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착수 (2)
-저벅저벅.
복도에 한 남자의 구두 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둔탁하고 덜컹거리는 것을 보아 뒷굽이 꽤 닳은 구두였다.
남자가 얼마나 많이 돌아다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남자가 걷고 있는 곳은 꽤 많은 회사가 모여 있는 오피스 빌딩의 복도였다.
돈 없는 스타트업 회사들이 모인 곳은 아니다.
월세만 해도 150만 원에 달하는 신축 빌딩이다.
복도에는 대낮의 쨍한 햇빛이 여과 없이 비추었다.
사람의 정신 건강에는 일조량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일할 맛이 나는 빌딩이다.
창문도 큼직했고 채광의 방향도 계산이 된 훌륭한 빌딩이었다.
그러나 지금 복도를 걷는 남자에게는 설계자의 그런 의도가 눈곱만큼도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남자는 누가 봐도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 정책연구소]
목표로 한 회사 간판을 발견한 남자는 지체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남자가 이 사무실에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다.
사무실의 주인과 친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이렇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에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유진환 씨 어딨습니까.”
남자, 신재현은 사무실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잔뜩 억누른 어조로 물었다.
“실장님께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미리 언질을 들었는지 직원은 담담하게 안쪽 방을 안내했다.
명패에는 ‘미래 정책연구소 실장 유진환’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이 붙어 있었다.
신재현은 숨을 몰아쉬며 직원이 앞장서기도 전에 먼저 그 방문을 열었다.
“당신 뭡니까.”
“아, 오셨네요. 이게 얼마 만이죠?”
신재현은 벌컥 화를 내며 다짜고짜 물었는데 방의 주인은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이했다.
둘의 온도 차가 극명했다.
“일단 앉으시죠.”
“이 상황에 앉으라는 말이 나옵니까?”
신재현은 요즘 들어 나름 이성적으로 행동한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차였다.
예전처럼 섣불리 화를 내거나 뛰쳐나가는 일도 줄었고 표정 관리를 하거나 말조심하는 법도 늘었다.
일의 특성상 탈세범이나 비리, 횡령범을 만나는 일도 잦았는데 그때마다 흥분하지 않도록 정신을 다잡기도 했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몇 번이고 침착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핸드폰에 전달된 기사 하나는 스물여덟 청년의 평정심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세무조사를 기다리던 중소기업 사장, 극단적 선택]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신재현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수 한 수 신중하게 밟아나갔고 돈세탁 루트로 생각되는 호텔에서 현금다발도 발견했다.
돈다발에 좀 놀라기는 했어도 그때까지는 평온했다.
그러다 지현석 검사가 보낸다는 기자와 굴삭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하동문의 오른팔이라 여겨지는 유진환.
솔직히 신재현은 쾌재를 불렀다.
상대를 들쑤셨더니 먼저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유진환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만나자고 했을 때만 해도 반가웠다.
이 호텔이 정말 유진환의 입김이 닿은 돈세탁 루트라면, 그래서 반응을 보인 거라면 직접 만날 가치가 있었다.
유진환이 일을 덮는 대신 대가를 제안할 수도 있었고 협상 과정에서 깊은 무언가를 잡아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신재현은 급히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지현석에게 보류를 요청했다.
정보 또한 큰 힘이 된다.
이쪽에서 손에 쥐고 있는 것은 현재 지현석과 신재현이 털고 있는 관련 회사들.
어느 선까지 줄을 더듬어 올라갔는지 위치를 알 겸, 손에 쥔 정보를 숨기고 유진환에게서 다른 것을 끌어낼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먼저 무엇을 쥐었는지 숨길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수 싸움을 생각하며 서울로 올라오던 길에 유진환은 신재현의 핸드폰으로 직접 기사 링크를 보냈다.
세무조사를 받고 난 중소기업 사장 하나가 자살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제목도 자극적이고 내용 역시 범상치 않았다.
링크 외에는 아무것도 첨부되어 있지 않았지만 신재현은 이것이 유진환의 착수라는 것을 알았다.
이쪽이 움직이는 동안 저쪽도 움직이고 있었으며, 선수를 쳤다는 것을.
덕분에 더더욱 만나 봐야 할 이유가 생겼지만 치밀어오르는 분노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 내 생각보다도 악질이었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 사건 하나로 생길 파장은 크다.
서울청의 과잉조사로 한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는 오명을 쓰기 쉽다.
그로 인해 서울청을 응원하던 여론은 식고 신재현은 추진력을 잃게 된다.
국민 여론을 믿고 과감하게 나가던 신재현으로서는 제동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링크를, 유진환이 직접 보냈다.
유진환이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다.
“사람 목숨을 말로 씁니까?”
“역시 제 초대장을 알아보셨군요. 저는 기쁩니다.”
처음 한 번은 부인했던 유진환도 신재현의 단호한 눈빛을 보자 순순히 인정했다.
“하긴, 이 정도 초대장도 알아보지 못하시면 오히려 실망했을 겁니다.”
여유로운 태도의 유진환이 눈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신재현은 심호흡과 함께 애써 감정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가슴은 뜨겁다 할지라도 머리는 차게 식혀야 한다.
그래야 유진환에게서 뭐라도 끌어낼 가능성이 있었다.
신재현이 금세 숨을 가다듬으며 자리에 앉자 유진환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제가 조사한 것하곤 좀 다르네요? 사람 하나 죽은 걸 알면 곧장 덤벼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들어오자마자 죽빵을 날리고 시작할까 고민은 했는데, 그랬다간 그다음 이어지는 2차전에서는 제가 지고 들어가게 될 것 같아서요.”
“2차전이요?”
“당신 같은 사람이 하는 짓이요. 약점 쥐고 흔들고 거래하는 것. 날 도발하는 것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일부러 하는 짓 아닙니까.”
“오, 어떻게 팀장님은 볼 때마다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이걸 일신우일신이라고 하던가요?”
“빙빙 돌리지 말고 용건부터 말해요. 당신한테 칭찬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유진환은 소파에 앉더니 씨익 웃었다.
“그래도 아직 멀었습니다. 저라면 들어오는 순간부터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을 겁니다.”
신재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직 표정 관리가 서툴러 상대에게 감정을 읽히고, 쉽게 흥분하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예전처럼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 정도로 감정이 앞선 것은 아니었다.
화는 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알고 있다.
그래서 유진환의 말에 일부러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입술을 비틀었다.
‘나에 대한 평가를 입 밖으로 내서 말했어. 날 얕보고 있다는 거다.’
게다가 유진환의 목소리에선 들뜬 감정까지 느껴졌다.
상대가 얕보고 있다면 판단이 흐려졌다는 뜻이다.
오판을 끌어낼 수 있다면 오히려 기회였다.
“아, 죄송합니다. 화나게 할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됐고.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불렀을 때는 이유가 있겠죠? 설마 제가 날뛰는 걸 보고 싶어서 불렀을 리는 없고.”
“그런 목적이 아예 없진 않습니다만, 시간이 없으신 듯하니 말씀드리죠. 일전에 팀장님은 저와 함께 하셔야 한다고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말했던 것도 기억합니다.”
“그래도 사람이 살다 보면 여러 실수도 하고 사람도 죽여 보고. 그러다 보면 다른 생각을 품을 수도 있고 그런 거죠.”
신재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죽인 것 아닙니까? 마치 제가 원인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사실은 팀장님이 원인 맞습니다.”
잔뜩 날이 선 신재현이 가만히 상황을 살피고 있자 유진환은 잠시 시간을 두고 말했다.
“방우명 사장. 팀장님이 조사하려고 벼르고 있던 사람 맞잖습니까.”
“그야 당연합니다. 탈세 정황이 보이고 현직 국회의원에게서 정보를 미리 받았다는 정황이 보이니까요.”
“바로 그겁니다.”
유진환은 펜을 들어 신재현을 가리켰다.
“방우명 사장님의 회사는 사실 제가 컨설팅해 드렸습니다. 나름 신경을 썼고 생각하시는 것과는 다르게 아주 견실한 회사입니다.”
“견실? 바지사장이 경영하는 회사입니다. 즉, 차명이라는 거죠. 이게 견실하다니 대체 어느 나라 기준입니까?”
“바지사장인 것만 빼면 매우 견실하잖습니까. 경영도 충실히 했고 일한 만큼 월급도 가져갔습니다. 뭐, 사장이 조금 사익을 추구한 정황도 있지만.”
“그러니까 대한민국 법에 따르면 조사 대상이 맞습니다.”
“그래서 죽었잖아요.”
유진환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능글거리며 이리저리 약 올리듯 하던 말투가 차갑게 변해 있었다.
마치 말로 찌르는 것처럼.
“신재현 팀장님은 자신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더군요. 팀장님이 누군가를 조사한다고 콕 집어 발표하면 그 명단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역적 취급을 받습니다. 주위에서 손가락질 받고 탈세범이라는 오명을 씁니다. 전국의 시민들이 그 결과에 관심을 가져요. 보통 세무서에서 세무 조사한다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덜컥하는데 서울청의 신재현 팀장님이 담당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야말로 자살하고 싶어지겠지요.”
“그래서 방우명 사장의 죽음이 제 탓이다?”
“일말의 책임은 느끼지 않으시나요? 방우명 사장이야 걸리는 것이 있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칩시다. 팀장님은 앞으로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장담하십니까?”
신재현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유진환의 말은 앞으로도 사람이 죽어 나갈 수도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이 유진환의 사주이든, 정말 조사에 대한 압박감이든.
“앞으로 점점 거물을 상대하실 계획이시죠? 그 과정에서 희생당하는 사람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신재현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자 유진환이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팀장님, 그들을 안타까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람은 각자의 위치와 가치가 있어요. 그들은 우리의 판 위에서 우리 손에 의해 움직일 때 가치를 갖는 겁니다. 오히려 저는 이번에 팀장님이 그걸 느끼셨으면 하는데요.”
유진환이 펜을 내려놓고 손을 펼쳤다.
“팀장님은 이미 타인의 생사를 그 손에 쥐어 봤습니다. 방우명 사장은 저와 팀장님이 동시에 등을 떠민 겁니다. 이제 그만 인정하세요. 팀장님 역시 판을 굴리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제 제안을 생각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드리는 기회입니다.”
물끄러미 유진환을 바라보던 신재현이 문득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까지 가나 봤더니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추악한 모습만 보여 주는군요.”
의외로 타격이 없는 모습에 유진환이 의아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거기서 조금만 더 흔들어주면 된다.
당장 여기서 넘어오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앞으로 조사하면서 몸을 사리거나 트라우마가 생길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신재현은 언제 흥분했냐는 듯 긴 심호흡과 함께 물끄러미 유진환을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전제가 틀렸습니다. 저는 아무나 조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TF팀이에요. 세무서나 다른 과에서 다룰 만한 일반 시민을 불러다 놓고 카메라 앞에 세워가며 괴롭히는 과가 아니라구요. 우리가 콕 집어 부르는 사람들은 세무서에서 손댈 수 없는 위치, 그리고 명백히 탈세 정황이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돌아가신 분은 안타깝게 됐지만 그건 당신이 손을 썼기 때문이겠죠. 나한테 덮어씌우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조사를 할 겁니다. 당신들이 비겁하게 사람 목숨을 갖고 장난친다고 물러서진 않을 겁니다. 그 죗값까지 치르게 해 줄 거니까.”
“……쉬운 일을 돌아가시네요.”
유진환은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사장의 자살을 아직 기사로만 접해서 상황을 모르시나?”
“압니다. 그러나 쉽게 모든 여론이 일제히 돌아서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가 그동안 쌓아 온 것이 있고 노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재현은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문자를 보냈다.
“이제는 제 용건을 시작해야겠군요.”
이 대화로 신재현이 느낀 것이 하나 있었다.
호텔을 조사했을 때 분명 책임자는 윗줄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유진환에게서는 그런 보고를 받았다는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일부러 흔들리는 척도 해 보고 화난 척을 해 봐도 그랬다.
사장의 자살을 구실로 돈세탁 루트를 덮어 보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답은 둘 중 하나다.
그 호텔이 여당 차주혁의 것이거나, 하동문의 것이 맞는데 아직 보고를 받지 못했거나.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자리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이젠 내가 떠볼 차례네.’
신재현은 방금 보낸 문자의 답장을 기다리며 편안하게 자세를 잡았다.
3차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