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68화 (268/500)

268화. 마음을 돌릴 때는 진심으로 (1)

원장의 지시가 내려온 것은 한 주의 끝인 금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문제는 공지가 서면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육원장 밑에는 교육지원과와 교육기획과, 그리고 교수과가 있었는데 그중 교수과의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교육연구팀장이 직접 각 교수들의 방으로 공지를 하러 돌아다녔다.

한마디로 구두 공지인 셈이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갑작스럽게?”

“저는 원장님 지시를 전달해드리는 것뿐입니다. 저희도 곤란해 죽겠습니다, 교수님.”

뜬금없는 공지에 교수들이 반발했고 팀장은 연신 사과했다.

팀장에게 화풀이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닌지라 교수들은 결국 알겠다며 팀장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팀장은 들어가기 싫은 발을 억지로 움직여 교수실을 돌았다.

좋은 말은 못 듣겠지만 위에서 금요일 중에 구두로 전부 전달하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행정 직원을 보낸 게 아니라 팀장 본인이 직접 도는 것은 그나마 팀장으로서의 책임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직원들이 공지하러 가면 쓴소리 듣고 울면서 돌아올 것이 뻔하니까.

“원장님은 대체 왜 일일이 전달하라고 하신 건지, 참…….”

팀장은 투덜거리면서도 충실히 지시를 따랐다.

그가 받은 지시는 ‘본관 4층 교수실에 두 가지 사항을 빠짐없이 구두로 전달할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팀장이 향하는 곳은 이제학의 교수실이었다.

앞서 다른 교수들에게도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한 터라 팀장은 잔뜩 고개를 숙이며 공지사항을 전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제학 교수님.”

“어쩐 일로 연구팀장님이 직접 다 와주시고.”

“원장님께서 교수님들께 알리라는 사항이 두 가지 있어서요.”

하도 까여본 팀장은 먼저 원장의 이름부터 팔았다.

적어도 자기는 메신저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원장님이 요즘 교육원 행사에 관심이 많으시더니 또 뭔가 일을 벌이시려나 보네요. 그래서 내용은 뭡니까?”

“아마 다음 주부터 더 바빠지실 것 같습니다…… 일단 다음 주 중으로 교육생들 전 과목 중간 테스트가 예정되어 있는데, 교수님들께서 월요일까지 저희 연구팀 행정실로 문제 넘겨 주셔야 합니다. 늦어도 화요일까지는 주셔야 저희도 교육평가팀에 넘기거든요.”

“허어…… 문제야 준비 중이긴 했지만 월요일까지라.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번 테스트는 최종 평가 직전의 마지막 중간 테스트니까 좀 더 신경을 쏟으라는 원장님의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교수님들께서 내신 문제에 더해서 평가팀의 자체 평가서가 들어갈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가네요. 원래 하던 중간 테스트에 뭘 손대겠단 말씀입니까?”

“그, 저…….”

팀장은 이제학의 눈치를 보았다.

자세히 설명하면 교수의 반발을 불러오는 내용이니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학이 무언으로 독촉하자 팀장은 에라, 하고 입을 열었다.

“교수님들께서 주신 문제를 바탕으로 평가팀에서 난이도 조절을 할 예정이랍니다. 평가지를 새로 구성한다는 뜻이죠.”

“교수들이 낸 문제에 손을 대겠다는 뜻이군요.”

“시간이 촉박하니 난이도 조정만 들어가는 걸 겁니다. 그동안 했던 시험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예요.”

앞서 다른 교수들과의 대화에서는 이 부분에서 화를 낸 교수도 몇 명 있었다.

그럴 거면 니들이 알아서 문제 내라, 시험 문제는 교수들의 권한인데 어째서 개입하느냐, 등등의 불만이었다.

그러나 이제학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 공지사항은요?”

“기자들의 견학이 있을 겁니다.”

“이 시기에요?”

교육원의 홍보와 신임 공무원들의 응원, 그리고 이미지 향상을 겸한 기자 초청이야 가끔 있었던 일이다.

물론 한가할 때에.

기자를 부르기엔 시기가 좋지 않다는 뜻이다.

“강의실에 들어올 수 있으니 미리 준비하라는 전언이십니다.”

“강의실에…… 뭐?”

이것만큼은 이제학도 참을 수가 없었다.

화를 낼 것처럼 목소리가 높아졌다가도, 팀장이 죄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자 깊은 한숨과 함께 감정을 눌렀다.

“원장님 지시라 이 말이죠? 다른 교수님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에휴, 말도 마세요. 다들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저만 중간에서 얻어 터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팀장에게 길게 말해봤자 무익하다.

이제학은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특강 쪽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신재현 선생님에 대한 언급은 따로 없으셨습니까?”

“아, 특강은 저희 교수과 관할이 아니라서요. 따로 언질 들은 것은 없는데요. 특강이니 평가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만약 있다 해도 아마 지원팀이나 평가팀 같은 데서 따로 생각한 게 있지 않을까요?”

“……일단 알겠습니다.”

팀장이 나가자 이제학은 문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리고 팀장이 문을 닫는 순간 이제학은 핸드폰을 들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아, 신 선생님. 이제학입니다. 혹시 다음 주 일정에 대한 연락 받았습니까?”

-일정이요? 뭐가 있습니까?

“역시 그렇군요.”

신재현의 의아한 목소리에서 이제학은 그에게 아무런 소식도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신재현 역시 이제학의 반응에서 무언가 자신만 놔두고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 어딥니까? 제 방으로 오시겠어요?”

-아뇨. 일부러 제게 전달하지 않으려는 것 같으니 제가 본관에 나타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전달받지 않은 척해야죠.

“허…….”

이제학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아직 내용은 말하기도 전인데 벌써 신재현은 앞서 나가고 있었다.

-지금 가능하시면 말씀해주시고, 누가 들어서 곤란한 일이면 죄송하지만 이따 관사로 와주십시오.

“지금 아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제학은 방금 들은 내용을 간략하게 전달했다.

그리고 잠시 대답을 기다렸다.

신재현이 어떻게 판단할지 궁금했다.

-대충 알겠군요.

신재현의 목소리는 진중하면서도 여유로웠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아는 얘기였습니까?”

-그럴 리가요. 제가 이 교육원에서 믿고 있는 분은 교수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절 믿고 모든 걸 알려주는 분도 교수님밖에 없죠. 방금 이야기, 지금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데 엄청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과한 자신감은 자만이 되고 실수를 낳는다.

가뜩이나 젊은 친구다 보니 슬쩍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핸드폰 너머로 신재현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었다.

-아뇨. 안심이 돼서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손경진 중부청장님은 사람을 갈아서 무기로 쓰시고, 그 무기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찔러 넣으시는 분이었거든요.

“……예?”

이제학은 비유를 이해하지 못 했다.

손경진 때문에 앞길이 막혔다지만 그를 곁에서 겪어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이제는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수를 쓰시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원장님이 뭘 꾸미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다행이라고요?”

-적어도 제가 보이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니까요. 알면 대처할 수 있습니다.

이제학은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는 못 했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신재현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는 것.

-그럼 다음 주까지는 본관에 가지 않겠습니다. 당분간은 모르는 척해야겠어요.

“신 선생님 판단이 그렇다면야. 저도 당분간은 신 선생님에게 찾아가지 않겠습니다.”

둘의 대화는 매우 단조롭게 끝났다.

손경진이 벼르고 있는 것에 비하면 매우 무미건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다음 주 수요일.

중간 테스트가 있는 날이었다.

교육생들 대부분은 서울권의 세무서를 원한다.

교육원에서의 성적이 향후 세무서 발령에 조금이라도 반영이 되는 만큼, 교육생들은 치열했다.

그러나 시험지를 뒤집는 순간, 교육생들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세무조사 실무]

주 2회짜리 특강이 시험에 떡하니 들어가 있었다.

***

교육관 강의실에서 교육생들이 듣도 보도 못한 시험 문제에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저벅.

세 남자가 교육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중앙에 선 손경진은 자신의 심복이나 지금까지 남은 유일한 손발인 두 팀장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발걸음에서는 여유가 묻어났다.

-여기는 내 구역이다.

맹수가 자신의 영역을 관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의 손경진을 아는 사람이 봤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수많은 국장과 과장을 거느리고 국세청 한 파벌의 수장으로 군림할 정도로 막강했던 그의 뒤에 지금은 겨우 둘 뿐이라니.

그때를 생각하면 꽤 초라한 모습이었다.

셋은 그것을 느끼면서도 일부러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인정하면 비참해지니까.

대신 시험을 치고 있는 강의실을 창문으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혼란스러워하고 있군.”

시험지를 신경질적으로 넘기는 학생, 시험 감독을 맡고 있는 직원에게 질문하는 학생.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당황이 떠올라 있었다.

손경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팀장 하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재현이 낸 문제라고 알고 있을 겁니다. 내용은 판례 위주로 되어 있으니 당연히 교육생들이 풀 수 없을 거고요.”

반대쪽에 선 팀장도 거들었다.

“교수와 직원들에게 소문도 적당히 뿌려뒀습니다. 신재현이 낸 문제 때문에 밸런스 조정이 필요해지는 바람에 평가팀에서 촉박하게 문제 제출을 요청한 거라고 해 뒀습니다.”

“신재현이 그동안 무슨 좋은 이미지를 쌓아 놨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사람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만 믿으니까요.”

“이대로 유지만 해도 신재현의 이미지는 나락입니다. 거기에 기자들까지 데려와서 작업 좀 치면 끝이죠. 신재현은 교수와 학생들, 양쪽 모두의 적이 될 겁니다.”

그동안 신재현이 종종 구내식당에 나타나 휘젓고 다녀도 가만히 놔둔 이유가 이거였다.

신재현은 일개 직원이라는 위치상 조금씩 파고들어 여론을 돌릴 수밖에 없지만 손경진은 다르다.

필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깔고 그 위의 말까지 자기 손 안에서 굴릴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교육생과 교수, 직원까지 모조리 피해를 입게 되지만 손경진에게는 아주 자그마한 희생에 불과했다.

특히 이제 막 발령되어 나갈 신입 교육생 따위의 미래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신재현이 어떻게 나올지 보고 가지.”

복도를 한 바퀴 돈 손경진은 1층 로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2층 난간에 기대어 섰다.

손경진은 남을 기다릴 위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일부러 남아서라도 신재현을 보고 싶어졌다.

신재현의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그 기대감에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 섬에 처박힌 원인인 민치호와 오낙현 청장은 어찌 못한다.

그러니 그 화풀이를 하겠다는 속셈이나 다름없었다.

-딩동.

벨이 울리고 교육생들이 뛰쳐나왔다.

각자 시험에 대한 불만으로 잔뜩 성이 난 상태였다.

때맞춰 다음 수업이 예정되어 있는 신재현이 교육관 정문을 열고 들어섰다.

로비에 신재현이 나타나자 복도에 돌아다니고 있던 교육생들이 일제히 뛰어 내려갔다.

난간에 기대 서 있는 원장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교육생들은 흥분해 있었다.

“선생님! 오늘 시험 어떻게 된 거예요?”

“미리 말씀이라도 해 주시지. 문제 대체 뭐예요!”

“선생님, 너무해요!”

딱 원했던 반응이다.

손경진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내내 냉막하던 표정에 뒤틀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가 몸값을 높게 쳐줬을 때 내 손을 잡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이제 주제를 좀 알았겠지.”

손경진은 교육생들에게 둘러싸인 신재현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멀었다, 넌 이 교육원에서 그나마 갖고 있던 쥐꼬리 같은 명예도 잃게 될 거라고.

손경진이 고개를 쭉 내밀었다.

교육생들에게 파묻혀 신재현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 궁금한데. 어디 고개 좀 들어 보라고.”

그 순간, 신재현이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당황하며 변명하고 있을 줄 알았던 신재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미친놈.”

신재현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손경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살벌했다.

“건방진 놈, 감히 어딜.”

저 얼굴이 패배감으로 일그러지는 날도 머지않았다.

신재현의 담담한 반응에 실망한 손경진은 그렇게 위안하기로 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