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63화 (263/500)

263화. 적으로 돌리기는 쉽다 (1)

교수 휴게실을 나온 후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정말 오랜만이네요.”

“서로의 속을 떠보는 싸움 말입니까?”

바로 뒤에서 걷던 황민우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서 나와 나란히 걸었다.

“교육원에 계신 분들이라 어리숙할 줄 알았더니 저런 분도 계시네요.”

“알아서 조사해 보라고 할 정도고요.”

“그렇죠.”

이제학은 내게 자세한 사항을 알아서 조사해 보라고 했다.

자기 입으로 자신에 대한 정보를 말하면 객관성을 잃으니 내게 배턴을 넘긴 것이다.

내 쪽의 정보력이 어디까지 닿는지 보겠다는 뜻도 된다.

“원래는 이제학 교수님이 하는 말을 들어보고 성향을 가릴 생각이었는데 말이죠.”

정보는 한 사람을 거칠 때마다 가공되기 쉽다.

더욱이 자신에 대한 거라면 사적인 감정이 섞이기 마련이고.

거기서 이제학 교수가 적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느 부분에서 감정적이 되는지 알아보려 했는데.

황민우가 작게 읊조렸다.

“쉬운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팀장님이라면 얼마든지 떠볼 방법이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긴 하다.

도발하면 감정이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까 거기서 민감한 키워드를 골라낼 순 있겠지.

하지만 그건 아껴 두기로 했다.

“우리 편이 되어 주겠다고 먼저 나선 사람입니다.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겠죠? 조사해 보라고 말까지 한 걸 보면, 이력 사항 캐다 보면 금방 알 문제라는 뜻입니다. 진짜 목적이 있는지, 아니면 정말 순수하게 절 도우려는 건지는 차차 살펴보도록 하죠.”

그래도 이제학과의 대화에서 얻은 게 있긴 했다.

손경진과 그 패거리를 언급할 때 미세하게 증오가 보였다.

-아무리 국세청에 파벌이 있고 정치질이 있다고 해도 벌써부터 그런 꼴을 보여 줄 필요는 없잖아요.

“정치질, 그런 꼴. 단어 선택에서 감정이 느껴졌어요. 뭔가 있던 건 분명합니다.”

“꾸며냈을 가능성은요?”

“좌천된 7급 공무원 하나를 잡기 위해 편을 드는 척하고 신뢰를 얻는다? 흠, 제가 서울청에 있다면 가능한 얘기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군요. 원장 대 특강 선생. 둘 다 좌천됐다 해도 누가 우위에 있는지는 뻔하잖아요?”

“그럼 믿어보겠다 이 말씀이시군요.”

“돌다리도 두들겨 보라고 했으니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조사는 해야죠.”

나는 핸드폰을 꺼내 민치호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민치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다.

“안녕하세요, 청장님. 무탈하시죠?”

-나보단 신 팀장이 무탈해야지. 그래, 지낼 만한가?

“자세한 보고를 드릴 타이밍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통화하시고, 지금은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든지.

내가 급하다는 티를 내서인지 민치호의 말도 짧아졌다.

“교육원 교수 중에 이제학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배경이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로?

“교육원에 온 이유가 알고 싶습니다만…… 이력 사항은 자세할수록 좋겠군요. 무슨 건을 맡았고 누구랑 줄을 댔고 어디서 삐끗해서 여기까지 왔는지요. 경기권의 재산세과장이 교편을 잡는 데는 뭔가 큰 각오가 있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필요한가?

“급하진 않습니다. 확인 차 필요해요.”

급한 거라고 하면 아마 무리를 해서라도 오늘 내로 결과가 올 것이다.

급하지 않다고 해도 이삼일은 넘기지 않을 사람이다.

-좋아. 알게 되는 대로 보내 주지. 자세한 얘긴 그때 듣자고.

민치호는 가벼운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언제나와 같은 민치호라 안심이 되었다.

바로 옆에 있는 것과 같은 든든함이다.

“그럼 이제 메인이 어쩌고 있나 가볼까요?”

나는 넥타이를 꽉 조였다.

이제 내가 맡은 감시대상이자 내 적수가 될 사람, 교육원장 손경진을 만나러 갈 차례이다.

황민우 역시 긴장된 얼굴로 옷매무시를 정돈했다.

그러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이번에 원장을 만나서 인사만 하실 건 아니잖아요.”

머리싸움 하기 전에 이제학 교수를 만난 것이 조금 도움이 됐나 보다.

예행연습 때문인지 뇌가 조금 풀린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면 손경진 상대로도 밀리지 않을 것 같다.

그것도 그렇고…….

“생각해보니 웃기잖아요. 무려 국세청 수장 자리를 노리시던 분이 이제는 제 적수 취급이라니. 얼마나 아래로 처박히신 건가 싶어서요.”

황민우는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피더니 뒤로 슬며시 물러났다.

이것도 나에 대한 배려인가?

나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우리의 적이 계신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

-똑똑.

원장실의 문을 두드렸을 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인기척은 분명 느껴진다.

왜냐하면 문을 두드리기 직전까지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렸으니까.

문 때문에 잘 들리지는 않지만 안에 있는 건 확실하다.

그런데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길들이기를 하시겠다……?”

내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황민우가 안에 들리지 않도록 낮게 물었다.

“벌써 시작인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오시겠습니까?”

여기서 끝까지 기다리는 것은 하수다.

권력자가 아랫사람을 괴롭힐 때나 쓰는 방법이지.

그래서 황민우가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면 나중에 온다고 만나줄까?

나는 5초라는 시간을 더 센 후,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역시나 안에는 손경진 원장이 있었다.

그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아까 본 두 명의 팀장이 소파에 앉아 있다가 화들짝 놀라 몸을 바로 세웠다.

“아니, 신 선생. 이게 무슨 버르장머리입니까? 어딜 감히 함부로 들어와요?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청장실이라면 감히 이런 짓을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손경진은 내가 기 싸움을 해야 하는 대상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시치미를 뚝 뗐다.

“아, 죄송합니다. 안에서 무슨 말소리가 들리길래 저에게 들어오라고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문이 두꺼워서 잘 안 들렸네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신 선생이 서울청에 있었다면 민치호 청장에게 이렇게 대했겠습니까?”

오, 은근슬쩍 민치호 직함에서 ‘님’을 빼네.

원래는 사과하고 지나가려 했는데 이건 못 참지.

조금 더 들이받아 볼까.

“서울청장실이라면 그냥 들어가는데요? 민치호 청장님하고 저라면 그래도 되거든요.”

“하, 말이 안 통하네.”

손경진은 눈앞에서 팀장과 7급이 말싸움하는 초유의 사태가 펼쳐지는데도 모르는 척 창밖만 바라보았다.

나는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팀장 둘이 벌떡 일어나자 황민우가 재빨리 내 뒤로 붙어 그들을 견제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죠?”

손경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빨 빠진 호랑이인 줄 알았더니 그 눈빛에는 아직 살기가 살아 있었다.

하긴, 수십 년 간 구르던 사람이 갑자기 총기가 사라질 리가 없지.

반대로 말하자면 아직 희망을 보고 있다는 뜻인가.

“세무직 7급 주사보 신재현, 8급 서기 황민우. 국세공무원교육원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손경진은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 침묵에 응하듯 내가 사과를 건넸다.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제는 주말이었고 오늘은 아침부터 강의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는 대로 바로 달려온 겁니다.”

손경진은 황민우에게는 시선조차 보내지 않았다.

대신 다짜고짜 찌르듯 물었다.

“신재현, 네가 내 감시자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도 좌천된 겁니다. 끈 떨어진 연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문짝 열고 들어온 거 보면 좌천된 것 같지가 않던데.”

“오해십니다. 제가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도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손경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힘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얌전히 지내라고?”

귀신 같이 그걸 잡아내네.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저는 여기 있는 동안 조용히 지낼 생각인데 관사에 들어온 첫날 저기 앉아계신 팀장님 두 분께서 도발을 하시지 뭡니까. 제가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글쎄. 너 하기에 달린 거 아닌가?”

“제가 뭘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말씀해주시면 새겨듣겠습니다.”

부드럽게 웃어 보였지만 손경진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지금 이 분위기, 아슬아슬하다.

나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의 선 안으로 반 발짝을 내디뎌 보았다.

“솔직히 제가 잘못한 게 있습니까? 원장님께서 절 미워하실 이유가 있나요?”

“잘못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나?”

한참 아래인 직원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만 해도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조금 도발하자, 과연 손경진은 반응이 왔다.

-우드득.

손경진의 손에 들려 있던 연필이 부러졌다.

그 파편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 선물이 맘에 들지 않았나? 그래, 뭐 그럴 수 있어. 그럼 적어도 기만은 하지 말았어야지. 우리가 좋은 사이를 유지하길 원해? 겉으로는 나를 밀어주는 척 모든 공격을 내게 쏠리게 해 놓고 뒤로는 오낙현과 손을 잡았잖아. 이미 그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야.”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손경진의 생각을 확인했으니 더는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저는 원장님의 평화롭고 명예로운 은퇴를 원합니다. 평생을 국세청과 함께하신 분 아닙니까. 제가 존중해 드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신 선생! 지금 감히 원장님께 그런 말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습니까!”

손경진 대신 두 팀장이 화를 냈지만 어차피 요란하게 짖는 개는 관심이 없다.

사실 진짜 무서운 건 팀장들처럼 티내고 다니며 시끄럽게 구는 사람들이 아니다.

조용히 남 찌르고 다니는 손경진 같은 사람이 무섭지.

선물로 권현아를 몰락시켜 주겠다고 한 사람이니까.

그러니 지금 손경진이 속내를 드러낸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내가 건방지게 굴었으니 손경진 입장에서 못 견딘 건 이해하지만, 그만큼 손경진이 감정적 동요가 심하다는 뜻도 되니까.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또 뵙죠.”

역시 팀장들은 혀만 찰 뿐 나를 막지 않았다.

원장실을 나오자 황민우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이상하네요.”

“음? 뭐가요?”

“오히려 이제학 교수님과의 대화가 더 긴장됐던 것 같습니다. 제가 손경진 원장님 뵙는 건 처음입니다만 원래 저러셨습니까?”

“적으로 돌리는 건 쉽지만 마음을 얻기는 어려운 법이니까요. 이제학 교수님을 아군으로 돌리려고 작정하니까 어렵죠.”

원장실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후, 나는 황민우에게 지시했다.

“형. 당분간 좀 바쁘게 돌아다녀야 할 것 같은데요.”

“말씀하십시오.”

“교육원 내의 여론을 알고 싶네요. 아무리 평화로운 곳이라도 사람은 친하게 지내는 관계도가 있는 법이잖아요. 이제학 교수님 말씀 들어보면 파벌까지는 아니겠지만. 누가 저를 적대할 가능성이 있는지 성향을 파악하고 싶습니다.”

교육원이라고 해도 다 순진한 사람만 모여 있는 건 아닐 테니까.

갑작스럽게 날아와 물을 흐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아니면 그냥 애초에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알겠습니다.”

황민우는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그럼 나도 여론전을 좀 해 볼까.”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교육원 전체를 둘러볼 차례다.

***

신재현의 강의가 있었던 직후.

다음 수업은 법인세였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교수가 담당하는 수업으로 배울 것도 많고 숙제도 많기로 악명 높았다.

신재현 수업의 바로 다음 수업인지라 교수 휴게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니, 시간이 있다 쳐도 신재현이 있던 휴게실에는 가지 않을 성격이었다.

그런 것에는 관심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저 교육생들을 가르쳐 내보내는 것에 자신의 소명을 바친 사람.

교육원을 떠나면 교육생과의 관계는 그걸로 끝이다.

그 이후는 동등한 공무원이자 실무자이다.

그러니 신재현에게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잘 하고 있구나, 내가 잘 가르쳤군.

뉴스를 보면서도 감상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저 가르치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

그런 교수는 교육 중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교육생들이 눈에 띄게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옆자리 학생과 떠들기도 했고 쪽지를 주고받기도 했으며 간혹 핸드폰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학생이 집중을 못 하면 가르치는 사람도 영향을 받는다.

교수는 조용히 칠판에 사례를 주르륵 적었다.

한눈에 성격 파악이 어려운 비용들이다.

열댓 개의 사례를 적은 후 법인세 교수는 조금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이와 같은 사례가 있을 때, 접대비조정명세서는 어떻게 작성됩니까?”

실무를 섞어 낸 문제였다.

지금의 교육생에게는 벅찬 것이었다.

의도는 명확했다.

너희들의 실력은 아직 한참 부족하니 수업에 집중해라.

그런 메시지였다.

의도했던 대로 교육생들의 시선이 단숨에 칠판으로 모였다.

그런데 고민에 빠져야 할 교육생들의 얼굴에 왜인지 화색이 돌았다.

“아! 교제비, 사례금, 기밀비 명목에 상관없이 다 접대비로 넣으면 돼요.”

“구분법이 뭐랬더라? 불특정다수를 위한 지출이고 사업 연관이면 광고 선전비, 사업 연관인데 거래처를 위한 거면 접대비, 사업하고 관계없는데 특정인에게 지출한 거면 기부금입니다!”

이제 말문이 막힌 것은 교수였다.

세법을 가르치는 것은 맞지만 이 많고 복잡한 과목을 겨우 16주 안에 완벽하게 주입하기는 어렵다.

흔히 이론과 실무가 다르다고들 하지 않는가.

지금 시점에서 교육생들이 이렇게 정확히 칠판에 쓰여 있는 비용을 구분하긴 쉽지 않은데.

“혹시 다른 교수님이 구분법 알려줬습니까?”

과목이 다르더라도 간혹 자기 담당의 진도를 나가다가 다른 과목도 언급하는 교수가 있다.

그런 건가 싶었는데 교육생들은 신난 얼굴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신재현 선생님 수업에서 알려주셨어요. 실무에서 구분법이라면서요.”

“신재현이라고 했어요, 지금?”

교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