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50화 (250/500)

250화. 착수 (3)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유진환 실장님은 하동문 의원님의 심복이잖아요. 온갖 더러운 일도 해 주고 나름 ‘설계’랍시고 계획도 짜 주고.”

“갑자기 뭔가요? 녹음기라도 숨겨 왔습니까? 여기서 말하면 제 자백이 됩니까?”

유진환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다시 반쯤 능글맞은 얼굴로 돌아가려 하자 신재현이 피식 웃었다.

“이미 위험한 대화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녹음기로 엮어 넣을 것 같았으면 진작에 목적 달성 수치입니다.”

“그래서요? 녹음기를 가져 왔습니까? 안 가져 왔습니까?”

“물어보는 게 너무 늦네요. 안 가져왔습니다. 가져 왔어도 당신이란 사람이 대비 안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만약 몸수색이라도 해서 녹음기가 나오면 상대가 경계할 수 있다.

그래서 신재현은 아예 녹음기라는 선택지를 포기했다.

녹음 당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속마음을 떠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유진환은 녹음기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은 상황에서 위험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뭐라 말해도 빠져나갈 자신이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이 방 어딘가에 녹음 방해 장치라도 설치해 둔 것 같은데. 뭐 그건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당신이 날 쥐고 흔들려고 했든 말든 이런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으니 물어보겠습니다.”

신재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유진환의 모든 행동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지 않으면서.

“당신의 윗사람, 아랫사람들에게 얼마나 신뢰를 받고 있습니까? 당신은 모든 루트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습니까?”

질문이 던져졌다.

유진환은 신재현의 의도를 캐내겠다는 듯 표정 변화 없이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 찔리는 것이 있다면 사람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신재현은 상대가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 느꼈다.

‘저놈이야 이런 일 해 온 지 오래됐으니 한 수 위인 건 어쩔 수 없지.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흔들어보자.’

신재현과 유진환 사이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둘 다 상대를 살피고 흔들어 힌트를 얻는 방법을 쓰는, 그러니까 성향이 비슷한 것이 원인이었다.

마치 둘 중 하나가 먼저 눈길을 피하면 지는 것처럼, 둘은 눈싸움을 시작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신재현이었다.

“……제가 뭘 찔렀습니까? 이렇게까지 탐색할 만한 일인가요? 제가 오히려 더 당황스러워지는데요. 제 질문이 중요했다고 받아들이면 됩니까?”

“어이없어서 그런 겁니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네요. 그냥 물어보세요.”

신재현은 아까 유진환이 그런 것처럼 느물거리며 웃었다.

“제가 보기엔 유진환 실장님이라는 사람이 생각보다 별로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위아래는 있습니다. 위에서 명령하면 아래에서 실행하고 보고하죠. 그런데 아랫사람조차 제대로 장악을 못했다면…… 당신, 대체 무슨 자신감을 절 섭외하려고 한 겁니까? 당장 방금만 해도 절 흔들려고 하더니, 막상 본인 앞가림은 못 하고 계시던데요.”

순간 유진환이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불쾌함이었다.

“저는 팀장님과 유익한 정보 교류의 시간이 되길 바랐습니다. 일방적이고 근거 없는 비방은 재미가 없는데요.”

“지금 그런 태도 하나하나가 전부 제게 있어서는 답을 준 거나 다름없습니다.”

여기서 신재현은 첫 번째 키워드를 던졌다.

“돈세탁에 쓰던 사업체 중에 호텔 있죠?”

여기서 한 차례 끊고 상대를 살폈다.

유진환은 겉보기에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마디를 던졌다.

“제가 거기서 오던 길이에요. 거기 책임자가 윗선으로 전화를 하던데. 제가 보기엔 그 루트가 이쪽이라는 냄새가 나거든요.”

여기 오기 전까지는 그 호텔이 여야, 둘 중 어디의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기 들어와서 대화하면서 확신했다.

[361,419,560]

[918,337,980]

호텔에서 본 법인세 탈세액과 주차장 풀밭에서 본 돈뭉치에서 희미하게 보이던 탈세액.

그 두 숫자가 유진환을 위성처럼 맴돌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돌아다니는 숫자가 워낙에 많아서 찾느라 시간은 좀 걸렸다.

그래도 일부러 숫자를 외워서 온 보람이 있었다.

“유익한 정보 교류의 시간을 원한다고 했잖습니까. 저는 던졌습니다. 그러면 뭔가를 주셔야죠. 당신은 저와 동등하길, 아니 엄밀히 말해서는 우위에 있길 원하잖습니까. 여기서 제 정보만 먹고 물러난다는 건 당신이 저보다 아래에 있다는 소린데요.”

아귀가 들어맞는 논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신재현이 원한 것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행위를 ‘설계’라 부르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자다.

그에게 있어서 신재현은 아직 이 업계의 초입에 위치하는 어린 공무원.

‘내 앞에서 얕잡아 보이긴 싫잖아. 지금 내 말에 허점이 있어도 이 말장난을 피할 순 없잖아. 넌 나보다 우위라는 걸 보여 줘야 하니까.’

신재현은 속으로야 어찌 되었든 겉으로는 여유롭게 유진환을 자극했다.

유진환은 움찔하며 불쾌한 기색은 보였지만 여전히 신중하게 대답했다.

“호텔이라. 글쎄요. 저는 정책연구실의 실장입니다. 이 나라 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정책을 연구하고 의뢰인에게는 컨설팅을 해 드리지요. 손님 중에 호텔이 있을지는 몰라도 팀장님이 원하는 답은 드릴 수 없을 것 같군요.”

“오, 피하시겠다. 제가 알던 유진환 실장님의 이미지와는 다른데요. 역시 아직 보고를 받지 못하셨나? 아까 말씀드렸듯 실장님은 휘하 조직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시는 것 같군요. 돈세탁 루트가 조사받았으면 진작 위로 대처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어야 하는데요. 아니면 그건가요? 실장님은 믿음을 얻지 못하시나?”

다시 신재현은 말을 끊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유진환의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향했다가 원위치로 돌아온 것을 신재현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고도 유진환은 대답이 없었다.

섣불리 답하면 안 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서로를 떠보기 위한 싸움에서 일방적으로 입을 다문다는 것은 추궁당한다는 것과 같다.

유진환은 이를 으득 갈았다.

‘어떤 상황인지 미리 들었어야 유도를 하든 대처를 하든 할 거 아냐! 지금 내가, 이 내가 밀리고 있다고?’

-부우웅.

신재현이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었다.

기다리던 문자였다.

“좋아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신재현은 내용을 확인하더니 그것을 유진환의 핸드폰으로 전달했다.

확인해보니 기사 링크였다.

아까 유진환이 신재현에게 했던 그대로다.

불길한 예감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진환이 링크를 열자 먼저 흙밭에 펼쳐진 비닐과 그 위에 차곡차곡 쌓인 돈뭉치가 찍힌 사진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만큼은 유진환도 평온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동공이 크게 벌어지며 핸드폰에 빨려 들어갈 듯 그가 사진을 가까이 갖다 댔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얼굴 근육이 푸들푸들 떨었다.

경악에서 분노로.

그 명백한 감정의 동요를 신재현은 바로 눈앞에서 차분히 감상했다.

“그 얼굴만 봐도 알겠군요. 제가 온 목적은 달성했습니다.”

신재현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깜빡했다는 듯 덧붙였다.

“하지만 돌아가기 전에 이 말은 꼭 드려야겠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권력자를 손아귀에 넣고 대한민국 지하를 주무른다고 생각했습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당신은 흔한 경제사범 중 하나고 내게는 일개 탈세범일 뿐입니다. 당신은 판을 움직이는 손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당신 역시 장기 말일 뿐이에요. 그런 사람이 잘난 듯이 이 나라를 움직여보자고 손을 내밀다니 어불성설이죠.”

신재현의 한마디 한마디가 이어질 때마다 유진환의 표정이 눈에 띄게 급변했다.

그토록 떠보고 도발해도 침착함을 가장하던 유진환이었지만 이것만큼은 참지 못했다.

마치 흉기로 공격당한 사람처럼 유진환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들고 있던 펜을 내동댕이쳤다.

스스로를 지능계열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물리적으로 감정 표현을 했다는 것은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유롭게 일어선 사람과 잔뜩 흥분한 채로 반박하지 못하는 사람.

적어도 이 순간, 이 사무실에서의 떠보기의 승자가 누구인지는 서로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오늘 얻어간 게 많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풀밭에 간직하신 현금은 국고로 고이 환수하겠습니다. 아, 혹시 소유권 주장하실 생각이면 그러셔도 됩니다. 증거자료 가져오시면 검토 후 기꺼이 현금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신재현은 점잖게 얘기했지만 유진환은 붉으락푸르락했다.

누가 봐도 불법 자금이 분명한 돈을 찾으러 간다면 출처와 경위를 증명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나올 불법 행위를 순순히 고하느니 차라리 국고 환수가 낫다.

‘그래도 끝까지 참네.’

신재현은 솔직히 그가 이성을 잃고 덤벼들거나 말실수하길 원했으나 상대는 그렇게까지 하수는 아니었다.

더는 도발해도 소용없겠다는 생각에 신재현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기대하세요. 제가 꼭 꼬리를 잡을 겁니다.”

***

신재현이 돌아간 이후 실장의 방에서는 무언가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일은 처음인지라 직원들이 놀란 눈으로 방문을 쳐다볼 정도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침착하게 설계를 제시하던 그들의 실장이 저러는 모습은 직원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유진환 본인이 더 잘 알았다.

“이 내가 저런 놈한테 걸렸다고? 꼬리를 밟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수치였다.

유진환은 지금껏 자신의 행위에 자부심을 가졌다.

남을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위에서 판을 내려다보고 계획할 수 있는 것도 전부 자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암막 너머의 지휘자, 권력자의 참모, 정재계에서 찾는 설계자.

자신은 단순한 범죄자와는 다르다.

그런 우월감이 오늘 추락했다.

그의 외장이 한 꺼풀 벗겨져 나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정한다, 신재현…… 한 방 먹었어.”

오늘 유진환이 먼저 상대를 끌어들였음에도 원하는 목적은 이루지 못했다.

그가 손댄 루트와 비자금도 잃고 그의 행동으로 정보마저 내주었다.

신재현이 움직이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완패였다.

그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호텔 쪽의 보고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진환은 돈세탁을 관리하던 중간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사 봤습니다. 대체 뭘 어떻게 관리한 겁니까? 왜 저한테 보고가 안 올라온 거예요? 뭐예요? 그게 수습될 거라 생각했습니까? 일단 나한테 말을 했어야 뭘 생각하든 말든 할 것 아닙니까! 당신은 뭐 하러 그 자리 앉아 있습니까? 월급은 왜 받아요?”

유진환도 이것이 화풀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신재현이 작정하고 찾아갔으면 중간책임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도 보고는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의 마음속 한편에서 의심이 퍼져 갔다.

정말 아래쪽 라인의 관리가 안 되고 있구나, 아래부터 배신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신재현이 흔들기 용으로 뿌린 의심의 씨앗이 점점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것조차 심리전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진환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졌어.”

유진환은 이를 으득 갈면서 핸드폰을 내던졌다.

벽에 부딪힌 액정이 콰득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거미줄처럼 금이 간 액정에는 현장 사진과 함께 기사가 떠 있었다.

[속보] 서울지방국세청, 세무조사 도중 주인을 알 수 없는 뭉칫돈 약 20여 억 원을 경기도 외곽의 주차장에서 발견.

유진환은 체스판의 환영을 보았다.

자신이 자신 있게 내민 방우명 사장이라는 말이 성큼 판 위를 활보했다.

그러나 곧 판 너머에서 나타난 신재현의 손이 말을 움켜쥐는 모습이었다.

“인정한다. 너는 내가 품을 수 없는 놈이었어.”

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하다.

유진환은 그를 포섭하려던 생각을 깔끔하게 버렸다.

자신이 담을 수 없는 그릇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유진환은 비로소 인정했다.

이제부터는 동등한 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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