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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망나니-245화 (245/500)

245화. 조져지는 건 나였고

“별 쓰잘데기 없는 놈이 진상 짓 하고 있었네요.”

내가 도로 빌려둔 회의실로 들어오자 팀원들이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처리하셨어요. 오늘은 큰소리도 안 치시고 손도 안 나갔고.”

“더없이 깔끔한 해결입니다. 팀장님, 성장하셨군요.”

눈을 반짝거리는 팀원들을 보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아니,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게다가 저런 놈 담당자는 저라고까지 하셨으면서.”

“에이, 저희가 아무리 별짓을 다 해봤자 팀장님이 내지르는 한 마디보다 못한데요. 팀장님이 나가니까 바로 정리되잖아요, 그렇죠?”

말이라도 못하면…….

강혜원의 논리에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오늘은 의외였어요. 되게 침착하셔서.”

안길진까지 저렇게 말할 정도면 평소에 내 이미지는 대체 어땠다는 걸까.

그렇게 묻자 안길진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빡치면 쥐어 패죠.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크흠, 반성하겠습니다.”

내가 멋쩍게 웃자 다음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던 황민우가 물었다.

“오늘은 정말 침착하시던데, 별로 화 안 나셨습니까?”

“화야 나긴 했죠.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별것도 아닌 것들이 아버지 위세 믿고 날뛰는 게 같잖아서요. 대신에 사고 치긴 했어요. 국회의원을 부를 거니까.”

기호섭의 저 망나니짓에는 맞상대하는 것보다 국회의원을 부르는 것이 더 효과적이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거짓말처럼 투지가 식었다.

내가 왜 여기서 저런 놈과 말싸움하느라 시간을 뺏기고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할 일도 많고 바쁜데.

굳이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승평은 3선이에요. 올까요?”

평소라면 힘들겠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좋았다.

오늘 얌전히 조사를 받고 자진 납세의 의지를 보이던 다른 자녀들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올 겁니다. 밖에 기자들 모인 거 보이시죠? 지금이 아주 좋은 기회예요. 여론이 우리 편입니다.”

기호섭에게 물을 것은 그의 사업에 들어간 막대한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손대는 족족 실컷 말아먹었던데, 그 손실은 당연히 아버지가 메꿔줬겠지.

그러나 증여세 신고는 들어온 것이 없었다.

“기호섭만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기승평은 아마 아들이 가서 잘 해결하고 오길 바랐을 겁니다.”

“먼저 조사 거쳐 간 다른 자녀들처럼요?”

“네. 자기가 젊어서 잘 몰랐다, 성실하게 다 내겠다.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기도 하고.”

“기호섭이 수습에 실패했으니 증여세의 타겟은 아버지에게로 간다 이거군요.”

“그래서 부를 겁니다.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해요. 이실직고한 다른 국회의원 자녀의 예도 있으니 기승평이 더더욱 비교될 겁니다.”

“우리 쪽이 버프 먹고 들어가는 거군요.”

안길진이 게임을 했었나?

그가 나름 이해하기 쉽게 든 비유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잠깐만요, 그러면 팀장님 어떻게 하시게요? 자리 비워야 하잖아요.”

강혜원이 갑자기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물었다.

원래라면 지금 이 조사는 미끼다.

미끼만 해도 우리 팀 전체가 들러붙어야 할 정도로 큰 규모긴 하다.

웬만하면 미끼라는 생각도 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일부러 조사 첫날에 얼굴을 비췄다.

이렇게 큰 조사에 팀장인 신재현이 없다?

의심을 사기 충분하니까.

그래서 첫날엔 일부러 내가 직접 조사하고 내일부터는 검찰과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

“기승평 의원처럼 거물이 왔는데 팀장님이 없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우리 포지션이 유리하게 끌어와야죠.”

“시간 지정해서 출석 요청드릴까요?”

강혜원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내가 없는 시간에 오는 것이 문제라면, 미리 시간을 정해두면 되지.

평소라면 우리가 국회의원의 스케줄에 맞춰야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좀 더 세게 나가도 된다.

약점을 잡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기승평은 우리에게 좋게 보여서라도 조용히 끝내고 싶을 것이다.

당장 1층에 내려가서 기자회견 한 번만 해 주면 기승평의 지지율은 바로 하락이다.

“그것도 좋지만 더 압박감을 드리고 싶네요. 그래야 다른 생각을 안 할 것 같아서요.”

“의심의 여지를 차단하시는 건가요? 어떻게요?”

나는 팀원들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제가 직접 기승평에게 전화하겠습니다.”

***

기승평은 나간 지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돌아온 아들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조사를 끝내고 왔다기엔 너무나도 이른 시간이었다.

불안한 가운데 기승평이 아들을 다그쳤다.

“잘하고 왔지?”

“그 새끼 진짜 뭐 하는 놈이야?”

아들의 대답이 영 못마땅했지만 기승평은 순순히 대답했다.

“어제 얘기했잖아. 너 내가 얘기할 때 뭐 들었냐. 설마 듣고 흘린 거야?”

“아, 됐고. 얼른 얘기나 해보라고. 만나긴 만났는데 뭐가 이상해서 그래.”

“뭐가 이상한데.”

“겨우 공무원 주제에 당당하단 말이야. 고개도 뻣뻣하고. 민원 넣어보려면 넣어보라던데? 공무원은 원래 이런 거에 설설 기는 거 아닌가? 왜 안 기지?”

기호섭의 의문 섞인 말에 기승평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너, 너너너! 가서 뭐 했어? 죄송합니다, 그런 거 안 했어?”

“내가 뭘 죄송해? 그 새끼가 나한테 해야지.”

“이 미친놈아!”

기승평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가슴을 퍽퍽 때렸다.

“그놈은 그냥 공무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놈 뒤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 할 거물이 도사리고 있어!”

“공무원 따위가 무슨 거물이야. 그 뒤에 뭐가 있는데. 뭐 국회의원이라도 있대?”

후욱, 하고 기승평이 숨을 들이쉬었다.

“잘 들어라, 멍청한 아들 새끼야. 오늘 하루만 해도 여야 4선, 5선, 당대표의 아들딸들이 자진해서 기자회견을 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절대 사과하고는 거리가 먼 그놈들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멍청해서?”

-짜악!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아들을 향해 결국 기승평이 손찌검을 날렸다.

국회의원으로 보낸 세월이 약 12년.

국회의원 이전에는 금배지 달아보겠답시고 아등바등한 세월이 또 여러 해.

그 공들인 탑이 송두리째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몇 년 전에 아들 때문에 대선 망친 의원 욕했었는데 남 얘기할 때가 아니구만. 우리 집이 무너지게 생겼어!”

기호섭이 뺨을 부여잡고 억울한 표정을 했다.

“지금 날 때렸어?”

“그래, 이놈아! 지금 내 커리어가 말아먹게 생겼으니까! 그놈은 단독으로 국회의원, 장관을 잡아먹은 놈이다. 국세청이 올해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아냐? 한 손에 드는 재벌을 치고 그 집 딸내미랑 사위를 잡아넣었다. 지금 그놈이 겨우 네까짓 걸 잡으려고 이 지랄을 하는 것 같냐? 나, 나를 잡으려고 이러는 거야!”

뺨을 어루만지던 기호섭이 순간 멈칫했다.

“그놈이 국회의원을 잡았다고? 어떻게?”

“내가 아까 말했잖아악! 그놈 뒤에 무서운 게 도사리고 있다고! 여론도 안 좋은데!”

기호섭이 잠시 물끄러미 기승평을 쳐다보며 말이 없어졌다.

아들의 평소 행태를 생각하면 이런 반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기승평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뭐야, 가서 뭐 했어? 사실대로 얘기해!”

“그냥 싸가지 없는 공무원 새끼 참교육 좀…….”

“뭘 어떻게 했는지 알아야 내가 수습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기호섭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난 조사 안 하겠다고. 아빠더러 오라던데.”

“……뭐?”

“수습 가능한 거지? 가서 좀 몇 마디 해 주고 오면 되는 거잖아.”

“이, 이 망둥어 같은 놈이 결국 우리 집안을 망치는구나!”

기승평이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 위에 있던 책을 집어 던졌다.

책뿐만이 아니었다.

재떨이, 핸드폰, 리모콘에 이르기까지.

기승평은 손 닿는 곳에 있는 모든 것을 잡아다 내던졌다.

-와장창! 콰앙!

“아빠! 왜 그래! 진정해!”

“내가 너 때문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는데 진정해? 너 이 새끼, 가서 죄송하다고 세금 성실히 내겠다고 하는 거, 겨우 그게 어려워? 그렇게 어렵냐고!”

“아니, 그놈 뒤에 누가 있다는 게 확실한 것도 아니고. 아빠가 그놈한테 당한다고 확실히 정해진 것도 아니잖아. 사과 몇 마디로 끝날 거였으면 아빠가 대국민 사과하면 되는 거 아냐?”

“이게 내 새끼라고!”

-짜악!

기승평이 성큼성큼 다가와 아들의 멱살을 잡고는 뺨을 후려쳤다.

아무리 아들이 사고를 치고 다녀도 손찌검은 한 적이 없던 기승평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타이밍이 안 좋다고 했잖아! 다른 놈들은 다 사과하고 있는데 너 혼자 뻗대고 있으면 언론이 어디를 치겠냐? 당연히 너하고 나부터 치지! 당장 내일 신문 1면에 뭐라 뜰지 모르겠어? 정치고 뭐고 뭣도 모르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좋았잖아. 왜, 대체 왜 이러니!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우당탕!

기승평에게 밀쳐진 기호섭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거실에는 기승평이 내던진 물건들로 난장판이 된 후였다.

“후, 수습해야 돼. 이대로 끝날 순 없어.”

기승평은 이를 빠득 갈며 핸드폰을 들었다.

당에 이야기한들 도와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국세청 쪽에서 무슨 성명 발표가 나오기 전에 기자회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이야 무조건 사과다.

지금은 선수를 치는 것이 중요했다.

기승평이 서둘러 아는 기자의 전화번호를 찾으려는 순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그새 기자들이 냄새를 맡았나 싶어 전화를 받지 않으려 했지만, 번호가 이상했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전화가 끊어졌고 곧이어 같은 번호로 문자가 들어왔다.

[web] 서울지방국세청에서 안내 말씀드립니다.

기승평은 제목을 보는 순간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절대 문자로 끝낼 일이 아니다.

반드시 통화로 양해를 구하고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국세청 맞습니까?…… 네네. 알겠습니다. 괜찮으시면 지금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네. 아들놈과 함께 찾아뵙고 소명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아, 아빠…….”

국회의원이 된 후로는 남에게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않던 아버지였다.

그런 그가 핸드폰을 붙잡고 절절매는 모습에 기호섭이 멍하니 몸을 떨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건 몰래카메라가 분명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자. 대국민 사과하러.”

기승평은 어깨가 축 처진 모습으로 힘없이 말했다.

“서울청 앞에 기자들 잔뜩 모여 있으니 마침 잘됐네. 너, 가자마자 무릎 꿇어라.”

“내, 내가 기자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고?”

“못 하겠으면 집에서 나가.”

“아빠!”

기승평은 아들의 호소를 무시하고 거실을 빠져나갔다.

기호섭이 서둘러 아버지의 뒤를 쫓았지만 기승평은 냉담했다.

“이번 일 끝나면 사업이고 뭐고 다 접어. 질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던 것도 다 끊고. 약도 끊어.”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된다고?”

“그렇게까지 하고도 내가 다시 금배지를 달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승평은 주차장을 향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호섭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버지의 차를 타고, 공무원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나왔던 길을 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지금 이것이 현실이 아니길 빌었다.

그토록 큰소리를 치고 나왔는데 도로 들어가라니.

쪽팔려 죽을 일이었다.

그러나 기호섭의 간절함에도 아랑곳없이 기승평은 그를 끌고 서울청 앞에 섰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기승평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승평이 기자회견에서 증여세 탈루 혐의를 밝히는 동안, 그가 전화로 요청했던 대로 신재현이 1층으로 내려왔다.

기승평으로서는 카메라 앞에서 신재현과 화해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신재현 역시 그 꿍꿍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순조로운 조사와 미끼 역할을 위해 기승평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저희 아들놈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제가 잘 타일렀으니 성실하게 조사 받을 겁니다.”

기승평은 억지로 신재현 앞에서 기호섭의 고개를 내리눌렀다.

기호섭은 영혼이 나간 얼굴로 불과 1시간 전에 조지겠다고 장담했던 상대에게 고개를 숙였다.

‘조져지는 건 나였다고……?’

멍한 얼굴의 기호섭의 옆에 카메라 플래시가 번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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