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꼭 돌아옵니다
“엇! 권 팀장님! 왜 여기 계세요!”
신재현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지만 권현아의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안녕하세요, 신 팀장님. 인사차 돌고 계신가 보네요.”
“네. 송무국하고 운영지원과만 가면 인사도 끝납니다. 저는 어째 정상적인 인사이동보다 불시에 이동하는 일이 잦네요. 서울청에서는 이동 전날까지 야근할 줄 알았거든요.”
신재현이 웃으며 떠들자 권현아가 울컥한 얼굴을 했다.
“좌천당하는 거면서 뭐가 그렇게 좋아요?”
“제주도잖아요. 저희 어머니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제주도는 처음 가거든요. 가는 김에 좀 푹 쉬고 오려고 합니다.”
남들에게 이런저런 불평을 해 봐야 뭣하겠는가.
신재현은 일부러 밝게 웃으며 다녔지만 그것은 권현아에게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권현아가 주먹을 말아쥐더니 문을 쳤다.
특수조사 2팀 사무실의 문이 쾅 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신 팀장님이 왜 탈세범 때렸는지 알 것 같네요. 제가 지금 신 팀장을 매우 때리고 싶어요.”
“……여의도가 아니라 저요?”
“거기는 미사일이라도 날리고 싶고요.”
권현아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 신재현이 머리를 풀로 회전시켰다.
그러나 신재현의 머리로는 도저히 생각해도 왜 권현아가 화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기서 사촌 동생 신수정의 충고가 생각났다.
-오빠는 이상한 데서 눈치가 없단 말이야. 혹시 나중에 일하고 상관없는 일로 여자가 화내면 무조건 사과부터 하고 대화 시작해.
신재현은 일단 사과해보기로 했다.
“어, 죄송합니다. 인사를 드리려면 1팀 사무실부터 갔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잖아요!”
“……이게 아니에요? 그럼 왜……?”
신재현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답답해진 권현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탈세범은 눈동자 움직임 하나만으로도 온갖 생각을 다 꿰뚫어내시면서.”
“그렇게까진 아닌데. 권 팀장님도 탈세 많이 봐서 아시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재무제표만 봐도 과세금액 쫙 뽑으실 것 같은데.”
“재무제표 보고 일차적으로 각 잡는 건 맞지만 신 팀장님은 차원이 다르시죠. 저도 전해 들은 게 있다고요. 앉은 자리에서 암산으로 탈세액 뽑아내고 그걸 기반으로 오차 잡아가는 방식은 듣도 보도 못 했거든요. 저도 따라 해보려고 했는데 일단 예상액 뽑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더라고요.”
물꼬가 트이니 권현아는 스스럼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제 대화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권현아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만 신재현은 사촌 동생의 충고가 맞아들어갔다는 생각에 신기해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권현아는 신재현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바로 눈치채고 서론을 끝냈다.
“겨우 10개월이었어요. 신 팀장님하고 손발 맞춰서 오랫동안 일하고 싶었습니다. 신 팀장님이 앞서 달려 나가는 동안 저도 따라잡으려고 많이 노력했고요.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저도 10개월간 제 공무원 인생 역사상 가장 높은 성과를 냈어요. 저도 조사 결과 정산해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내년쯤엔 같이 팀을 구성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건의 올릴 참이었고요.”
권현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우울함이 물씬 묻어났다.
“그런데 이렇게 가버리시는군요. 조금만 더 참을 수는 없었나요? 아니, 참는다는 건 신 팀장님이 꺾인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니 그건 또 안 되겠군요. 그렇다면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권현아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앞부분은 대화체였지만 뒤로 갈수록 혼잣말에 가까워졌다.
신재현이 온 후로도 여전히 권현아는 서울청의 최고로 취급받는 공무원이었다.
신재현이 온 이후로 뒤로 밀리는 감은 있지만 그렇다고 권현아에 대한 평가가 박해진 것은 아니다.
신재현이 워낙에 규격 외기 때문에 그와 비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권현아는 신재현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듯 노력했고 다들 권현아의 노력을 인정했다.
신재현과 함께 달릴 수 있을 것이라 평가되는 능력자가 바로 권현아였고, 권현아 역시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권현아가 횡설수설할 정도면 이번 일이 그만큼 충격이라는 것을 뜻했다.
이제 곧 따라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앞서 달리던 주자가 사라져 버린 느낌일 것이다.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목표가 난데없이 꺾인 것이다.
제주도.
그것이 유배라는 것은 권현아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렇게 가버리시는 법이 어디 있어요?”
“……저도 아쉽습니다. 여기 남아 있으면 그동안 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면 저도 답답해요.”
아무리 얼마 안 있어 도로 불러올리겠다는 약속이 있었지만 그만큼 시간이 빈다.
신재현이 국세청에 눌러앉아 서슬 퍼렇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을 수그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신재현이 힘을 잃었다는 것을 알면 도로 고개를 들이밀 것이다.
탈세범들이 활개를 칠 것을 생각하면 신재현에게도 답답한 일이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쉬어가라니 쉬어야죠.”
“제가 생각해봤습니다. 지금 마침 청원도 있고 여론도 좋아요. 대통령님의 말 한마디로 제주도행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청장님께서 조금만 힘을 써주신다면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이어지는 말에 신재현은 놀랐다.
현 국세청장의 라인이긴 하지만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 실력으로 국세청장의 칼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권현아였다.
그런데 지금 권현아가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정치였다.
신재현의 눈빛을 본 권현아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제가 그동안 너무 정치에 무지한 것 같아서요. 이젠 저도 이런 걸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무지는 죄거든요.”
신재현이 말리려다가 말을 삼켰다.
그것 또한 권현아의 선택이다.
같은 라인도 아닌 신재현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신재현은 자신의 해석을 들려주기로 했다.
“제가 가는 게 맞습니다. 저희는 이번에 너무 날뛰었어요. 뭐, 애초에 정말 내일 당장 죽을 각오로 했거든요.”
“지하 경제를 치는데 그렇게까지 각오를…… 설마?”
역시 권현아는 눈치가 빨랐다.
신재현은 맞다 틀리다는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복도를 둘러보았다.
“여의도에서 들고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당장 찢어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을 거예요. 이 경우에는 완벽한 승리란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의 입에 살점을 물려줘야 합니다. 그래야만 당분간 얌전하게 만들 수 있어요. 그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 위인들이거든요.”
여기서 말하는 ‘죽인다’는 말은 비유가 아닌 진짜임을 둘 다 알았다.
“아무리 죽을 각오를 했어도 그건 싫잖아요. 주변인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고. 애초에 죽으면 저놈들 목을 못 쳐요.”
이 와중에도 못 죽는 이유로 탈세범을 드는 신재현을 보며 권현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좌천이면 싸게 먹혔다는 말인가요? 알고는 계시죠? 다른 지방청도 아니고 지방 세무서도 아니에요. 교육원이라고요. 손발 다 묶어놓겠다는 뜻이에요.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돌아올 수밖에 없는 판을 깔 겁니다. 그때는 권 팀장님과 함께 일할 기회가 됐으면 좋겠네요.”
신재현은 빙그레 웃었다.
“아까 권 팀장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저도 권 팀장님과 일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은닉 재산 추적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들었습니다.”
“신 팀장님의 탈세액 확정 실력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요. 뭐, 제가 좀 하긴 합니다.”
겸손은 없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웃었다.
권현아의 기분이 풀렸다고 느꼈는지 신재현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안에서 기다리시지. 혹시 사무실에 못 들어오게 합니까? 자료 정리도 다 끝났을 텐데.”
“아! 잠시만요.”
권현아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사무실 문에서 비켜섰다.
“신 팀장 오시나 망봐달라고 했거든요. 혼자 서 있다 보니 좀 감상적이 되었나 봅니다. 이제 들어가셔도 돼요.”
“……예? 저희 직원이 정말 그랬다구요? 아니 어떻게 남의 팀 팀장님을 밖에 세워둘 생각을 하지?”
신재현이 어리둥절해 했지만 권현아는 그저 웃으며 등을 떠밀었다.
“얼른요. 대신에 저도 얻어먹기로 했으니까.”
더더욱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신재현이 갸웃하며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퍼엉!
무언가가 머리 위에서 튀더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팀장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신재현! 생일 축하한다!”
“팀 해산하기 전에 생일 돌아와서 다행이네요. 어휴, 아슬아슬했잖아요.”
문에서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한 채, 신재현은 눈만 깜빡였다.
머리에 은박지가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강혜원이 커다란 케이크를 들고 다가왔다.
28개의 초가 꽂힌 과일 생크림 케이크였다.
“얼른 부세요. 장세훈 주사보님이 케이크 얼굴에 던질까 말까 고민하셨거든요. 냅두면 진짜 할 분이니까 먹어 치워야 해요.”
강혜원의 장난기 어린 말에 신재현이 얼떨결에 입을 열었다.
“제 생일은 어떻게 아셨어요? 일부러 얘기 안 했는데.”
“메신저에 떠요.”
“아.”
신재현은 머리를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고는 초를 불었다.
삼성 세무서에서부터 같이 온 팀이었지만 사무실에서 케이크까지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재현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송별회 겸하는 거니까 너무 좋아하지 마. 선물은 준비 못 했거든.”
“으이구, 장세훈 주사보님이 꼭 이럴 땐 솔직하지 못해요. 아까부터 해산하는 거 싫다고 우울해하셨거든요. 신경 쓰지 마세요.”
강혜원이 장세훈을 구박하는 동안 안길진과 황민우가 얼른 불 꺼진 초를 뽑아냈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
이젠 거의 친구이자 가족처럼 느껴지는 팀이었다.
앞으로 당분간 이런 광경도 못 볼 거라 생각하니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권 팀장님도 얼른 들어오세요. 저희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케이크 주신다는데 그 정도야 쉽죠. 저도 덕분에 인사 잘했어요.”
강혜원이 케이크를 잘라 일회용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테이블 주위에 모여드는 팀원들 뒤로 오후의 햇빛이 비쳐들었다.
신재현은 그 모습을 한 장의 사진처럼 눈동자에 아로새겼다.
“아, 팀장님. 초 끄시면서 소원은 뭐 비셨어요?”
강혜원이 가장 먼저 큼지막하게 자른 케이크 조각을 테이블 위로 내밀며 말했다.
신재현은 팀원들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초를 불면서는 사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런 감상적인 행동은 어렸을 때 이미 졸업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늦게라도 소원을 빌고 싶었다.
“꼭 다시 모입시다.”
신재현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팀원들이 놀란 듯 서로를 바라보더니 포크를 내려놓고 문가에 붙박인 채 움직이지 못하는 신재현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당연하지. 나중에 그럼 안 부를 생각이었어? 우리 말고 너 쫓아갈 사람이 누가 있겠어?”
“언제고 돌아오세요. 그리고 불러만 주세요. 저희는 팀장님의 손발이 되겠습니다.”
신재현은 팀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오래도록 생각했다.
이 광경을 꼭 다시 보고 싶다고.
반드시 돌아와 함께 달리겠다고.
“우와, 진짜 부럽다…….”
권현아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아, 죄송합니다. 얼른 먹죠. 케이크 식겠네요.”
신재현이 횡설수설했지만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
그만큼 다들 어떤 심정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 손에 잡힐 듯 알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 4일.
서울지방국세청 청장 직속 TF팀 중 하나인 특수조사 2팀은 해산.
팀장인 신재현은 황민우와 함께 제주도로 향했으며 나머지 팀원들은 경기도와 대전의 세무서로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돌아오리라는 굳은 다짐을 품고.
민치호와 이선균은 청장실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각오를 다졌다.
“이제부터가 진짜야, 이 과장. 돌아오는 순간 멈출 수 없는 레일 위에 올라가게 될 거야.”
“네. 그러니 제주도에서는 푹 쉬고 왔으면 좋겠네요.”
눈엣가시가 사라졌다며 기뻐하는 의원들, 방해꾼의 좌천에 조심스럽게 탈세에 눈을 돌리는 기업체들, 아쉬워하는 사람들까지.
저마다의 생각이 교차하는 11월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