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59화 (259/500)

259화. 교육원 (2)

민치호가 신재현을 교육원에 보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명목상이라도 좌천된 척을 해서 불타오르는 여의도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혹시라도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각오로 국세청을 엎어버릴지도 모르는 전 중부청장 손경진에 대한 감시와 견제.

마지막으로 신재현이 평화로운 제주도에서 힐링하며 회복하길 바라는 자그마한 배려.

이 셋 다 중요했지만 이미 제주도로 내려보낸 시점에서 민치호가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잘 먹고 잘 쉬고 와라.

어차피 손경진은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으니 신재현이 얼굴만 들이밀어도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제주도는 섬 아닌가.

남들 눈에 띄지 않고서 몰래 누구를 만나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사실 강의 자체는 목적에 들어가 있지도 않았다.

대충 하는 시늉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민치호 역시 신재현의 강의에 그닥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막상 신재현이 받아들인 중요도는 달랐다.

높으신 분들이야 여의도에서 지들끼리 열을 내든 말든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남은 일은 민치호가 알아서 수습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손경진도 관심 밖이다.

신재현에게 있어 관심사는 탈세범뿐이니까.

손경진이 헛짓거리만 하지 않으면 자신이 현재 모셔야 할 상사 아닌가.

그래서 현재 신재현이 가장 신경을 쏟은 것은 특강에 대한 것이었다.

공무원 시험 자체는 사실 국어와 국사, 헌법, 경제학 등 실무에서 그닥 필요 없는 과목이 끼어 있다.

그래서 교육원에서 세법을 집중 교육함으로써 교육생들의 수준을 끌어올린다.

실제로 실무를 뛰어본 신재현으로서는 교육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배운 것이 나중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도.

‘그렇다면 나도 아는 건 다 알려 주고 가야지.’

남들은 신재현이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할 거라느니, 부담스러울 거라느니 예상을 펼쳤지만 정작 신재현은 잔뜩 신난 상태였다.

신재현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첫 수업을 위해 복도를 걸었다.

옆에는 언제나처럼 황민우가 함께였다.

“부담스럽지 않으세요?”

신재현이 예상외로 밝아 보이자 황민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는 보좌로 가는 것뿐인데도 괜히 긴장하고 있었다.

“세무조사 가던 거랑은 다르잖아요. 자료라도 쥐여 주고 가르치라고 하든가. 청장님이랑 교육원장님도 좀 무책임하신 것 같습니다.”

“그만큼 기대 안 한다는 뜻이잖아요. 그럼 뭘 해도 상관없다는 거 아니겠어요?”

“엄청 긍정적이시네요.”

“차라리 편안합니다. 아무것도 안 줬으니 제가 뭘 어떻게 가르치든 터치 안 할 테니까요.”

신재현의 대답에 황민우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다.

보통 신재현이 이렇게 나오는 경우에는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요. 교육원에서 세법은 아주 빡세게 가르치잖습니까. 법소부, 상증양도 등등. 그럼 저는 세법이 실전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는 거론할 필요도 없어요. 제가 어떻게 가르치든 지금 교수님들보다 잘 전달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분들은 몇 년씩 근무하시면서 교육생들 가르치시는 분이니까.”

“하지만 과목 이름이 조사 실무입니다. 결국 세법이 일선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우리가 어떻게 조사를 하는지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바로 그거죠. 앞에 거는 말고. 세법 적용은 교수님들이 사례 들어가면서 가르치고 계실 테니까. 우리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이겁니다. 실제로 어떻게 했는가.”

신재현은 정장 재킷의 단추를 잠그며 넥타이를 가다듬었다.

세무서와 서울청에 있을 때는 하도 야근에 찌들어 사느라 정장을 입어도 구겨져 있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은 구김 한 점 없었다.

나름 교단에 서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어젯밤 빳빳하게 다려 놓은 것이다.

황민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종이 먼지와 커피 얼룩, 형광펜 등에 군데군데 빛바랜 것처럼 보였던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 입었다.

“먼저 세무조사에 들어가면 어떻게 하는지부터 알려주도록 하죠.”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신재현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교육생들을 전부 일어나게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교육생들과는 달리 황민우는 바로 사태를 파악했다.

“지금 즉시 모든 교육생 여러분은 소지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벽으로 붙어 서십시오. 핸드폰, 펜, 종잇조각. 그 어떤 것도 소지해선 안 됩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재현과 황민우, 둘의 표정이 일변했다.

공무원은 보통 차림새나 행동거지만 봐도 공무원이라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둘은 상대를 위축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몸에 배어 있었다.

신재현이 맨 앞에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교육생들을 훑는 사이, 황민우가 책상 사이사이를 돌아다녔다.

상황 파악이 안 되어 자리에서 엉거주춤하던 교육생들도 신재현의 시선이 한 번 훑고 지나가면 벌떡 차렷 자세로 일어서서 벽으로 향했다.

“거기. 앞에서 두 번째 안경 쓴 남자 교육생분. 이어폰도 놓고 일어나십시오. 황민우 조사관님이 뒤에서 지켜볼 겁니다. 그 어떤 것도 들고 일어나선 안 됩니다.”

“맨 뒤에서 세 번째. 창가 자리 앉은 여자 교육생분은 지갑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80명에 달하는 교육생을 단 두 명이서 파악해내고 있었다.

물론 완벽하게 80명을 체크하기란 어렵지만 실제 현장이 아니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 현장에서는 어떻게든 불리한 서류나 USB를 숨기려고 소매 속에 넣기도 하고 앞에서 다른 직원이 가리거나 방해하는 등, 굉장히 복잡했다.

그런 곳에서 단련된 눈썰미다.

순순히 지시에 따르는 교육생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은 둘에겐 쉬운 일이었다.

교육생들이 전부 창가나 벽, 뒤쪽 공간으로 나가 서며 주눅 든 표정으로 신재현의 말을 기다렸다.

‘생각했던 거랑 좀 다른데. 실제 사례 들면서 수업하는 거 아니었나?’

‘뭐야, 훈훈한 얼굴을 왜 저렇게 쓰는 거야. 아니, 애초에 저 얼굴로 저런 분위기를 만들 수도 있구나.’

‘선생님한테 혼나는 기분이다…… 신재현이 나보다 어릴 텐데. 진짜 무섭네. 괜히 저승사자라고 하는 게 아니구만.’

단 3분 만에 모든 교육생들의 시선이 신재현에게 향했다.

다음으로는 무엇을 보여줄지, 지금 이 행동의 의도는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감정이 섞였다.

엄청난 집중도였다.

신재현은 강의실에 비치된 마이크를 집어 들더니 정장 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이게 보통 세무조사차 현장에 나갔을 때 하는 수순입니다. 국세기본법에 따르면 우리 세무공무원은 납세자가 작성한 장부를 믿음으로서 그를 기반으로 조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실제로 나가보면 종이 찢어서 버리고, 안 보이는 데서 USB 숨기고 지갑에 영수증 숨기고 아주 난리 납니다.”

신재현은 차분한 걸음걸이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가까이에 선 교육생들과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강의실 가운데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현장 조사는 보통 거의 없는 일이에요. 그러니 현장에 나갔다는 것은 곧 탈세 정황이 보여서 우리가 그 증거를 가지러 간다는 뜻입니다. 납세자에 대한 믿음?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우리는 그 선량한 납세자 사이에서 한 명의 탈세범을 찾아내야 합니다.”

신재현과 눈이 마주친 교육생 중 누구는 열띤 눈빛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고 누구는 그 날카로운 시선에 눈을 돌렸다.

그중 한 명 앞에 선 신재현은 교육생을 뒤돌게 했다.

바지 뒷주머니에 핸드폰이 꽂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놓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현장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전쟁이에요. 핸드폰, 지갑, 종잇조각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들고 나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직원들 나가게 한 후에 몸수색도 하나요?”

열정적인 한 교육생의 질문이었다.

신재현은 그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수사기관이 아니에요. 그런 권한은 없습니다. 그러니 문 열고 들어가는 순간이 중요한 겁니다.”

교육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실 저는 여기서 아주 큰 실수를 하나 했습니다. 뭘까요?”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겠다, 신재현은 천천히 교육생들 앞을 돌아 다녔다.

교육생들의 시선이 신재현을 따라 왔다 갔다 했다.

잠시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신재현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힌트입니다. 우리는 공무원이죠. 공무원이 가장 중시해야 할 건 뭡니까?”

그러자 이번엔 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절차요?”

“맞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 항상 이걸 생각하셔야 합니다. 절차. 국세청은 수사기관은 아니지만 나름의 조사권이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막강한지는 직접 겪어보면 잘 아실 거예요. 권력 남용을 막는 최소한의 방지 장치가 절차인 겁니다.”

신재현은 강의실 한가운데에 서서 손에 든 종이를 펼쳤다.

국세청의 로고와 서울지방국세청의 관인이 선명하게 보였다.

세무조사통지서라고 쓰여 있는 빈 양식지를 본 교육생들이 탄성을 흘렸다.

“방금처럼 했다간 바로 민원 먹고 감사 나오고 징계 행입니다. 세법도 법이잖아요. 우리는 법을 적용하는 사람인만큼 법과 절차를 중시해야 하는 겁니다.”

교육생들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끄덕거렸다.

그제야 신재현은 눈에서 힘을 풀고 빙긋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얼음이 어는 것 같았던 분위기에 순식간에 훈풍이 불었다.

표정 하나만으로도 이렇게나 느낌이 바뀔 수 있다는 것에 교육생들은 놀랐다.

“귀찮게 해서 미안합니다. 자, 그럼 이제 제자리에 앉아 주세요.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준비가 제대로 되었을 리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신재현의 얼굴에 서린 자신감에 교육생들은 그나마 있던 불안마저 날려 버렸다.

교육생들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찾아 들어갔다.

“앞으로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제가 아는 것들 다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가르치고 시험 보는 종류의 수업이 아니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자유롭게 물어보세요. 먼저 말씀드릴 것은 아까 했던 것의 연장선입니다. 현장에 들어갔을 때, 직원들 다 내보냈다고 칩시다. 그럼 뭐부터 까보느냐.”

신재현은 교단에만 서 있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듯 부드럽게 풀어내며 책상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한 교육생을 지목했다.

“뭐부터 볼 것 같습니까?”

“어, 재무제표요?”

“재무제표는 신고서에 첨부되어서 들어오니까 우리 손에 있잖아요. 조사 나가기 전에 이미 세무서에서 외우고 나가야 됩니다.”

“아, 그럼 통장…….”

“좋습니다. 통장! 회사의 자금 흐름을 보려면 통장을 당연히 뜯어 봐야죠. 그러면 통장은 어디에 기록되죠? 어디를 열어봐야겠습니까?”

“인터넷 뱅킹이요……?”

“일반적으로 금융거래내역을 볼 때는 통장이나 인터넷 뱅킹을 보겠죠. 그걸 회사에서 어딘가에 기록할 것 아닙니까? 그게 바로 세무프로그램이에요.”

“아!”

신재현은 도로 교단으로 올라오더니 검은 마카를 들었다.

“혹시 세무사사무실에 다녀봤거나 일반 회사의 회계팀이나 총무팀에 근무해 본 사람은 알 겁니다. 여러분도 회계학 공부해서 아시다시피 회사는 복식부기를 해야 합니다. 장부를 작성해서 최종적으로 재무제표를 뽑아내야 한다는 소리죠. 이때 회사마다 선택지가 둘로 나뉩니다.”

화이트보드에 두 개의 단어가 적혔다.

[자체기장 / 세무대리]

“회계팀을 굴릴 여력, 즉 돈이 있는 회사는 회사에서 알아서 장부를 작성합니다. 이게 자체기장이에요. 그럴 여력이 없거나 귀찮은 회사는 세무사사무실, 또는 법인에 맡깁니다. 이건 세무대리입니다. 보통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세무대리인과 지겹도록 맞닥뜨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무대리인은 우리와 비슷하게 세법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개중에는 우리보다 세법을 더 잘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다고 무시당할 순 없죠.”

신재현은 교단 위에 있던 책상에 손을 턱 짚었다.

“현장 가면 딱 자체기장인지 세무대리인지부터 물어보고 세무프로그램 여세요. 세무대리하는 회사여도 하다못해 관리하던 엑셀이라도 있을 겁니다. 급여, 카드, 계정별원장, 통장 내역. 싹 훑습니다. 이게 1차입니다.”

신재현이 거침없이 내뱉는 것은 몇 년 정도 굴러 본 공무원이라면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이제 막 공무원의 첫발을 내딛는 이들에게는 단비 같은 팁이었다.

마치 당장 현장에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들은 열심히 받아 적었다.

적어도 처음 조사를 나간다 하더라도 어버버하진 않겠다는 다짐이 함께했다.

설명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열정적인 첫 강의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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