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여야 모두까기 (1)
유진환과 대화하는 동안 나는 머릿속이 바빴다.
정확히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유진환의 주위를 맴돌던 숫자들.
그것이 다른 사람이나 법인의 탈세액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유진환이 말했듯 그가 설계한 탈세, 즉 적극적으로 도운 탈세액 말이다.
유진환과 대화하면서 그의 주위를 훑어볼 시간은 넉넉히 있었고, 나는 방금 호텔에서 온 상태였다.
그리고 호텔에서 본 숫자가 유진환의 무릎 근처에서 발견된 순간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내가 보고 온 두 숫자가 유진환 근처를 맴돈다.
그러니 반대로 유진환 몸에 맴도는 숫자로 그와 관계된 탈세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탈세액이 커지기 마련이니 정확하게 들어맞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비슷한 금액은 건져낼 수 있지 않을까.
“좋아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혹시라도 내 생각이 드러날까 나는 서둘러 주제를 돌렸다.
마침 기다렸던 기사의 링크가 온 김에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손에 든 상태.
기사 링크를 유진환에게 건네주고 나서 나는 바로 핸드폰의 메모장을 켰다.
평소라면 내가 핸드폰으로 뭔가를 바쁘게 입력하는 걸 본 유진환이 제재했을 법 한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그만큼 흔들렸다는 뜻이겠지.
유진환이 기사에 정신이 빠져 있는 동안 나는 그의 주변에 맴돌던 숫자들을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메모장에 적어 넣었다.
이 중 어느 것이 ‘컨설팅’이고 어느 것이 ‘돈세탁’인지는 모른다.
어차피 다 칠 거니까 상관없다.
마지막 순간까지 유진환을 도발하며, 메모장에 못 다 적은 탈세액 숫자들을 외웠다.
그리고 지금 복도를 걷는 와중에도 내 손은 바쁘게 핸드폰 자판을 누르고 있었다.
“팔칠육이삼…… 육육삼구칠…….”
나는 까먹기 전에 연신 숫자를 입속으로 되뇌며 손가락을 놀렸다.
일부러 백 원 이하의 숫자는 외우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내가 본 숫자가 87,623,113이라면 87,623까지만 외웠다는 뜻이다.
가뜩이나 숫자도 많은데 금방 바뀔지도 모르는 뒷자리까지 외울 필요는 없다.
그런 잔머리를 쓴 덕분일까.
생각보다 많은 숫자를 적었다.
“하나, 둘, 셋, 넷…… 21개? 많이 적었네.”
아무래도 가끔 유진환을 만나 봐야 될 것 같다.
약도 올릴 겸, 숫자도 적어갈 겸.
바로 옆에 모범답안이 있는 기분이었다.
뇌를 최대한 혹사해서 숫자를 끄집어내 적은 나는 바로 지현석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사님, 오늘 나온 돈이 H 돈이 맞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아…….
지현석은 한참 동안 한탄했다.
여러 감정이 전화 너머로도 느껴졌다.
아마 땅 밑에서 현금 다발이 쏟아져 나온 것과 돈세탁 루트가 그동안 이렇게 멀쩡히 돌아갔다는 것에 대한 한탄일 것이다.
물론 나도 심정은 비슷했다.
난 솔직히 지하 경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공부한 것도 전부 보이는 경제 쪽이었고 살아온 곳, 접한 사람 모두 양지의 것이다.
지하 경제라는 것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 실체는 본 적이 없으니 그저 짐작만 했다.
“검사님. 저는 말입니다. 돈세탁이라는 건 말로만 들었어요. 얼마나 무지했는지 세무공무원 교육 때 들은 이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어떤 방법을 쓴다, 이런 거요.”
-그러고 보니 팀장님은 지하 경제와 접하시는 게 아예 처음이셨겠군요. 충격이 크시겠습니다.
“눈으로 보기 전엔 별 생각이 없었어요. 평소 탈세범 잡으러 가는 기분으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딱 그걸 보는 순간 실감이 확 나더군요. 세상엔 정말로 이런 식으로 사는 사람이 있구나. 정상적인 경제의 사이클에서 벗어나서 침체되고 썩은 돈이 있구나. 나는 정말 몰랐구나.”
정확히 말하면 주차장에서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탈세액이긴 하지만 보통은 탈세의 주체에게서만 보인다.
사람이나 법인 말이다.
그런데 땅에서 숫자가 보일 줄은 나도 몰랐다.
마치 썩은 물에서 시궁창 냄새가 피어오르듯, 푸르른 풀밭 위에 시커먼 숫자가 아른거렸다.
정확한 금액이 보인 것은 아니다.
풀밭이라는 것이 탈세의 주체는 아니니까.
느낌으로는 장부를 볼 때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것과 비슷했다.
주차장의 경우에는 조각조각 깨어져 한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숫자가 아지랑이처럼 풀밭을 맴돌았다.
시체 위에 파리 떼가 끓는 것처럼도 보였다.
-저도 검사 생활 하면서 이런저런 더러운 꼴을 봤지만 땅에 묻힌 돈을 파낸 건 처음입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군요. 거기에 돈이 묻혀 있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이걸 물어볼 줄 알았다.
아마 현장의 수사관과 기자들도 다 궁금해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요령 좋게 둘러대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당장 파 봐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으니까.
정작 돈이 나온 후에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보가 왔다고 할까, 아니면 멀리서 비닐 끄트머리가 보였다고 할까.
뭐라고 하든 말이 안 맞는다.
지현석 검사가 바보도 아니니 내 말에 허점이 있다는 건 바로 알아채겠지.
내가 뭐라 둘러대든 지현석은 모른 척 넘어가 줄 것이다.
그렇기에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짓말이 나쁘다느니 양심에 찔린다느니 하는 번지르르한 이유는 아니다.
거짓말하는 순간 지현석과 나 사이의 신뢰는 금이 갈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서로 믿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 편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지현석 검사님. 저는 검사님께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보였나요?
“자세히 설명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불법적인 건 없었습니다. 제 양심과 제 공무원 생활에 걸고 맹세 드릴 수 있습니다.”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팀장님이 다른 곳에서 정보를 얻어 왔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원래 자신만의 정보원이 있는 법이죠. 저는 팀장님을 털끝만큼도 의심한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러니 편하게 조사하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제가 도울 거고요.
역시나 지현석은 든든했다.
나 역시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믿음에는 믿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 말씀이면 족합니다. 그러면 다음 수는 어떻게 할까인데…… 조사로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면 기자들이 다 눈치 깠으니 청으로 가실 건가요?
“아뇨. 마음껏 돌아다닐까 합니다.”
내 말에 지현석이 크게 웃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네요. 지금 바로 조사 예정지 가십니까? 돈뭉치 때문에 일단 보류된 거였잖습니까.
“호텔 가 보고 느낀 게 있습니다. 잠시 검사님 사무실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지현석 검사는 지금 나처럼 조사 다닌답시고 지방 곳곳을 돌고 있다.
주인 없는 사무실인데도 지현석은 흔쾌히 허락했다.
-편히 쓰세요. 팀장님과 함께 갔던 수사관들은 아마 경기도 돈뭉치 마무리하고 계속 돌 것 같은데, 필요하면 그쪽에 전화해서 일정 잡으시면 됩니다. 바로 팀장님께 갈 겁니다.
수사관의 지휘권마저 맡기는 지현석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나는 곧바로 서울중앙지검으로 향했다.
지현석 검사의 사무실 안, 굳게 잠긴 응접실을 사무관의 도움으로 들어간 나는 모든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뒤집었다.
며칠간 보고 또 보았던 업체들이다.
그때처럼 오랫동안 볼 필요는 없었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숫자들이었다.
탈세액.
내 눈에만 보이는 힌트들.
핸드폰에 입력해둔 탈세액 숫자들과 비교해가며 업체를 다시 정리할 때 검사실로 일손이 하나 찾아왔다.
서울청의 내 팀원인 황민우다.
“어? 형! 그쪽도 바쁘지 않아요?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내가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자 황민우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커피를 타 왔다.
“마침 커피 먹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시간 보니까 딱 잠 온다고 진하게 커피 드실 시간이더라고요. 물은 종이컵 딱 반절 맞죠?”
“정확해요!”
황민우는 의자에 잔뜩 쌓인 서류 뭉치를 내려놓더니 자리를 잡았다.
“서울청 쪽은 사실 단순 노동만 남았죠. 시간이 급한 일도 아니니까요.”
다들 매우 조사에 협조적이어서 조사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아마 남은 것은 출석한 납세자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명한 건 정리하고 세금 부과하는 과정이 남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서류 지옥과 엑셀 지옥의 시작이다.
“팀원들이 원망 많이 하겠네요. 일도 바쁜데 둘이 나가 있다고.”
“어차피 급한 일 아니잖습니까. 미끼로 시작하신 일이고.”
“앗! 그렇다고 소홀히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국회의원과 혈연관계라고 안 되는 걸 되게 하던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쳐야 해요. 나중엔 이런 기회가 없을 테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들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 일이 시간에 쫓기는 건 아니죠. 오히려 천천히 마무리해야 하는 일 아닌가요? 이쪽 일이 진행되어야 하니까요.”
나는 혀를 내둘렀다.
팀원들의 상황 파악은 꽤 상당한 수준까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왔습니다. 팀장님을 혼자 돌아다니게 하긴 불안해서요. 이미 저희 쪽의 미끼 역할은 끝났잖습니까. 이쪽이 더 시선을 받아 버렸으니. 게다가 검은돈을 찾았으면 분명 그 돈 주인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겁니다.”
황민우의 목소리에 염려와 각오가 깃든 것을 느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를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보내도 또 올 것 같았다.
“그럼 오신 김에 이거 분류나 좀 해 주세요. 엑셀 작업 좀 해 주시고.”
막상 돕겠다고는 했는데 응접실을 가득 채운 자료를 보니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다.
황민우는 숨을 깊게 내쉬더니 노트북 앞에 앉았다.
“거기서도 엑셀만 보다 왔는데 여기서도 엑셀이네요.”
“우리 일이 엑셀하고 뗄 수가 없죠.”
***
-서울지방국세청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공조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단 며칠 사이에 검찰 측의 조사로 밝혀진 지하 경제의 속살은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기고 있습니다.
-……경기 외곽 주차장에서 발견된 20여억 원의 주인은 대체 누구일까요. 분명 묻은 사람이 있을 텐데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번 은행에 회수되지 않는 5만 원 권의 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전문가들은 경기 불황에 따른 소비 위축 심리와 현금을 보유하려는 심리가 겹쳐져 이런 현상을 보였다고 분석한 바 있는데요. 사라진 5만 원 권은 사실 지하 경제로 흘러 들어갔으며 우리가 모르는 사이 발밑에, 땅 밑에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말 그대로 땅에서 캐낸 뭉칫돈에서 사라진 그 고액권의 편린을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서울지방국세청의 신재현 조사관은 오늘 검찰 측 수사관과 함께 경기도 부천의 한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이곳도 지하 경제의 일부인 걸까요? 저희 취재기자가 나가 있습니다.
-신재현 조사관과 공조 중인 지현석 검사실은 오늘 오후 서울의 한 인쇄 회사에 압수수색을 실시했습니다.
-지현석 검사의 브리핑 결과 며칠 전 압수수색을 진행한 업체는 무려 5개의 하청 업체를 거느린 돈세탁 및 비자금 조성 회사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들은 가짜로 발주를 하고 납품이 이루어진 척 가공의 거래를 통해…….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다.
어느새 불행한 사장의 죽음은 사람들의 관심에 끼지도 못했다.
어느 뉴스를 틀어도 연달아 속보가 흘러나왔고 또 다른 채널로 돌리면 신재현과 지현석이 어딘가를 쳐들어가는 모습이 나왔다.
놀랍게도 녹화 방송이 아니라 생방송이었다.
그들은 폭주 기관차와 같았다.
무언가 방해물이 나타나기 전에 잽싸게 해치우려는 것 같기도 했다.
어제 서쪽을 쳤는가 하면 오늘은 또 동쪽에 나타났다.
“지하 경제를 다 뿌리 뽑겠다는 거야, 뭐야! 이놈들 대체 뭘 하자는 거야! 이런다고 지하 경제가 뽑히겠냐고!”
여당의 중진 의원들이 비밀리에 모인 자리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국회에서 내내 웃으며 신재현과 지현석을 칭찬해 왔던 사람들이었다.
기자들 앞에서는 두 젊은이를 응원한다, 정의가 승리한다 등의 입바른 말을 하고 사실 이들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둘에게 적발당한 업체 중에는 여당의 손발도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