
“그놈은 교육생들의 반응을 보고 단숨에 무슨 상황인지 파악했어. 그리고 날 보자마자 어떻게 뒤집을지 떠올렸고.”
“설마요. 제가 보기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쉽게 흥분하는 애송이 같았습니다. 원장님께서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어떤 7급 공무원이 원장님께 대든답니까. 징계를 받아도 모자랄 사고입니다.”
“그게 정말 단순히 화가 나서 그 소란을 피운 것 같아? 지금 결과가 어떻게 됐지? 그건 절대 앞뒤 생각 없이 저지른 게 아냐. 그놈은 그 짧은 순간에 판단을 마친 거라고!”
손경진은 알 수 있었다.
예전에 신재현의 행보를 봤을 때부터 느낌이 왔다.
이놈은 만만히 볼 놈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팀장 둘이 알아서 잘 해주길 바랐는데 결국 첫 수를 실패하고 말았다.
“한심한 놈들.”
마음 같아서는 둘을 내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더 이상 손발이 없다.
교육원에서는 이 둘이면 차고 넘칠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이 실각하면서 유능한 놈들이 떠나간 것이 너무나도 아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신재현만 잡으면 이 멍청이들만 갖고도 교육원 정도는 휘어잡을 수 있지. 결국 신재현이 문제라는 거군…….’
손경진은 아쉬움에 연신 입맛을 다셨다.
신재현 같은 놈이 자신의 편에 있었다면.
‘그랬으면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아니라 오낙현이 있었겠지.’
손경진은 쓰게 웃었다.
‘이놈들이 신재현 판단력의 반만이라도 닮으면 좋겠는데.’
이제 남은 기회는 기자 초청뿐이다.
이 둘의 말에 의하면 판은 이미 다 깔아놨다고는 하는데 오늘 하는 짓을 보아하니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엔 믿을 수 있게 잘 처리해.”
“넵. 알겠습니다.”
손경진은 아랫사람의 눈치 따위는 살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두 팀장이 고개를 숙인 채 얼마나 수치심에 치를 떠는지 알지 못 했다.
***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마치고 나온 두 팀장은 문이 닫히자마자 몸서리를 쳤다.
둘이 나오는 그 순간까지 손경진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시야에 들일 가치도 없다는 뜻이다.
“너무하시네…….”
결국 참지 못한 팀장 하나가 불만을 터뜨렸다.
손경진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으로 여기까지 따라온 심복이지만 이런 취급은 도저히 참기 힘들었다.
“원장님 하나만 믿고 따라온 겁니다. 막말로 저희가 다른 사람들처럼 일선 세무서나 다른 청으로 갔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알아 모시라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면박 주실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하아…… 그러게나 말입니다. 청장이실 적의 버릇을 못 버리신 건지. 아니면 아직도 청장일 때처럼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여기가 중부청이었다면 두 팀장도 ‘또 시작이네’하고 참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안다.
손경진에게 남은 것은 자신들 둘 뿐이다.
예전이라면 이보다 더한 모멸도 참았을 것이나 지금은 달랐다.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불만이 봄날 새순처럼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러나 손경진을 따라 여기까지 온 이상 단번에 그를 저 버리긴 힘들었다.
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푸념했다.
“조금만 더 참아 봅시다. 신재현만 누르면 눈에 걸리적거리는 건 없어집니다. 그때는 은퇴까지 별다른 일이야 있겠습니까. 성격도 좀 유해지시겠지요.”
“이번 일만 끝나면 제발 평화로워졌으면 좋겠네요.”
이번 주 기자 초청까지만 버텨 보자.
끝이 보이면 희망이 생기는 법이다.
둘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각오는 산산이 흩어졌다.
“……이거 기자 출입명단 맞아요? 여기에 왜 그 기자 이름이 있어?”
“그, 그러게요. 원장님이 아시면…….”
팀장은 견학 오기로 한 기자의 명단을 보고 뒷말을 삼켰다.
-나학진.
신재현과의 창구로 유명한 기자의 이름이 떡하니 쓰여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