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네 편 내 편 (2)
-달칵.
“여깁니다.”
이제학은 한층 아래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책꽂이마다 세법책이 가득하고 자그마한 테이블 위에는 이면지가 가득했다.
휘갈겨 쓴 손글씨로 법조문과 판례 번호가 잔뜩 적혀 있었다.
수업자료를 만들던 도중이었는지 교재도 펼친 채로 놓여 있었다.
이제학은 대충 종이를 모아 한쪽에 쌓아 두더니 의자를 가리켰다.
나와 황민우가 앉자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중요한 얘기할 건데요.”
사람을 물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학의 얼굴에서 불쾌함보다는 호기심이 느껴졌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싶은 것 같았다.
“압니다. 제 동행을 말하는 거라면, 그냥 말씀하셔도 됩니다.”
이제학의 시선이 황민우에게 닿자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신문 기사로 보긴 했는데. 충성도는 믿어도 되죠?”
“제가 숨기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좌천이라는 걸 알고도 꾸역꾸역 제주도까지 따라왔잖습니까.”
“하긴, 원장님 따라온 사람도 딱 둘밖에 없는데. 그 나이에 벌써 심복이라. 신 선생이 인물이긴 합니다.”
우리의 대화에는 서론이 없었다.
그는 거리낌 없이 정치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나 또한 정치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교육원의 학자들과는 전혀 달랐다.
적어도 진흙탕에 발을 담가 본 사람이었다.
“커피?”
이제학이 한쪽에 마련된 커피포트를 들자 황민우가 당연하게 일어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어이쿠, 진짜 수발 다 드네. 이쪽 조사관님이 나이 더 많은 거 맞죠? 거참, 신기하단 말이야.”
나는 그저 미소 지었다.
황민우가 일부러 일어나 시중을 자처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학은 꽤 정치적 대화에 익숙해 보였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부족한 내가 밀릴까 봐 내게 권위를 실어주려는 것이다.
누군가를 거느린다는 것은 내가 그보다는 위에 있다는 것을 뜻하니까.
이런 점에서는 황민우가 판단과 행동이 빠르다.
“교수님은 파벌 싸움 좀 해 보신 것 같습니다.”
“호오, 그것도 보입니까?”
“계산에 밝아 보여서요. 보통은 아까 같은 자리에서 그렇게 적아를 구분해주지 않습니다.”
“적아 구분이라. 그것도 금방 알아들으셨다는 뜻이겠고.”
“알아들으라고 대놓고 떠 먹여주다시피 하신 것 아닙니까. 그 팀장 둘이 손경진 원장님의 사람이라고. 너무 노골적이어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전부 눈치챘을 겁니다.”
내 말에 이제학이 피식 웃었다.
“그 학자분들이요? 아뇨, 전혀 모를 거예요. 공부밖에 모르는 분들이라.”
“적어도 팀장 둘은 눈치챘겠죠. 교수님께서 제게 정보를 줬으며, 어쩌면 손경진 원장님과 적대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요.”
“뭐, 그렇겠죠. 그 둘은 중부청에서 라인 타면서 열심히 치고받고 하다 온 사람들이니까. 그거 눈치 못 채면 서귀포 앞바다에 빠져 죽어야지.”
이제학의 얼굴에 씁쓸함과 비웃음이 동시에 떠올랐다.
저런 반응을 보면 교육원에서만 내내 있었던 사람 같지는 않은데.
어차피 서로 다 터놓고 말하는 분위기니까 내가 조금 더 찔러본다고 해도 불쾌해하진 않겠지?
나는 계산 끝에 물었다.
“원장님 눈 밖에 날 수도 있습니다. 두 팀장이 이미 휴게실에서 이상함을 느꼈을 테니까요.”
“그러라고 하죠.”
-달각.
때마침 황민우가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잠시 대화가 멈췄다가 황민우가 옆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기습적으로 물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음? 다짜고짜 그거? 질문이 너무 빠른데.”
“교수님이 어디서 일하셨고 어떤 파벌이었기에 이렇게 잘 아시냐고, 그런 질문을 먼저 할까요? 하지만 원하시는 걸 여쭈면 그건 자연스럽게 답을 알게 될 것 같은데요.”
“허…….”
이제학이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탄식 비스무리한 것을 내뱉었다.
그는 심정을 숨기듯 커피를 들이켰다.
“이런 괴물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혹시나 싶었는데 진짜 원장하고 1:1도 가능할 것 같네.”
이제학은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았다.
혼잣말이었지만 그는 자기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깊은 탄식을 내뱉은 이제학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에 대해서는 어차피 조사할 거 아닙니까.”
앗, 들켰다.
대놓고 호의를 보이는데 배경 조사는 필수다.
“자세한 건 알아서 찾아보시고, 제 이력 사항만 간략하게 말해 드리죠. 고양세무서, 동수원세무서, 성북세무서 등등 돌다가 성남세무서 재산세과장으로 있었습니다. 약 5년 전에 교육원에서 교편을 잡게 됐죠.”
역시 그랬군.
주로 수도권을 돌던 사람이라면 꽤 잘 나가던 인재다.
특히 재산세과장이라면.
“제가 전적으로 신재현 선생의 편을 들어주는 건 아닙니다. 제 목적은 교육원의 평화예요.”
저 말에서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설마 그 전에는 교육원에 파벌 싸움 같은 건 없었다는 겁니까?”
“당연하죠. 후학 양성하는 곳에서 무슨 싸움입니까.”
“후학은 곧 미래니까요. 자기 사람 만들기 가장 쉬운 곳 아닙니까?”
“이분 정말 무서운 얘기 하시네. 내가 지금 누구랑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구만.”
이제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는 약간 불문율 같은 게 있어요. 신입들 있는 곳이니까 서로 손대지 말자, 그런 거요.”
그럴듯한 이야기다.
나 같으면 당장 교육원에서부터 스카우트하거나 라인을 형성할 것이다.
여기는 모든 세무공무원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이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새싹들은 픽업하기도 좋고 물들이기도 쉽다.
내가 아는 것을 윗분들이 몰랐을 리는 없고.
이제학 말대로 파벌들끼리 자제했거나 국세청장이 손대지 못하게 억누른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 있다.
신입을 교육하는 요람에서부터 라인전이 시작되면 그 조직은 망해도 싸지.
“교육원은 평화로웠어요. 손경진 원장님과 신 선생님이 나타나기 전까진요. 여기는 절대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신입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 아무리 국세청에 파벌이 있고 정치질이 있다고 해도 벌써부터 그런 꼴을 보여 줄 필요는 없잖아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나는 이 교육원이 신입 공무원들에게 있어 깨끗한 국세청의 모습만을 보여 주길 바랍니다. 한마디로 신 선생이 정리해 주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를 위해서라면 협조해드리죠.”
목적은 이치에 맞는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은 남았다.
“왜 제 편을 들어주시는 겁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원장님과 일개 7급 공무원인 저라면 싸움이 될 리가 없잖습니까. 둘 중 하나를 정리하면 끝나는 것이니, 원장님을 도와 저를 치는 게 더 쉽지 않겠습니까.”
이제학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죽은 권력인 손경진 원장님에게 붙으라고요? 살아 있는 민치호 청장님을 놔두고? 원장님 쪽은 머리가 잘려나갔지만 그쪽은 서울에 멀쩡하게 계시잖습니까.”
“제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진 않으시나 봅니다. 다들 그렇게 보던데요.”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다가 앞길 막힌 놈.
관사에서 만난 두 팀장은 내게 그렇게 칭했다.
그게 아마 보편적인 인식일 테고.
그런데 이제학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정말 버릴 거였으면 징계 위원회 때 해임하거나 정직 처분했을 겁니다. 압박이 많은 상황에서 굳이 교육원 발령을 고집할 이유가 없죠.”
옆에서 황민우가 자그맣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이제학의 눈은 놀랍다.
정세를 날카롭게 파악하는 것도 그렇고, 어쩌면 여기 있는 동안 이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민치호에게 도움이 되는 인재일 수도 있고.
“여기 있는 동안 손경진 좀 끽소리 못 하게 해 주시면 좋고. 그렇다고 너무 크게 일을 벌이진 마세요. 서울에서 하던 것처럼 교육원 뒤집으면 저 정말 화낼 겁니다.”
“……노력하겠습니다.”
“허, 뒤집을 생각이었나 보네요.”
이제학이 혀를 끌끌 찼다.
“적어도 교육생들이 무언가를 눈치채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1, 2년 차일 때 윗선에서 알게 모르게 처리해 줬던 것처럼 나도 후배님들을 위해 그렇게 할 것이다.
“이 교수님, 대신이라긴 뭣하지만 여기 있는 동안 교수님께 의지해도 되겠습니까?”
“의지?”
“부탁드려도 되겠냐는 뜻입니다.”
“뭐를요?”
“여러 가지요. 예를 들어서 두 팀장과 친한 사람들, 손 원장의 동향 같은 것 말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이제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먼저 말 꺼냈으니 그 정도는 해 드려야겠죠. 어디 저도 신 선생의 그 솜씨 한 번 구경해 봅시다.”
그렇게 기대할 것까지야.
손경진이 움직이지 않으면 나도 딱히 먼저 칼을 들이댈 생각은 없는데.
그래도 이 만남은 꽤 유익했다.
나는 씨익 웃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럼 저는 어디 그 장본인을 뵈러 가볼까요. 발령받았다고 원장님께 인사는 드려야 하니까요. 얼마나 환영해 주실지 기대됩니다.”
이제학이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
신재현이 나간 후, 이제학은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워서는 아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였다.
“저건 대체 뭐 하는 괴물이야? 허, 민치호 이 사람 정말 미쳤구만.”
이제학의 혼잣말이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상이 아니었다.
세상에 어느 3년짜리가 저런 시야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말이 있다.
1년 차엔 적응하고 사고 치느라 바쁘고, 2년 차엔 이제 좀 익숙해졌다 싶어 내키는 대로 하다 사고 치느라 바쁘고, 3년 차엔 아는 척하다 사고 치기 바쁘다고.
낮은 연차일 때는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고, 거기서 일머리 있는 놈이 적응을 빨리하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뭔가.
직접 만나 보니 어려 보이는 겉모습에 넘어가면 큰코다치겠다 싶었다.
이 판에서 꽤 굴러본 냄새가 났다.
판단력이며 시야가 단순한 말단 공무원 수준이 아니었다.
공무원도 오랫동안 묵다 보면 여의도에서 나는 냄새를 풍기게 된다.
이제학은 방금 그 청년에게서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노회한 정치인에게서 나는 그런 냄새 말이다.
“제법이네. 역시 괜히 민치호의 왼팔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어. 그 이선균 과장을 오른팔로 거느린 민치호 청장이 아무나 심복으로 거둘 리가 없지.”
덕분에 이제학은 확신을 가졌다.
민치호는 절대 신재현을 버린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뒤집어지고 여의도에서 외압을 넣는 와중에 교육원 발령으로 끝냈다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그런데 오늘 직접 만나 보고서야 알았다.
이건 정말 좌천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의외로 자신의 생각보다 빨리 신재현이 서울로 복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공격이 쏟아지니까 잠깐 무대에서 내렸다는 건가? 자신들이 방패 역할을 하고? 허, 그렇게나 아낀다 이거지.”
이제학은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치질을 피해 도망친 곳에서 또 싸움에 휘말렸으나 왠지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대감에 두근거렸다.
이제학은 이제 떠나고 없는 신재현이 앉았던 빈 의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왜 네 편을 드냐고 물었지? 아주 간단해. 그놈들은 해악이거든.”
제주도로 온 이후 평생 마주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손경진과 그 일당들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들이 꺾이는 모습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신재현은 자신의 이력에 대해 조사할 것이다.
그러면 그때야말로 진짜 협력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고.
일부러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직접 조사해 보는 것이 더 객관적이고 신뢰성 있으니까.
“아, 원장실에서 무슨 얘기가 오가려나.”
단순히 인사만 할 리는 없다.
얼마나 살벌한 눈치싸움이 벌어질까.
이제학은 당장 원장실로 달려가 구경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눌렀다.
다음에 신재현이 찾아오면 줄 선물을 미리 마련해 둬야 했다.
예를 들면 현재 교육원에 있는 직원들의 성향과 세력도, 각 직원들끼리의 친분 같은 것들 말이다.
이제학은 이면지를 꺼내 망설임 없이 휘갈기기 시작했다.
꽤 악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