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교육원 (1)
인생사 새옹지마라고들 한다.
오늘 출세 가도를 달리는 사람도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정치에 발을 담근 사람들은 늘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정적의 목을 치고 그 자리에 자기 사람을 채우고 나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절대 저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자기 마음대로 되는 법이 있던가.
중부청장, 아니 전 중부청장 손경진도 마찬가지였다.
손경진의 경우에는 차기 국세청장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위치였으니 추락 폭이 더더욱 컸다.
국세청장 2년만 하고 나면 그 후엔 뭘 하든 탄탄대로다.
전임 국세청장 정상훈처럼 정치로 나가도 되고, 세무사 개업을 하거나 대기업 자문으로 나가도 충분하다.
청장 출신이라는 타이틀 하나면 연봉 억대는 기본으로 깔고 간다.
당장 돈 있는 사람들이 무슨 사고가 터졌을 때 수습해 달라며 청 출신 세무사를 찾곤 한다.
그 사람들에게 현직 세무공무원을 소개해 주는 ‘소개비’ 명목으로 몇천만 원을 받는 세무사도 있었다.
그런 장밋빛 미래가 단 한 순간에 깨어졌다.
현재 손경진의 직함은 ‘국세공무원교육원장’이다.
한 기관의 장이니 당연히 높은 자리이긴 하지만 다 같은 장이 아니다.
자리의 중요도는 차원이 다르다.
조사권을 가진 실무진을 지휘하는 청장급이었던 사람이 신입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왔다는 것 자체가 실권에서 멀어졌다는 뜻이다.
곧 은퇴할 사람이 자신의 지식을 나누어주고, 신진을 양성하며 평화로운 말년을 보내는 자리.
아니면 국세청의 요직을 가기 전에 잠시 거쳐 가는 자리.
국세청에서 교육원장이란 그런 취급이었다.
다른 지방청으로 간 거라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바로 교육원장이라면 그것은 두 번 다시 올라올 생각도 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나 다름없었다.
세력도 일구지 말고 구석에 처박혀서 조용히 은퇴해라.
원장실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는 손경진의 귓가에 국세청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신재현이 오늘 관사에 들어온답니다.”
“교육원으로 온다는 게 진짜였나 보군요.”
원장실에 앉아 있던 두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손경진의 심복이었다가 함께 제주도까지 떨려오게 된 중부청의 공무원이었다.
손경진의 라인은 국세청장과 민치호의 철저한 사후 처리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이 둘은 손경진의 매우 충직한 심복이었다.
다른 세무서나 지방청으로 가면 출세는 못 하더라도 일선에서 일하다 보면 기회가 온다.
그런데도 굳이 손경진을 따라온 것이다.
-으득.
여전히 손경진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지만 손에 쥔 펜이 힘겨운 소리를 냈다.
직원 둘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아는 중부청장 손경진이라면 닿기만 하면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황으로 파악하고 바로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낼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몇 갈려 나가긴 하지만 그건 별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위에 선 사람이라면 응당 거쳐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차갑고 냉철한 결과를 내리기에 이 둘이 손경진을 믿고 따라온 것이기도 했다.
“결국 그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민치호가 그렇게나 애지중지 감싸고돌더니, 결국 자기도 피 튀는 게 무서우니 바로 잘라 버리는군요.”
“아무리 깨끗한 척해 봐야 다 똑같은 놈이라는 뜻이죠. 여의도에서 난리를 쳤고, 신재현도 내려왔으니 민치호는 당분간 손발을 묶인 거나 다름없을 겁니다.”
둘은 쉴 새 없이 민치호를 헐뜯었다.
함정을 판 것이 국세청장과 민치호라는 것을 안 이상 둘에게 그들은 원수였다.
“이번 건으로 국세청장 이름에 먹칠까진 안 가겠죠.”
“어림없는 일이죠. 민치호도 지방청으로 내려가나 했더니 가까스로 버텼지 않습니까.”
원래 민치호와 이선균 역시 판을 깔면서부터 좌천을 각오한 상태였다.
민치호는 부산청장으로, 이선균은 다른 지방청이나 기재부로 대피할 예정이었다.
신재현이 가게 될 제주도는 부산청의 관할이었기 때문이고, 이선균의 경우엔 미리 기재부에 가서 길을 닦아놓으려고 한 것이다.
보여주기식 좌천이었지만 신재현을 지키겠다는 둘의 각오가 들어간 결정이었다.
그런데 국민 청원이 구도를 바꾸어놓았다.
여의도에서는 신재현의 제주도행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래서 민치호와 이선균은 서울청을 지키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신재현을 나중에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가능하면 서울권에서 버티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런저런 정치적 계산이 들어간 결정이었지만 교육원에 있는 손경진과 그의 심복 둘은 정확한 사정을 몰랐다.
“다음 청장 자리는 민치호라는 얘기가 돌고 있었잖습니까. 혹시 그 전에 실각하는 경우는 없을까요?”
“우리도 잃었지만 그쪽도 만만찮게 잃었으니까요. 신재현을 잘라 버린 건 실수라고 봅니다. 이번 기회에 발을 잃고 추락할 수도 있죠.”
말뿐이었지만 둘은 민치호의 추락을 상상하며 미소 지었다.
모든 힘을 잃은 이상 이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만약 민치호가 잘 나간다 하더라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정신 상태에 몰려 있었다.
둘이 실컷 떠드는 동안 손경진은 내내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야기가 점점 현실성을 잃자 펜으로 책상을 탁 내리쳤다.
순간 두 직원은 언제 떠들었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원장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비록 좌천되었다지만 손경진의 장악력은 여전했다.
“신재현 출근이 언제부터지?”
원장이긴 하지만 그는 교육원이 굴러가는 모양새에 관심이 없었다.
이미 신재현에 대해 보고가 올라갔는데도 출근일을 모른다는 것부터가 그 증거였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바로 시작합니다.”
“이틀 후야? 시간이 별로 없네.”
내내 창밖을 바라보던 손경진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제대로 준비할 시간은 없었겠군. 가르치는 과목은?”
“세무조사 실무랍니다.”
“웬만한 경력으론 안 될 테고.”
가만히 듣고 있던 직원 둘은 손경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네. 일선에서 10년, 20년 실무 뛴 경력자들이 은퇴하기 전에 맡는 과목이 바로 조사 실무입니다. 국세청장님이 무슨 자신감으로 신재현에게 그 과목을 맡기셨는지 모르겠네요.”
“분명히 민치호가 입김을 넣었겠죠. 이번엔 분명히 실수한 겁니다. 겨우 경력 3년짜리가 알면 뭘 알겠습니까. 아무리 특수팀을 맡아서 굴러봤다 해도 절대적인 경험치의 총량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번엔 손경진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신재현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하더라도, 어떤 거물을 쳤더라도 경험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돈 주고 살 수도 없는 것이며 누군가에게 전달받을 수도 없다.
순수하게 본인이 겪어보고 느낀 것이 쌓여 재산이 되는 것.
경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준비 기간도 적고 가르쳐 본 적도 없을 테고. 본인이 아는 것과 전달하는 건 또 다르지.”
손경진의 목소리는 단조로웠지만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신재현 온다는 소식 듣고 좋아하던 교육생들도 딱 일주일만 수업 들어보면 바로 파악할 겁니다. 수업이 얼마나 엉망인지는 듣는 사람이 더 잘 알잖습니까.”
“신재현이 갖고 있던 이미지도 깨버리고 아주 좋네요.”
두 직원이 시원하게 웃자 손경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이빨이 다 뽑혔어도 내 울타리에 들어온 놈까지 간수 못 하면 말이 안 되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두고 봐. 하지만 신재현이 이 교육원에서 멀쩡하게 걸어 나가는 일은 없어야겠지. 여기까지 내려왔어도 아직 희망은 품고 있을 거야. 자존심도 깨부수고 이름값도 깨부숴. 내가 못 올라가면 저놈도 못 올라가.”
손경진의 담담한 목소리에 살기가 섞였다.
중부청에 있을 시절의 손경진을 떠올리게 하는 차가운 말투였다.
“밑바닥까지 떨어졌으면 더 이상 잃을 게 없잖아? 둘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럼 어디 한번 보여 줘.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아무래도 손경진이 원하는 것은 두 직원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멀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둘은 마른침을 삼켰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교육원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교육원의 신입 세무공무원들은 들뜬 마음으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신재현이 선생님으로 온다는 게 진짜인가 봐요. 기사도 떴어요.”
“무슨 수업 한다고 구체적으로 나왔어요?”
“세무조사 실무라는데요.”
“조사? 뭐야, 엄청 재밌겠는데. 시간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원래 있던 정규 과정이 아니라 특강 형식으로 남는 시간에 들어간답니다. 공지 붙어 있어요.”
11월인 지금 교육원에 있는 것은 7급 세무직 공무원들이다.
즉, 신재현과 같은 급수였으며 그 어떤 공무원보다도 신재현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들이었다.
다만 신재현이 교육원으로 온다는 것은 희소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의 반응 역시 두 부류로 나뉘었다.
“여기 올 사람이 아닌데 오네.”
“국세청도 결국 압력에는 못 이기나 봐요.”
“그야 국세청도 정부 기관 중 하나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버틴 거죠.”
“버티면 뭐 해요? 정작 필요한 사람이 잘렸는데.”
“에이, 잘린 건 아니죠. 교육원에 좀 있다가 도로 서울청 복귀하지 않으시겠어요? 제가 보기엔 보여주기식으로 좌천한 것 같은데.”
“잘 나가다가 세무서도 아니고 교육원으로 온 거면 말 다 한 거죠. 에휴, 신재현 때문에 7급 세무직 시험 본 건데…….”
“아, 오빠도요? 저도 행정직 보려다가 세무직 지원했거든요. 기자회견에서 신재현 보는 순간 딱 결정했어요. 나도 저렇게 탈세범 잡아야지!”
“정작 그 본인이 저렇게 됐는데 의욕이 나요?”
“아뇨…… 안 나죠…… 아,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 아, 슬프다.”
신재현을 좋아하는 교육생들은 안타까움을 담아 한숨을 푹푹 내쉬었고.
“그래도 수업 들을 생각하면 기대되지 않아요?”
“실전으로 다져진 리얼 스토리를 들을 수 있겠죠? 아, 재밌겠다.”
“저는 그거 물어볼래요. 국회의원 잡으러 갔을 때 얘기.”
“아니아니, 그것보다는 그거죠. 주차장 풀밭에서 20억 찾아낸 거! 그거 기분 어떨지 진짜 궁금해요.”
신재현이 어떤 수업을 할지 기대하는 교육생들도 있었다.
“관사랑 기숙사랑 가깝지 않나? 지금 관사 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어차피 월요일이면 볼 텐데 쉬는 분을 왜 괴롭혀요.”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교육생들의 관심은 단 하나였다.
신재현.
날개가 꺾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들 중에는 그를 우상으로 삼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비단 교육생만이 아니었다.
“……국세청장님의 결정이 사실입니까? 새파란 어린애가 특강 강사로 온다는 게?”
다만 이들은 그닥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이들이 신재현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 역시 공무원 생활을 하다 교직으로 빠진 사람들이고 자신들이 가르치는 교육생들이 국세청의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길 원했다.
국세청을 사랑했기에 그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직업으로 교육원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신재현을 좋아하는 것과 그가 강사로 오는 것은 경우가 달랐다.
“교육생들 세법 공부하느라 바쁜데 괜히 시간 낭비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청장님이 교육원 사정 모르는 것도 아니고. 딱 보아하니 오갈 데 없는 불쌍한 희생양 하나 빈자리 만들어서 박아둔 것 같은데.”
“그래도 젊은 친구가 세상 바꿔보겠다고 열심히 하다 결국 현실에 떠밀려 온 것 아닙니까. 국세청의 미래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친구예요. 우리가 잘 도와줍시다.”
흰머리가 지긋한 교수진이 모여 차를 마시며 신재현의 특강을 걱정했다.
“강의자가 아니라 온 김에 공부하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교육원 수료한 지 3년밖에 안 된 친구인데.”
“결국 우리 일이 늘어나게 되겠네요. 어차피 정규 강의 아니니까 상황 봐서 축소하거나 우리가 도웁시다.”
교육원에 있는 교수진은 최소한 수십 년 공무원으로 일했거나 관련 학위를 가진 사람들뿐.
이들 역시 신재현이 교육생들에게 유익한 무언가를 알려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기껏 해봐야 교육생들과 신재현이 떠들며 공무원이 어쩌구 저쩌구 잡담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신재현이 출근한 첫날.
경험 위주의 가벼운 강의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의 예상을 가볍게 뒤엎고 신재현은 교단 위에서 진지한 첫마디를 내뱉었다.
“지금 즉시 모든 교육생 여러분은 소지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벽으로 붙어 서십시오. 핸드폰, 펜, 종잇조각. 그 어떤 것도 소지해선 안 됩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엉거주춤 일어선 교육생들에게 신재현이 다그쳤다.
“저는 이 교육원에 계신 분들보다 세법과 회계를 잘 가르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겪은 실무를 실전처럼 전수해드리겠습니다.”
교육 자료도, 필기도 없는 신재현식 실전 교육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