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67화 (267/500)

267화. 그 사람, 잡아 (3)

교수 연구실에 놓인 4인용의 자그마한 테이블 앞에 세 명이 앉았다.

신재현, 황민우, 그리고 이제학.

셋은 잠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황민우의 경우 신재현이 나서지 않는데 먼저 입을 열 사람이 아니고.

이제학은 신재현이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막상 신재현의 경우에는 이제학을 살피고 있었다.

그 눈빛을 느낀 이제학이 피식 웃으며 종이 뭉치를 던졌다.

-턱.

신재현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선물입니다.”

“교수님, 제가 무슨 생각인 줄 알고 그러십니까.”

“날 찾아온 걸 보아하니 사정은 다 알고 온 것 같고. 그럼 그쪽에서 나라 적대할 이유는 없잖습니까.”

신재현이 자신의 잡을 거라 확신한 모습이었다.

물론 처음 나눴던 대화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풍기긴 했다.

알아보고 다시 와라, 라고 했던 것은 말하자면 서로 손을 잡기 전에 마지막으로 뒷조사 하는 확인의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온 게 신기하긴 하네요. 빨라도 이삼일은 걸릴 줄 알았는데.”

“어디까지 조사했는지 궁금하진 않으시구요?”

“알아보라고 얘기한 건 저니까 어디까지 파고들었든 신경 안 쓰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본인의 뒷조사다.

좋은 이야기가 아닌 것은 자신이 잘 알았다.

만약 물어봐서 겉핥기로만 조사했다면 실망이고, 지나치게 깊숙이 조사했다면 무서워진다.

어차피 손을 잡기로 결심한 상태인데 굳이 골을 만들 필요는 없다.

적어도 자신이 그들의 적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

그거면 족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재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서로 간의 신뢰 관계는 터놓고 말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제가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교수님 앞에서 거론하는 것 자체가 무례하고, 교수님께 불편한 행동이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속마음을 숨기면서 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제학이 뭐라 말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처럼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신재현은 먼저 사과를 건넸다.

“그러니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교수님께서 허락하셨다고는 하나, 사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감안하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교수님의 선택과 그 결과에 왈가왈부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주세요. 교수님께서는 옳은 일을 하셨습니다. 저는 교수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존경합니다. 저는 교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순간 이제학의 얼굴에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피로로 찌든 눈가에 회한과 슬픔, 그리고 안도와 고마움이 한데 엮여 있었다.

“흐…….”

웃는지 우는지 모를 듯한 기괴한 침음성을 흘린 이제학이 주먹을 꾹 쥐며 고개를 숙였다.

창가에서 드리운 오후의 햇살이 이제학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워, 그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신재현과 황민우는 조용히 기다렸다.

이제학이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잠시 시간이 지나 이제학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그의 표정에서 혼란은 사라져 있었다.

“맞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되었다고 해서 신재현 선생님이 날 판단하거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원치 않았어요. 그래서 굳이 묻지 않았고. 하지만 방금 그 말을 들은 순간 알게 됐네요.”

이제학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감정을 모아 모조리 내뱉어 내듯이.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었나 봅니다. 신 선생님의 그 한마디로 결정했습니다. 적어도 이 교육원에 있는 동안에는 전적으로 도와드리죠. 불법적인 것만 아니라면. 이야기를 흘리라면 흘려 줄 것이고, 엿들으라면 엿들어 오겠습니다. 교수 간의 정보는 제가 모두 숨김없이 가져오도록 하죠.”

신재현은 사실 그렇게까지 깊숙이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학의 눈동자를 보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스스로를 부르던 호칭이 바뀌어 있었다.

‘내가’에서 ‘제가’로.

신재현은 이제학이 거대한 심경의 변화를 겪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호의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신재현의 대답에 이제학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학으로서는 교육원의 평온을 되찾기 위해 잠시간만의 동맹이라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아예 생각을 바꿨다.

여기 있는 동안은 전적으로 그의 편이 되어 주겠다고.

단순히 듣기 좋은 소리를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적어도 정보력은 뛰어나다는 걸 증명했고, 아직도 윗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인성 역시 마음에 들었다.

교육원에서 만난 잠시간의 인연이다.

이용만 할 거라면 아까 그 말은 필요 없었다.

신재현을 돕기로 결정한 것에 사적인 감정이 아예 없다는 말은 못 한다.

‘사적이면 뭐 어떠냐. 이미 손경진 버리고 신재현이랑 손잡기로 한 게 사적인 결정인데. 이런 놈이 잘 되어야지, 암.’

이제학은 테이블 위에 또 하나의 종이 뭉치를 올렸다.

이번엔 꽤 두터웠다.

“이건 뭡니까?”

“원래는 좀 아껴두려고 했던 건데, 그럴 필요가 없겠네요.”

신재현은 사무용 집게로 묶인 인쇄물을 집어 들었다.

[법인세과 교수 홍대안]

-나이 49세.

-경영학 학사.

-강서세무서, 동작세무서 법인세과.

-대전청 법인세과.

-공인회계사 및 세무사 자격증 보유.

[국세징수법 교수 안정례]

-나이 45세.

-국세상담센터 상담자 근무.

-세무사 자격증 보유.

-법학 학사

-동수원세무서 운영지원과.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신재현의 눈동자가 커졌다.

교육원에서 근무하는 모든 교수진과 지원부서의 직원들에 대한 인사 카드였다.

거기에 한 장 한 장마다 붉은색과 파란색, 노란색으로 체크가 되어 있었다.

이제학의 거친 손글씨로 ‘아들이 회계사 시험 준비 중’ 등의 설명도 첨부되어 있었다.

“이게 대체…….”

“교수랑 일반 직원은 남의 정보를 못 보지만 지원과에서는 열람이 가능합니다. 지원과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교수님, 이렇게까지는…….”

“알아요. 정보 함부로 유출하면 안 되는 거. 그래서 줄까 말까 망설였는데. 저도 깨끗하게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니라서요. 이걸 줬다고 해서 다른 교수님들도 이용해 먹으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이용은 제 선에서 끝내면 되고, 성향 파악 정도만 해놓으라는 뜻이에요.”

신재현이 인사 카드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교수님께서는 아는 것만 귀띔해주시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다른 교수들도 궁금한 거 있으면 지원과 가서 열람하고 오는걸요, 뭐.”

이제학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 태도에서 신재현은 이제학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단단히 각오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받겠습니다. 정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그리고 거기 색으로 구분해놓은 건 신 선생님하고 맞을지 안 맞을지 내 나름대로 분석해본 거예요. 내가 느낀 대로만 쓴 거라 정확하진 않습니다. 참고로만 쓰세요.”

신재현과 황민우가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그들이 현재 작업 중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인물과 접한다고 무조건 성향 파악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폐쇄된 환경에서 적아를 구분할 필요성 때문에 하던 작업이었다.

정확히는 누가 호감을 갖고 있고, 누가 적대하기 쉬운지 파악하는 중이었다.

그다음은 손경진과 손잡을 만한 사람은 따로 빼서 지켜볼 예정이었고.

다만 황민우는 막 들어온 외부인인지라 교수진들과 친해지는데 시간을 들이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정치와는 담쌓고 산 사람이 말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분류해서 주다니.

“여기 이면지는 나름 누구랑 누가 친한지 적어놓은 겁니다. 아, 글씨가 좀 개발새발이긴 한데 알아볼 수는 있을 거예요.”

이제학은 손수 이면지를 펼쳤다.

A4 종이 6장을 연결하자 얼기설기 얽힌 하나의 큰 그림이 나왔다.

신재현은 그중 한 명을 짚었다.

“저희는 지금 홍대안 교수님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아, 벌써 파악이 끝난 겁니까? 홍대안 교수는 제가 일단 빨간색으로 분류해 놓긴 했는데, 중립인 노란색을 칠할까 고민했던 사람이네요.”

“고민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홍 교수님은 사람과 잘 어울리지를 않아요. 골방에 틀어박히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그래서 신 선생에게도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근데 어제 휴게실에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그렇다면 관심은 가졌다는 뜻이죠? 몇 번 마주치면서 느낀 바로는 이 사람, 자기 영역에 침범당하는 걸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렇군요. 제가 온 후로 교육원이 소란스러워지면 제가 침범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신재현이 말끝을 흐리자 이제학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어떻게 딱 홍 교수를 짚은 겁니까?”

“옆에 있는 이 형이 사람을 굉장히 빨리 봅니다.”

“응? 아, 홍 교수님 만났군요?”

“네. 명백하게 저희 팀장님 적대하는 분을 다섯 분 추려냈습니다. 제가 봤을 때 그중 가장 위험해 보이는 분이 홍 교수님이었고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이제학이 머뭇거렸다.

“세상에, 대체 서울은 어떤 마경인 겁니까? 아직 한참 사고치고 수습하고 과장들 뒤꽁무니만 따라다녀야 할 연차들 아닙니까? 민치호 청장님이 혹시 따로 뭐 앉혀놓고 가르쳐요? 국세청도 후계자 교육 이런 거 하나? 나만 몰랐던 건가?”

이제학이 혼란스러워했다.

“그럴 리가요. 어깨너머로 배웠습니다.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허어, 아직 한창 나잇대인 분들이 일이 아니라 이런 거에 눈뜨게 만든 윗분들이 나쁜 놈들입니다. 말로만 국세청의 미래니 뭐니 띄워주지 말고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 줘야지. 거참…….”

이제학이 혀를 쯧쯧 차며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어디 편한 자리만 골라서 발 뻗을 수 있나요. 나쁜 놈들 잡는 데는 원래 수고가 드는 법입니다.”

“말은 잘하네요. 이래서 예쁨 받는구나 싶기도 하고. 그럼 당분간은 신 선생님은 수업에만 집중해요. 정보 수집은 우리가 하죠. 교수들 사이에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알려줄 테니 걱정 말고요. 황민우 씨, 잘 해봅시다.”

이제학은 어깨를 으쓱하며 황민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민우가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든든한 지원군의 탄생이었다.

***

이제학의 말대로 신재현은 수업에 열중했다.

신재현이 처음 수업했던 날, 휴게실에서 금방이라도 싸움이 날 것처럼 날 선 분위기가 조성된 탓인지 교수들은 한동안 불안해했다.

그러나 신재현이 별다른 행동 없이 수업만 하자 금세 교육원에는 평온이 찾아왔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만 그랬다.

신재현과 이제학, 황민우 셋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교수들과 교육생들에게 파벌싸움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그리고 손경진은 정반대였다.

2주간, 그는 눈에 띄게 움직였다.

교육생들의 체력단련에 참관하기도 하고 교수회의를 직접 주관하기도 했으며 구체적으로 교육생에게 무엇을 가르치라며 교육 자료에 참견하기도 했다.

주말에 특강을 열어 교육생들을 가르치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임 교육원장으로서 더없이 온화하고 열정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인이 봤을 때의 모습이다.

실상은 이랬다.

“이번 주에도 특강 있어요? 아, 제발…….”

“그 시간에 차라리 신재현 선생님 특강 한 시간 더 넣어주지.”

“원래 원장님이 특강도 하고 그래요?”

“아닐걸요? 먼저 붙은 선배들한테 들었는데 이렇게까진 아니래요. 사실 우리 교육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잖아요.”

“왠지 신재현 선생님 오시고 난 후부터 심한 것 같지 않아요? 뭔가 자극을 받으셨나?”

“자극도 좋은 쪽으로 받으시면 좋겠는데요. 이상하다, 왜 재미가 없지? 그냥 훈화만 하는 느낌인데 이걸 들어야 되나? 그 시간에 차라리 과제 하면 안 될까요?”

교육생들의 반응은 죽상이었다.

교수들도 원장의 열정적인 교육 참여를 꺼려하긴 마찬가지였다.

“16주 안에 마쳐야 해서 저희 커리큘럼 빡빡한데 원장님이 지시하신 것까지 끼워 넣으려니 죽겠습니다.”

“주말에 보강하려고 했는데, 큰일이에요. 여기에 과제까지 나가면 교육생들이 버티려나.”

“마지막 달에는 등산이랑 바베큐 파티도 예정되어 있는데 어쩝니까.”

교육생들에게는 관심도 없고 보여주기식으로 참여하는데 제대로 준비를 했을 리가 없다.

겉으로야 ‘대단하십니다, 원장님.’하고 맞장구를 치지만 속으로는 손경진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밑 작업을 깔아두었다고 여겼는지 손경진의 심복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교수님들. 원장님의 지시사항 있겠습니다. 우리 교육원의 역할을 널리 알리고 자랑스러운 신입 공무원들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다음 주 중에 기자들을 초청한 견학이 있을 예정입니다. 강의 중에 기자들이 들어오더라도 당황하지 마시고 수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다음 주에 있을 교육생 중간 테스트는 이번에 지원과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 드릴 예정입니다.”

“지원? 무슨 지원이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기자요? 기자를 갑자기 왜 불러요? 미리 말을 해주든가!”

내부의 열화와 같은 반응을 무시한 채 손경진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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