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66화 (266/500)

266화. 그 사람, 잡아 (2)

민치호가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오랜만이다.

듣고 싶었던 결론이었지만 반대로 씁쓸해졌다.

이제학의 반응과 민치호의 첫 마디를 종합해 보면 대충 어떻게 된 사정인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이제학. 그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았던 평범한 공무원이야. 그래도 세무직 중에서는 승진 루트를 잘 탔어. 대학교가 회계과거든. 사회생활도 잘하고 성격도 서글서글했다는 동기의 증언이 있네.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까지 연락이 닿았나 보다.

옆에서 본 것처럼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회식도 매번 참여했다고 하니 승진에 대한 욕심은 있던 사람 같아.

승진 욕심이야 결점이 못 된다.

위로 올라가려는 욕망은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언제 무슨 이유로 재산세과장 자리에서 교육원 교수로 왔는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손경진 파벌의 팀장 하나가 사고를 쳤어. 이제학이 성남세무서 재산세과장으로 있었을 때의 일이야.

민치호의 긴 설명이 시작되었다.

나는 잠시 민치호에게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황민우도 함께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이었다.

-세무공무원 하다가 은퇴한 양반들이 보통 세무사 사무실 내잖아.

평생을 공직에서 살다 은퇴한 세무공무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자신의 지식과 인맥을 살리기 위해 세무사 사무실을 개업하곤 했는데, 그런 사람들은 굳이 청 출신이 아니어도 환영을 받았다.

왜냐면 현직 공무원 중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9급에서 출발해서 20년 정도 일하고 과장을 달았다면 중소규모 세무법인에서 반가워하며 데려갔을 것이다.

지금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런 세무사였다.

-신고기한이 지난 양도세 건이었는데 가산세만 4천만 원짜리인 건이었나 봐. 납세자가 가산세 내기 싫다고 은퇴한 과장 출신 세무사에게 사고 처리를 맡겼어. 소개비 500만에 성공보수 500만.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이미 몇 년 전의 지난 일이지만 듣기만 해도 빡친다.

나는 욕설을 내뱉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은퇴한 과장 출신 세무사가 현직에 있던 팀장과 밥 한번 먹고, 사고 좀 해결해달라고 맡겼어.

굳이 혈연, 지연, 학연 관계가 아니더라도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은퇴한 과장과 현직 팀장이라면 세무서에 있을 시절에 같은 서에서 알고 지냈을 확률이 높고.

팀장이 친 사고 몇 번을 과장이 덮어줬다면 부탁 한 번쯤은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실제로 나도 사기업에 있을 때 언뜻 들었다.

“사고 수습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습니까? 아무리 은퇴한 과장 부탁이라고 해도 감사원에 들킬 만하면 몸을 사리잖습니까.”

-수습 가능한 선에서 제안이 왔으니 받아들였겠지. 구체적으로는 이래. 세무법인이다 보니 평소 세무서에 보낼 서류가 많잖아. 그 세무법인에서 해당 세무서에 보낸 등기번호를 이용했지.

“아…….”

나와 황민우는 동시에 침음성을 흘렸다.

듣는 순간 어떤 방식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 둘 다 실무자니까.

요즘 아무리 전산 시스템이 잘되어 있다고 해도 부속서류는 등기 우편으로 받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 신고서도 우편으로 보내는 사람이 많다.

중요한 서류가 중간에 분실되면 곤란하니 세무사 사무실은 등기 번호를 따로 관리하는데, 그걸 이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고기한이 6월 30일까지인 양도세 건이 있다고 치자.

4월은 부가세, 5월은 종합소득세, 6월은 성실신고자 종합소득세 신고기한이라 세무서에 서류를 보내는 일이 많다.

이번 일이 일어난 곳은 성남세무서라고 했지.

그러면 그 세무법인에서 4월부터 6월 사이에 성남세무서로 보낸 우편물을 찾는다.

실제로는 뭘 보냈든 상관없다.

내용물이 뭐였는지 이제 와서 증명은 불가능하니까.

‘그 우편물 안에 양도세 신고서도 있었습니다. 저희는 멀쩡하게 신고기한 내에 신고했어요. 세무서에서 분류 과정에서 분실한 것 아닙니까? 아, 억울합니다. 이거 때문에 지금 가산세를 4천만 원이나 내라는 거예요? 저희 잘못인 거 확실합니까?’

이러면 세무서 측에서는 할 말이 없다.

명백하게 세무서에서 분실한 게 아니라는 것, 납세자 귀책사유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납세자의 재산에 현저한 손해를 입힐 수는 없으니 이 경우 보통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하고 넘어가기 일쑤다.

물론 무작정 밀어 넣는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고, 담당 조사관과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을 때의 얘기다.

하지만 성남세무서 재산세과 팀장이 전후 사정 다 알고 있는 경우라면?

적당히 뭉개기 쉽지.

-근데 그게 나중에 들켰어. 정확히는 이제학이 결재에서 걸러냈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학의 목소리로 ‘이게 뭐야? 신고기한 몇 달이나 지난 게 왜 우편 누락으로 뒤늦게 접수되어 있어? 무슨 상황이야?’ 하고 묻는 장면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가워졌다.

이 사람도 제정신 박힌 사람이었구나.

난 이런 사람 무척 좋아한다.

“그러면 보복입니까? 아니면 그냥 그런 행태에 질린 걸까요?”

-둘 다지. 사고 수습을 맡았던 담당 팀장이 손경진 라인이었거든. 성남 세무서에서 지내다가 곧 중부청으로 올라갈 놈이었는데 그 사고를 쳐 버린 거지.

“어떻게 됐습니까?”

-손경진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 상황을 알았어. 세무서마다 자기 사람 하나씩은 있다는 소문이 있었으니 그거는 이해가 가는데. 덮으려고 했던 팀장이 바로 징계 먹고 날아가 버렸어. 2급지 세무서 민원실로. 이제학도 팀장과 공모했다는 의심이 있어서 지방으로 날려갔다가 교육원 교수 자리 나오니까 바로 지원했더군.

황민우가 기겁했다.

그러나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손경진이라면 남들 인생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어차피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사람이니 그런 구설수라면 쳐내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서 이제학이 휘말렸다는 거군.

“청장님 의견으로는 믿어도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간 맡아 왔던 건들 중 큼직한 걸 대략 훑어봤어. 전형적인 공무원이야. 알지? 원리원칙 따지는 사람.

공무원 중에 많은 유형이긴 하다.

-직접 보지 않은 내가 과거만 보고 현재의 그 과장의 속을 들여다보긴 어렵지. 하지만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적의 적은 친구가 될 수 있어. 그러니 기본적으로 그 교육원에서 지내는 동안은 도움을 기대해도 될 거다.

민치호는 차분하게 자신의 판단을 이야기했다.

-그러니 네가 직접 보고 판단해. 잠깐의 동맹인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네. 알겠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고.

민치호는 최후의 판단을 내게 맡기며 마지막까지 지원을 약속했다.

많은 말이 아니더라도 든든하다.

“감사합니다. 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뭐지?

“아까 말씀하신 그 사건 납세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공무원에게 부탁해서 무마하려던 그 양도세 건이요.”

-이제학이 깔끔하게 끝냈어. 안 내려던 가산세를 포함해서 세금 다 내고 끝냈지.

그 부분은 해피엔딩이네.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전화를 끊고 교육원의 시간표를 꺼냈다.

이젠 장본인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

교육원장실.

두 명의 팀장이 손경진 앞에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서 있었다.

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팀장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손경진의 눈초리가 단번에 올라갔다.

“처음에 말했던 것과 다른데. 분명히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라고 하지 않았나? 교육생도 멍청이가 아니니 배워보면 알 거라면서? 교수들도 갑자기 뚝 떨어진 놈들 좋아하지 않을 거라며?”

“그게 맞는데…….”

팀장은 말꼬리를 흐렸다.

100번 생각해도 결론은 같았다.

강의가 개털인 건 배우는 사람이 가장 잘 안다.

겨우 고졸인 놈이 뭘 안다고 신입 공무원들을 가르치겠는가.

그래도 해온 행적이 있으니 교육생들에게 호감을 받고 있지만 금방 실력이 뽀록날 것이다.

교수들도 낙하산처럼 내려와 시간을 잡아먹는 신재현을 좋게 보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들의 예상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했다.

바로 신재현에게 실력이 없다는 것.

교육원에 있는 사람들이 신재현을 좋게 본다는 것은 결국 실력이 뒷받침 된다는 뜻 아닌가.

그것만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들의 대화는 계속 겉돌았다.

“정말 이상합니다. 원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잖습니까. 아니면 신재현이 정말 잘 가르친다는 뜻이 되는…….”

“조용히. 다른 멍청한 새끼들처럼 내 앞에서 신재현이 사실은 똑똑하고 어쩌고 할 거면 꺼져. 내가 원하는 건 신재현이 이 교육원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거야. 서론은 필요 없어.”

두 팀장은 고개를 조아렸다.

손경진을 오래 모신 사람들이다 보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배경이 어떻든 알 바가 아니니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방법이 없다, 손 놓고 보고만 있어야 한다, 난 이런 말을 제일 싫어해.”

팀장들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저희가 직접 손을 쓰겠습니다. 그쪽에서 요청하는 지원이 있으면 모두 끊고, 여론전 하겠습니다. 교육생과 교수 모두가 외면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한 명이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읊으며 시간을 벌던 중에, 나머지 한 명이 손뼉을 짝 쳤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일단 지금 필요한 건 신뢰도를 한 방에 쫙 깎아 먹는 거잖습니까. 제게 맡겨 주십시오.”

이미지를 깎는 건 쉽지만 도로 회복하기는 어렵다.

팀장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손경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따라온 건 고맙지만 손발로 쓰기에는 좀 부족했다.

‘내가 직접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 놈들에게 맡겨야 한다니.’

하지만 거창한 무언가를 꾸미는 것도 아니고 겨우 좌천당한 놈 하나 궁지에 모는 것뿐이다.

손경진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하고 좋은 소식만 가져와.”

***

수업을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온 이제학은 목을 꽉 죄고 있던 넥타이를 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있던 수업이 다 끝나자 지금까지 잊고 있던 피곤이 몰려왔다.

새벽까지 깨어 있었기 때문인지 의자에 앉아 따뜻한 오후 햇살을 쬐고 있자 절로 눈이 감겼다.

혹시 몰라 이미 교육원 내의 세력도는 새벽까지 잠을 설쳐 가며 작성해 두긴 했다.

지금쯤 한창 자신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루 만에 찾아올 리는 없다고 생각한 이제학은 잠시 눈을 붙였다.

‘과장님. 저 한 번만 살려 주세요.’

‘살려 달라니? 이봐요, 김 팀장. 애초에 그런 불법적인 얘기는 수락을 하지 말았어야죠. 이제 와서 나까지 불법에 손을 담그란 말입니까?’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세무서 내에서 우편물 분실하는 사례도 꽤 있고, 이런 식으로 뒤늦게 받아서 처리하는 경우도 있잖습니까. 과장님께 아무런 피해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들키지 않을 거라고 단언합니까? 이미 저한테 들켰습니다. 눈썰미 있는 사람이 보면 알 텐데. 세무서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요? 이건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납세자에게는 잘 설명하고 원칙대로 접수하라고 하세요.’

‘이번 일에 제 목숨이 걸려 있습니다. 과장님, 제발 모르는 척해 주세요……!’

불편한 자세로 선잠이 든 것 때문인지, 아니면 손경진과 신재현 때문인지.

이제학은 의자에 몸을 묻은 채로 악몽을 꾸었다.

팀장이 간절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빌던 것.

자신은 당연하게도 그 요청을 거절했다.

가산세 내기 싫다고 뒷구멍으로 받아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매우 당연한 것이었는데.

잘 나가는 세무공무원이던 팀장은 그 길로 앞길이 끝장났다.

팀장이야 본인이 잘못된 선택을 했으니 그렇다 치자.

잡음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올바르게 일을 처리한 자신을 좌천시킬 정도로 손경진에게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뒤돌아 생각하면 자신만이 아니었다.

중부청장 손경진의 입김이 미치는 곳에서는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사람이 그만둬도 매년 새로운 공무원이 들어온다.

그런 생각이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처분이었다.

‘과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은퇴하신 과장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합니까. 저 이번에 수습 못 하면 끝장납니다.’

‘그냥 납세자한테 세금 제대로 내라고 하고 감봉 몇 개월로 끝날 일인데 너무 호들갑 떨지 마세요. 이번 기회에 잘 배웠다 생각하고 앞으론 이런 일 하지 마시고.’

-똑똑.

꿈과 현실이 섞였다.

팀장과 나눴던 대화가 자동으로 재생되는 한편 누군가가 교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얕은 잠에서 깨어나며 팀장의 절규가 볼륨이 줄어들듯 조금씩 작아졌다.

‘위에서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겁니다. 신발에 조그만 오물이라도 튀는 걸 싫어하는 분이에요. 겨우 이걸로 저 나락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과장님 제발!’

저기서 뭐라고 대답했더라.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헛소리하지 말라고 일갈했던 것 같다.

얼마나 높은 분인지는 몰라도 일선 세무서의 팀장을 신경 쓰겠냐고.

“으으음.”

이제학은 신음과 함께 잠에서 깼다.

시간은 겨우 10분 지나 있었다.

정말 잠깐의 시간 동안이었는데도 피곤이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머리가 아파졌다.

-똑똑똑.

하지만 지금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처음 문을 두드린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이제학은 서둘러 대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청년을 보자마자 이제학은 눈을 크게 떴다.

예상했던 것보다 빨랐다.

“시간 되십니까? 잠시 대화 가능하실까요?”

신재현과 그 뒤에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능력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학은 소문으로만 들어본 ‘국세청 3대 파벌’의 편린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민치호의 지원을 받는 신재현이 정말 손경진을 상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스쳤다.

“시간이야 넉넉합니다. 앉으세요.”

새벽에 잠을 줄여 가며 세력도를 완성한 보람이 있었다.

이제학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일어나 책장 한쪽에 끼워둔 종이 다발을 꺼냈다.

선물이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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