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많이도 해 먹었네 (1)
-덜컹.
중형차인데도 비좁음이 느껴졌다.
양옆과 앞뒤로 가득 찬 남자들은 장거리 이동이 익숙한 듯 각자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팀원들끼리 나갈 때는 이렇게까지 좁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불편하긴 한데 비좁다고 불평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들은 원래 이게 일상이니까.
누구는 팔짱을 끼고 곤히 자고 있고 누구는 사건 파일을 훑어보고 있길래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아침에 기자들 앞을 지나 출근했다가 나학진 기자의 차에 타고 몰래 빠져나온 참이다.
일단 나오긴 했는데 별 이상이 없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안 그래도 바쁠 사람들에게 수시로 전화하자니 미안하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뉴스 영상을 훑었다.
화제가 된다는 건 이럴 때는 좋다.
멀리 있어도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으니까.
-어제 오후, 갑작스러운 기승평 의원의 공개 사과가 있었습니다.
역시 어제 있었던 기승평 의원의 등판이 큰 화제가 되었나 보다.
정치, 사회 탭이 모조리 기승평 의원의 대국민 사과로 가득했다.
사실 기자들 입장에서는 이게 웬 떡인가 했을 것이다.
앞서 국회의원 자녀들의 출석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본인이 서울청으로 자진 출두해서 대국민 사과를 한다고?
백번 양보해서 자녀들은 출석 통지서를 받았으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과 그들의 자녀는 차원이 다르다.
국회의원은 기자회견 한 번을 하더라도 시간과 장소를 고르며 한 문장마다 의도를 담는다.
단어조차 심혈을 기울여 선정한다.
그런 국회의원이 깜짝 기자회견을 할 때의 이유는 두 가지다.
불시에 정보를 풀면서 반등을 노리는 경우와, 더 지체하면 안 될 정도로 급박할 때.
어제의 경우는 굳이 따지자면 후자였다.
아마 기호섭이 청사에서 난리 치고 간 것을 알게 된 후,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1야당의 기승평 의원은 오전에 출석한 아들 기호섭 씨의 조사에 불미스러운 점이 있었던 것에 유감을 표했습니다. 기승평 의원의 기자회견 후, 서울지방국세청의 발표에 의하면 조사 대상자인 기호섭 씨가 조사에 비협조적이라 일단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기승평 의원은 직접 아들 기호섭 씨와 서울청에 출두해 성실하게 조사를 받을 것을 약속했습니다. 기 의원은 법에 따라 움직이는 사정기관인 국세청에 협조하지 않은 것은 국민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철없는 아들의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부모로서 책임지겠다며 출석 이유를 밝혔습니다. 제1야당에서는 기 의원의 뜻을 존중하며, 국세청의 조사에 협조하는 국회의원들을 진정한 국민의 대표라고 추켜세웠습니다.
기사를 본 것뿐이었지만 나도 이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다.
기승평이야 여론이 달려들어 물어뜯기 전에 불을 진화할 셈이었을 것이고, 제1야당 역시 구설수에 오르기 싫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이번에는 우리에게 유리하다.
이 모든 게 바로 우리 뒤에 있는 사람들 덕이다.
우리 라인 끝의 흑막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를 앞둔 국민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나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끼며 생방송을 틀었다.
역시나 서울청 정문 현관 앞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기자들은 어제보다 훨씬 많아진 듯하다.
살짝 걱정이 되었다.
어차피 방문증이 없는 이상 기자들이 안까지 들어올 일은 없지만, 사람이 많아지면 눈치를 채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저 자리에 있는 것은 이런 일에 이골이 난 기자들이니까.
나는 볼륨을 높이며 생중계를 여럿 돌려가면서 들었다.
-어제 현직 국회의원인 제1야당의 기승평 의원이 다녀간 이후로 서울청의 조사에 탄력이 붙고 있습니다. 오늘도 서울청의 특수조사 2팀, 소위 신재현 팀은 조사에 박차를 가하며…….
-오늘 벌써 국회의원과 가족관계에 있는 조사 대상자가 4명, 청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직까지는 전부 현직 국회의원의 자녀인데요, 과연 여기서 조사를 끝낼지 아니면 이에 탄력을 받은 서울청이 국회의원에게까지 그 손길을 뻗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신재현 팀은 오늘 아침 일찍, 6시 40분에 출근했습니다. 어제도 저녁 늦게 약 11시 30분에 퇴근했는데요. 아무래도 조사 대상이 대상이다 보니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재현 팀은 지금 이 시각에도 청사에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근처 건물에 올라와 있습니다. 바로 저기 보이는 창문이 이번에 신재현 팀이 조사 중인 회의실인데요. 현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세 명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신재현 팀은 총 5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나머지 2명은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등골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역시 훑어보길 잘했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 황민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형. 지금 우리 사무실이에요?”
-네.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내가 형이라고 부른 지 꽤 됐는데도 여전히 이 형은 나에게 깍듯했다.
그렇다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아닌데.
뭐, 이게 황민우 형 나름의 각오인 거라서 내게 말을 놓으라 마라 하진 않는다.
때 되면 알아서 하겠지.
그보다 급한 게 있다.
“형. 지금 아래에 빌린 회의실 있잖아요. 거기 노출됐어요.”
-예에? 누가 들어왔습니까? 서울청 보안 그렇게 만만하지 않을 텐데.
“뚫고 들어간 건 아니고 건너편 건물에서 카메라로 줌 땡겨서 보고 있네요.”
-아…… 그건 생각을 못 했네요. 기자들 진짜…….
황민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빠 죽겠는데 속 썩인다는 빡침이 느껴졌다.
-제가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블라인드 치고 해야겠네요.
“아뇨, 일부러 형한테 먼저 연락한 거예요. 지금 QNN 방송사 라이브 보면 대충 어디서 찍는지 감 잡힐 거예요. 조사과 몇과더라? 저랑 비슷한 이미지에 비슷한 머리 스타일 한 조사관님 계시잖아요. 키도 딱 비슷한데.”
-아아, 조사3과에 계시는 분이요? 대각선 뒤에서 보면 딱 닮긴 했죠. 정면은 확 다르지만.
“죄송하지만 그분한테 요청드려서 문만 살짝 열고 보일 듯 말듯 입구에 서달라고 해주세요.”
전화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황민우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어떤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처리하겠습니다.
기자가 열렬한 취재 정신을 발휘한다면 나는 그걸 이용해주면 되는 일이다.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전화를 끊고 옅은 한숨을 내쉬는데 어쩐지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차 안의 수사관들이 하나같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던 사람까지 일어났길래 나는 멋쩍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깨웠나요?”
“아뇨, 아닙니다. 어차피 일어날 때가 됐어요. 그보다 그런 건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전화 내용이 문제였나보다.
너무 약아 보였나.
내가 머쓱하게 웃자 옆자리에 앉은 수사관이 손을 내저었다.
“아, 추궁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이런 말투가 입에 붙어서요, 죄송합니다. 국세청도 탈세범 잡으려고 급습에 잠복까지 한다더니 생각하시는 게 수사관 뺨쳐서 놀란 겁니다.”
“……저도 원래 이렇진 않았는데 이 일 하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수사관이 수긍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놈들이 문제죠. 그런 놈들 잡으려면 우리도 그놈들처럼 생각하고 독해져야 하니까.”
뒷자리에 있던 수사관도 거들었다.
“그렇다고 자책하실 필요는 없는 겁니다. 그놈들처럼 생각한다고 그놈들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식칼이 주방장 손에 들어가면 요리도구지만 살인범 손에 들어가면 흉기잖습니까. 우리야 범인만 잘 잡으면 되는 거예요. 조사관님의 경우에는 탈세범이겠죠.”
이름 모를 수사관은 그렇게 나름대로의 위로를 건넨 뒤 기지개를 켰다.
정말 거의 다 와 가나 보다.
나는 차에 타기 전 그들이 보여준 자료들을 떠올렸다.
전문 수사관이라 그런지 아주 철저했다.
나는 단순히 자금 흐름과 장부만 보고 나가는 줄 알았는데 이들은 아예 도면을 가져와서 펼쳐놓았다.
입구가 몇 개고 지하가 있고, 사무실은 어디에 위치하는지까지.
수사관들은 계단과 엘리베이터 위치까지 꼼꼼하게 체크했다.
나에게는 입구와 층수, 사무실 위치만 잘 외워두라고 했지만.
하긴, 이제부터 우리가 쳐낼 것은 웬만한 각오와 준비로는 안 된다.
우리의 목표는 다음 대통령으로 손꼽히는 두 대권주자, 여당의 차주혁과 제1야당의 하동문이었다.
지금부터 가는 곳들은 그 둘중 하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예상한 곳이었다.
유진환과 연결된 것 같으니 아마 하동문 쪽일 것이다.
빡빡한 일정이었다.
총 3일간 세 군데.
단 한 곳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그리고 빠르게 잘라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되레 역풍으로 우리 쪽이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끝장날 수도 있었다.
더불어서 위로 연결되는 증거가 있으면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대권에 도전하는 국회의원이니만큼 세간에는 둘 다 일 잘하고 청렴하고 호감가는 이미지가 떡하니 박혀 있다.
그런 자들의 민낯을 밝혀내는 것이니 앞으로 얻어갈 부스러기 같은 단서 하나하나도 어떻게 배열해서 상대를 끌어낼지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겁먹을 내가 아니다.
그들의 목에 칼날이 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면, 닿게 만들면 된다.
절대 그런 놈들은 대통령의 권좌에 앉게 둘 수 없었다.
그 껍데기를 벗겨내고 세상에 정체를 낱낱이 밝혀버리고 말 것이다.
-덜컥.
비포장도로에 들어서며 차가 흔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 섰다.
둘러보니 풀밭이 보이는 주차장이다.
“도착했습니다. 미리 말씀하신 대로 움직이시고, 신재현 조사관님은 우리 손님이시니까 뒤에서 따라오세요. 저기 송 수사관이 붙어 있을 겁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수도권 외곽지의 한 호텔.
말로는 3성급이라고 하는데 외관과 시설은 2성에도 못 미치는 허름한 곳이다.
굳이 말하자면 모텔에 가까운 곳.
인터넷에 올라온 리뷰를 보면 방음도 안 좋고 서비스도 별로네 하는 평가가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3성인 이유는 간단하다.
사무용 컴퓨터를 비치하고 비지니스 라운지라 이름 붙인다거나 명목상으로 무슨 서비스를 만들어놔서 3성의 조건에 아슬아슬하게 맞춰놓은 것이다.
이것만으로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여러 가지 상황이 마음에 걸렸다.
현금의 비중이 유독 높은 것도 그렇고, 미약하게나마 눈에 ‘보이는’ 숫자도 그렇고.
지현석 검사가 내민 수많은 관계 회사들 중에서 나는 여기를 처음으로 꼽았다.
구린내가 난다.
돌 곳이 많은 만큼 빨리 해치우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나는 아낌없이 보고 털 생각이었다.
그런 각오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나보다.
“그럼 갑시다!”
비장한 목소리와 함께 수사관들이 일제히 차에서 내렸다.
***
지현석 검사의 지시로 신재현을 전담하기로 한 송 수사관은 한 발짝 앞서 걸어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국세청에서 오신 귀한 손님.
여기 말고 다른 현장으로 나간 지현석 검사가 절대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사람이다.
소속이 다른 기관에서 협조차 온 사람이니 무사히 돌려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 자신의 임무는 평소 하던 대로 사무실을 털고 신재현을 무사히 자료 앞까지 데려다주는 것.
자신들도 수사관의 경험과 눈으로 조사하겠지만 신재현은 국세청의 눈을 대신해서 왔다.
흔히 있는 일이 아닌 만큼 위에서 얼마나 이번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만했다.
더군다나 그렇게 국세청에서 귀하게 감싸고 도는 신재현을 달랑 혼자 보냈다.
눈먼 돌멩이라도 날아오는 일 없도록 철저히 보호하라는 엄명까지 있었다.
때문에 송 수사관을 비롯한 수사관들 마음속에서 신재현의 취급은 ‘귀한 손님’이었다.
그런 귀한 손님이 차 안에서 통화하는 것을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전화는 짧았지만 내용은 왜 그가 국세청의 눈이자 청장의 심복으로 불리는지 깨닫게 했다.
‘후, 역시 위에서 그냥 귀하게만 다루는 건 아니란 뜻이군.’
그가 유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단편적으로 느낀 것은 차 안에서였다.
그런 사고방식은 현장에서 구르고 닳을 정도가 되어야 갖춰지는 것이다.
“어?”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렇기에 귀한 손님이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어느 한 곳을 쳐다봤을 때는 덜컥했다.
이상한 점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뭔가를 발견한 건지, 수사관은 얼른 다가갔다.
신재현의 의견이라면 절대 무시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신재현은 무언가에 놀란 듯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송 수사관이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거기에는 풀이 무성한 초원만 있을 뿐이었다.
주차장은 포장되지 않은 돌바닥이고 그 너머에 아직 개발되지 않은 풀밭.
신재현은 이를 빠득 갈더니 그 풀밭을 향해 달려가다시피 했다.
“어어, 같이 가시죠! 무슨 일이십니까!”
신재현은 연신 이상하다, 이럴 리 없는데, 라는 말을 반복하더니 어느 한 곳을 발로 쿡 밟았다.
그리고 두툼한 나뭇가지를 주워 땅을 파기 시작했다.
“뭐라도 있습니까?”
“저도 이상해서 파보는 겁니다. 설마 해서요.”
신재현이 정신없이 땅을 파는 동안 한 수사관이 트렁크에서 삽을 가져왔다.
아무리 봐도 이상할 것 없는 풀밭인데 대체 그는 뭘 본 건지.
수사관들이 어리둥절하면서도 묵묵히 땅을 팠다.
그리 깊게 파지는 않았다.
겨우 50센티미터 정도 팠을까.
삽 끝에 미끌한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이 났다.
“어? 진짜 뭐가 있는데요?”
수사관 하나가 삽을 내던지고 손으로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와, 씨발!”
그리고 비닐에 싸인 5만 원권 다발을 본 순간 수사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동시에 시선이 일제히 신재현을 향했다.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눈길이 모였지만 신재현은 이마를 짚더니 하늘을 쳐다보며 영문 모를 감상을 내뱉었다.
“진짜 있네. 씨발 얼마나 해 먹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