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69화 (269/500)

269화. 마음을 돌릴 때는 진심으로 (2)

내가 다음 수업을 위해 로비로 들어섰을 때, 교육관은 이미 혼돈의 도가니였다.

복도에 나와 서성이고 있던 학생들이 날 발견하자마자 우르르 1층으로 뛰어 내려올 정도였으니.

어떤 분위기인지는 저들 얼굴만 봐도 알 법했다.

학생들이 잔뜩 흥분해서 내게 따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변명하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지 대강 짐작은 가능했다.

내 입지를 좁히겠답시고 학생들을 이용해서 밑밥을 깔았겠지.

나는 손경진의 이런 점이 싫다.

나를 조질 거면 그냥 조지든가.

왜 엄한 사람 인생을 갈아 넣느냔 말이다.

일전에 아무 이유 없이 권현아를 쳐내겠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다.

아, 이유가 있긴 했다.

가장 이용해 먹기 좋은 위치였으며 내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기에 적절한 희생양이었으니까.

그러니 더 화가 나는 것이다.

겨우 그런 이유로, 손경진의 눈에 띄었다는 그 불운 하나만으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교육원에서의 성적이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건 아니라 해도, 굳이 이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는가?

이들 모두 저마다 귀한 시간과 돈을 들여 공부했다.

공무원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코피 흘려 가며 시험공부 하고, 마음 졸여 합격자 발표를 보고.

그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원장이란 놈의 계획에 휘말려 점수를 개판 낸다고?

나도 공부해서 공무원 된 사람이다.

“선생님, 대답이라도 좀 해주세요. 어떻게 된 거예요?”

“세무조사 실무가 정규 과목 맞아요? 시험 보는 거 맞아요?”

그래서 이들의 심정을 잘 안다.

내가 이들에게 변명하거나 왜 따지냐고 화내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선생님!”

가만히 이들의 성토를 듣고 있을 때, 위에서 찌릿한 시선이 느껴졌다.

교육생들과는 다르다.

날카로우면서도 진득한 불쾌감이 묻어 있는 시선이었다.

고개를 들자 이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이 난간에 기대어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본관에 있어야 할 원장이 굳이 교육관까지 행차하셨다.

이유는 바로 알았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교육생들의 분위기와 패배자가 된 나의 모습을.

1층의 혼란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손경진을 보자 오기가 생겼다.

오늘은 그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이 자리에서 패배자처럼 고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눈싸움이라면 지지 않는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노려보자 손경진이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선생님, 어딜 보시는 거예요?”

“제가 따지려는 건 아니고요. 그냥 설명만 해 주시면 되거든요…….”

내가 하도 가만히 듣기만 해서인지 교육생들도 어느 정도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하긴, 그들이 보기에는 나 역시 선배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눈에 뵈는 것 없이 따지고 들었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흥분이 가라앉으니 따지기 어려운 거겠지.

교육생 중 빠르게 안정을 되찾은 몇 명이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2층에 서 있던 손경진을 발견했다.

“엇,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날 둘러싸고 있던 교육생들이 일제히 2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손경진은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지만 교육관 1층에는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1층으로 내려온 손경진은 마지막 계단에 내디딘 순간 나를 다시 노려보았다.

원래부터 마르고 날카로운 이미지다 보니 작정하고 눈빛을 쏘아 보내니 확실히 무섭긴 하다.

내가 경력이고 뭐고 없던 시절, 작년 초나 재작년쯤 이런 눈빛을 받았다면 절로 항복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다르지.

여기서 물러설 생각은 없다.

어차피 상대도 이제 남은 패가 별로 없는데 개겨 보지 뭐.

나는 지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쯧.”

내 태도가 불쾌한지 손경진이 혀를 찼다.

주위에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손경진은 이내 더러운 것을 본다는 듯 경멸하는 눈동자로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멀찍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던 때였다.

나는 손경진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벌써 가십니까? 이 혼란을 보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오신 것 아니었어요?”

“……뭐야?”

손경진이 멈춰 서더니 나를 쏘아보았다.

***

“뭐야, 뭐야?”

“몰라요. 분위기 왜 이러지?”

신재현과 손경진이 가만히 서서 눈싸움을 시작하자 교육생들이 웅성거렸다.

그들로서는 지금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오늘 있던 일 전부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시험에 예고도 없이 특강 과목이 등장하질 않나, 그 과목이 세법학 수준의 판례 적용 지식을 요구하질 않나.

그래서 물어보러 왔을 뿐이다.

따지는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이들에겐 인생이 걸린 문제니 그럴 만 했다.

그러다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고 보니 어느새 둘이 눈싸움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단순한 눈싸움이 아니다.

듣기만 해도 살얼음이 팍팍 끼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둘의 눈빛이 자신들을 향해 오는 것이 아닌데도 기온이 내려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말로 사람이 베일 수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그러할 것이다.

“너 지금 뭐라고 했지?”

손경진은 당연하게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라인이 다 잘려나갔다 해도 엄연히 손경진은 원장이다.

무려 청장을 하던 사람이란 말이다.

까마득하게 아래에 있는 일개 7급 직원에게 이런 말을 들을 위치가 아니었다.

손경진을 저런 불손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 지나가던 손경진을 불러 세운 것 모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벌써 가시냐고 여쭈었습니다. 이런 걸 보려고 오신 거잖습니까. 아니면 그겁니까? 제 반응이 생각보다 덤덤해서 실망하신 건가요?”

신재현이 쏘아붙이듯 말하자 손경진은 내려다보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대신 옆에 있던 팀장 둘이 호통을 쳤다.

“신재현 씨. 지금 원장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입니까! 아, 신재현 씨가 잘났으니 위계질서는 무시해도 된다 이겁니까?”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교육생들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시험의 감독을 맡았던 직원들도 1층으로 내려왔다가 흠칫하며 물러섰다.

교육생과 직원들 중 그 누구도 그들 사이에 끼어 괜히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단순히 교육생이나 직원 간의 싸움이라면 말리겠지만 상대는 원장 아닌가.

섣불리 끼어들지 못한 직원은 근처에 있던 교육생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두 분 왜 저러신답니까? 딱 봐도 살벌한데. 설마 싸워요?”

물론 교육생이라고 알 리가 없다.

“저도 모르겠어요. 원장님이 건물 나가시려는데 갑자기 신 선생님이 붙잡아서…….”

“싸움을 걸었다는 말이네요. 신 선생님 그렇게 안 봤는데 허어…….”

직원들과 교육생들이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신재현은 뚜벅뚜벅 걸어가 손경진 앞에 섰다.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날까 봐 놀란 직원들이 서둘러 다가갔지만 그 앞을 황민우가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 가만히 지켜봐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황민우가 가로막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밀치고 둘을 말릴 수도 없었다.

대화하는 것뿐이라면 내용이 조금 과격하다 해도 문제는 없을 테니.

무슨 일이 터진다 싶으면 그때 가서 막아도 되는 일이다.

직원들이 멈춰 서자 그사이 신재현은 손경진 옆에 있던 두 팀장에게 말했다.

“두 분은 결정권 없잖습니까. 대변인 역할만 하실 거라면 빠지시죠.”

“여보세요, 신재현 씨. 주제를 아시죠. 원장님과 독대를 청할 거면 예의를 갖춰서 찾아오세요.”

두 팀장은 충실하게 주인을 지켰다.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황민우가 끼어들려 하자 신재현이 그를 막았다.

“이런 저열한 수법을 간언한 게 두 분이십니까? 어쩐지 손경진 원장님치고는 살기가 많이 빠졌던데요. 팀장님들이야말로 낄 데 안 낄 데 구분하시죠. 저는 이번 일을 기획하고 승인하신 결정권자께 대화를 청하는 겁니다. 아니면 뭡니까? 대변인 없으면 말도 못 하십니까? 같이 밥도 먹은 사이인데, 이 정도 질문은 받아주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신재현의 말투는 둘째 치고 그 내용부터가 생각할 여지가 많은 것이었다.

교육생들은 아직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직원들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신재현 씨,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물러나세요.”

손경진은 절대 신재현과 대화의 판에 나서지 않았다.

여기서 손경진이 대등하게 대화 상대로 선다는 것부터가 무대에 끌려 내려오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신재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명색이 전 중부청장이라는 분이 이렇게 치사하게 나오시다니요. 원장님의 경력과 직함이 울겠습니다. 그래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원장님과 저는 적입니다.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신재현은 결코 핵심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걸 꾸민 게 당신이 아니냐는 둥,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둥 변명처럼 들릴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대신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을 내뱉었다.

직원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단번에 눈치를 깠고, 손경진과 신재현의 관계를 모르는 교육생들조차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몇 명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둘이 왜 적이에요? 아는 거 있어요?”

“글쎄요…… 저도 똑같은 신입 연수받는 처지인데 어떻게 알겠어요.”

“저번에 누구였더라? 어느 분 오빠가 세무직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사정 아시는 분?”

교육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손경진의 손발인 두 팀장은 아차 했다.

목적은 신재현의 이미지 깎아 먹기였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수상쩍었다.

“저, 원장님. 더 이상 상대하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만 가시죠.”

팀장의 조언에 손경진은 눈을 흘기며 작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늦었어. 빠져나가려면 아까 나갔어야 해.”

지금 등을 돌리면 신재현의 일갈에 찔려서 도망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손경진은 아까 신재현의 부름에 발길을 멈춘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당시엔 어쩔 수 없었다.

시비를 걸듯 말을 거는데 피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손경진은 최선의 수를 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따 원장실로 와. 여기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돌아섰을 때였다.

신재현이 독설을 쏟아 부었다.

“원장님은 항상 그러셨죠. 저를 죽일 거면 저만 죽이시죠? 괜히 죄 없는 다른 사람들 끌어들이지 마시구요.”

무슨 의도인지 손경진은 즉시 알아차렸다.

이미지를 깎으려고 시도했다면, 깎지 못하게 막으면 되는 것이다.

그 뒤에 무슨 뒷얘기가 있어서 휘말린 것이라는 뉘앙스를 준다.

지금 이 얘기를 들은 사람은 잔뜩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을 것이다.

당장 지금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교육생과 직원만 해도 그랬다.

“원장님이 신 선생님을 죽이려고 했어요?”

“그런가 봐요. 무슨 일이 있었지? 무섭다…….”

“신재현 선생님이 엄청나게 화나신 것 같은데 우리가 따진 거랑 뭔가 연관이 있는 걸까요?”

“그러면 이번 시험이 원장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하셨다는……?”

“쉿! 다 들리겠어요!”

손경진은 답답해졌다.

예전 같으면 명령하고, 아래에서 실행하고 자신은 보고만 들으면 그만인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신재현을 보겠답시고 교육관에 온 것이 문제였는가?

아니다.

손경진이 오지 않았더라도 아마 신재현은 언론플레이에 들어갔을 것이다.

“제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말씀하세요. 괜히 휘말린 사람들은 무슨 죄입니까?”

신재현은 분노를 토해내듯 외쳤다.

“여기 교육생들은 세금으로 교육받고 나라의 손발이 될 사람들입니다. 급수만 다를 뿐 우리 모두 같은 공무원이고 나름 꿈을 품고 들어온 사람들이에요. 필사적으로 공부하고, 인생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들어왔단 말입니다. 우리 싸움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들의 시험까지 망칠 만큼, 그런 가치가 있습니까? 원장님, 제주도에 내려오시면서 그 명석함과 날카로움은 전부 어디로 갔습니까!”

신재현의 일갈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우와…….”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생각해 준 거 맞죠?”

아까까지만 해도 사라졌던 동경이 교육생들의 얼굴에 도로 피어올라 있었다.

“미치겠군.”

손경진은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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