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허리 펴세요
여당 3선 국회의원 기승평의 아들 기호섭은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국장급 인사라는 고위 공무원 놈들도 아버지인 기승평 앞에서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선거철에야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 다니지만 그건 겉으로 보여 주기 위함이니까.
게다가 기호섭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후광을 톡톡히 보며 자랐다.
아버지가 국회의원이 되기 전, 모 공사의 사장일 적부터 학교에서는 그가 왕이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선생님들은 끽소리도 하지 못했다.
기호섭의 앞을 막는 사람은 없었고, 설령 있다 해도 전화 한 통이면 눈앞에서 사라졌다.
사람을 때리면 돈으로 해결하고 덤비는 놈은 권력으로 해결했다.
항상 그의 주변에는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어 보려는 어른들로 가득했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도 그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그에게 7급은 날파리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기호섭이 공문에 지정된 곳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대기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오라 가라 한 것만 해도 마뜩잖은데 기다리라니.
그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대접이었다.
자신을 불러내 이런 취급을 한 그놈의 조사팀인가 뭔가를 불러 혼을 내고 싶었지만 정작 그들이 어디 있는지를 몰랐다.
방문증만 갖고는 다른 사무실에 들어갈 수도 없으니 그는 연신 투덜대며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먼저 와 있던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였는데 얌전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봐요, 그쪽은 화도 안 나시나?”
여성은 기호섭을 힐끔 쳐다봤다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도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참, 무시해? 지금 나 무시한 거예요?”
처음 본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누군지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오늘 출석한 사람들은 자신처럼 국회의원의 자녀들이 대부분이라고 했으니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호섭은 괜히 옆에 있는 의자를 뻥 찼다.
함께 대기실에 앉아 있던 여성이 핀잔을 주었다.
“여기 혼자만 쓰는 거 아니니까 조용히 좀 하세요. 그럴수록 본인만 손해니까.”
“뭐예요?”
기호섭이 짜증을 훅 냈지만, 여성은 시선도 주지 않으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우리 행동 하나로 상황이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지 모르는 것 같네요. 본인 일이야 알아서 하시고, 저 있는 동안에는 시끄럽게 하지 마세요. 괜히 도매급으로 얽혀서 밉보이기 싫으니까.”
“뭐요? 저런 놈들한테 밉보이고 말고가 뭐 있어? 저놈들이 나한테 설설 기어야지!”
기호섭의 말에 가만히 앉아 있던 여성이 한심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것으로 끝.
더 이상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상대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반응이 기호섭의 성질을 돋웠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냐고! 저까짓 놈이 대체 뭐가 잘났다고 내가 직접 와야 되는데!”
기호섭이 씩씩대며 소리를 질렀지만 먼저 와 있던 여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기호섭은 대기실을 뛰쳐나갔다.
복도에는 일 때문에 다른 과를 오가던 직원이 몇 다니고 있었다.
기호섭이 그중 가장 만만해 보이는 사람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여기서 일하는 공무원 맞아요?”
“아, 넵!”
혹시 모르니 시작은 존댓말로.
그러나 공무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기호섭은 대번에 말을 낮췄다.
“내가 이거 공문 보고 왔는데 내가 기다리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 이것들 사무실 어디야?”
“예, 예?”
다짜고짜 하는 반말에 붙잡힌 직원이 당황했다.
“아, 어디냐고. 요즘 공무원들은 사람 무시하는 게 트렌드냐? 너 몇 급 누구야?”
“8급입니다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
“문제? 지금 이런 데다 불러놓고 사람 기다리게 하는 데 문제가 아냐?”
기호섭은 직원의 손에 억지로 공문을 쥐여 주었다.
직원이 엉겁결에 공문을 읽었다.
“아, 이 팀이 여기에 대기실 따로 마련해 놨으니까 잠시만 기다리시면 될 거예요.”
“잠시? 야, 그런 마인드가 안 되는 거라고. 알아?”
“선생님, 불편하시겠지만 순서가 있을 겁니다. 조금만 더 안에서 기다려주시면 해당 팀에서…….”
“야! 이것들이 지금 장난하나! 말을 해도 못 알아먹네. 뭘 기다려? 야, 너 같은 놈들은 옛날 같으면 내 얼굴도 똑바로 못 쳐다봤어. 네가 할 일은 지금 당장 그 팀인지 뭔지에 뛰어가서 얼른 이리로 달려오라고 하는 거야. 알아들어?”
지나가다 날벼락은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직원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자기 일도 아닌데 지나가다 붙잡혀 괜히 욕을 먹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놈이 원하는 대로 팀에 안내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진상 민원인 정도는 자신이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한창 고생하고 있을 2팀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길 가다 붙잡힌 이 직원은, 신재현을 응원하는 사람이었다.
“순서가 있으니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듣기로 회의실에 커피랑 녹차, 가벼운 다과도 마련해 놨다고 하니까…….”
“야아아! 너희들 지금 나한테 그런 싸구려 커피나 먹으면서 기다리라는 거야? 지금 몇 분이나 됐는지 알기나 해?”
“선생님 차례는 아직 좀 더 기다리셔야…….”
“갖다 치워!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지, 어디서 변명이야! 야, 맞아 볼래?”
이쯤 되면 아무리 침착하게 대응하던 직원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것밖에 없네요. 안에서 기다려 주세요.”
직원 나름대로 당연한 처사였으나 기호섭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무시였다.
“너 때문에 내가 지금 구경거리가 되고 있잖아! 야, 사과해. 빨리.”
“네?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주시면…….”
“얘 진짜 말 많네. 하라면 해! 너 민원 쳐맞고 싶어?”
공무원은 민원이라는 말에는 사족을 못 쓴다.
침착하게 대응하던 직원의 얼굴에 다시 당황이 퍼졌다.
“빨리 안 해? 너 뒤에 뭐 대단한 백이라도 있냐? 그래서 이렇게 뻣뻣해?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눈 안 깔아?”
직원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진상의 규모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진정하시고…….”
“민원 넣으면 나 하나만 넣을 줄 아냐? 아는 놈들 다 동원해서 너 조질 거야. 민원 수십 건이면 끝장난다며? 내 시간 낭비와 불쾌함에 대해 사과하라고.”
수십 건의 민원 폭탄이라면 이길 수가 없다.
직원은 갈피를 잡지 못하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사과로 넘어갈 수 있다면 사과하자.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 마세요.”
그런 직원을 말린 것은 냉담하고 단호한 어떤 목소리였다.
젊은 티가 나는 남자의 목소리가 발소리와 함께 천천히 다가왔다.
“잘못한 것 없는데 왜 고개를 숙이세요? 허리 펴세요.”
“아, 신 팀장님.”
복도 끝에서 다가오는 청년의 얼굴이 보이자 직원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반가웠다.
청년은 기호섭 앞에 선 후, 사무적인 어투로 물었다.
“기호섭 님, 맞으시죠?”
기호섭은 오는 길에 검색했던 어느 젊은 남자의 사진을 떠올렸다.
‘지금이라도 얼굴과 이름을 외워라!’라고 외치던 아버지 기승평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찾아본 것이다.
스마트폰에서 본 것과 똑같은 얼굴이 기호섭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
“아, 네가 신재현이야?”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문제? 하, 얘도 똑같네. 너네는 뭐, 교육 같은 것도 안 받아? 철밥통이니까 국민한테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다 이거냐?”
복도에서 신재현과 웬 진상이 싸우는 소리가 들리자 다른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모양새였다.
조사 대상자의 동선을 고려해서 일부러 낮은 층에 회의실을 잡았더니 구경거리가 생겼다 싶자 바로 뛰쳐나온 것이다.
국회의원 아드님이 신재현과 붙는 것은 절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하던 일까지 내팽개치고 나올 일인 것이다.
옆과 직원들의 눈에는 걱정 따위는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다만 괜히 지나가다 붙들린 직원에 대한 연민의 눈빛이 간혹 흘렀다.
“저것들은 또 뭐야, 안 들어가? 야! 구경났어?”
기호섭은 회사에서 하던 대로 행동했다.
자신의 회사나 아버지의 아랫사람들을 다룰 때, 이렇게 하면 다들 죄지은 듯 눈을 아래로 깔곤 했다.
그리고 기호섭의 화가 불똥이 되어 튈까 봐 전전긍긍하며 필사적으로 피했다.
그런 하찮은 개미 떼 같은 모습이 기호섭이 생각하는 ‘일반인’의 올바른 자세였다.
그러나 이 날파리들은 달랐다.
“와, 성깔 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된 거죠. 부모가 대체 누구래요? 뉘 집 자식이지?”
“옛날엔 다들 저랬잖아요. 저게 보통이지 뭐. 한 5년 전엔가? 동사무소에서 구의원이 공무원 뺨 때린 적 있었는데.”
“아, 그래요? 구의원이? 이유가 뭐래요?”
“기다리게 해서요.”
“어이쿠. 저 선생님도 그럼 뺨 싸대기 날리려나.”
“신재현 팀장님이 절대 가만있을 사람이 아닌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날파리들을 향해 기호섭이 주먹을 치켜올렸다.
“이것들은 대체 뭐야? 세금이나 받아 처먹는 공무원 놈들이 어디서 건방지게 눈을 뜨고 있어? 내가 누군지나 알아?”
“나왔다, 레퍼토리! 어떻게 말투가 저렇게 진부하냐…….”
“그러게요. 진짜 뉴스랑 담쌓고 살았나 보다.”
직원들이 오순도순 정답게 대화를 나누며 창문 너머로도 고개를 내밀었다.
‘어어, 이것들 간이 부었나.’
원래 생각했던 효과가 나오지 않자 기호섭이 언뜻 주춤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서면 모양새가 이상하다.
기호섭은 도로 신재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좀 한가락 하는 모양이더라? 그래서, 민원 맛 좀 보여줘? 민원 50건 정도 넣어주면 울면서 무릎 꿇고 싹싹 빌던데. 너도 그렇게 해줄까?”
그런데 신재현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심지어 귀를 후비기까지 했다.
“하세요.”
“뭐?”
“하시라구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너 같은 새끼는 아주…….”
“기호섭 씨. 아까 당신이 누구냐고 물어봤죠? 목소리가 아주 커서 나오면서도 들리더라구요.”
“왜? 이제 와서 겁나?”
기호섭이 성질을 슬슬 긁기 시작하자 강혜원이 뒤에서 빠른 속도로 중얼거렸다.
“때리면 안 돼요. 때리면 안 돼요. 때리면 절대 안 돼요.”
강혜원이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읊어대자 기호섭이 자신감을 찾았다.
자기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역시 겉으로 허세 부리는 거였네. 잔뜩 겁먹었구만.’
기호섭이 입가에 비웃음을 띄웠다.
“너는 사과로는 안 되겠다. 무릎 꿇으면 봐줄게.”
“때리면 안 돼요. 팀장님.”
‘응? 내가 아니라 팀장?’
기호섭의 의문도 잠시, 신재현이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기호섭을 훑었다.
눈빛만 봐도 모욕감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안 때립니다. 이왕 사고를 칠 거면 기호섭 씨를 돌려보내고 기승평 씨를 불러오면 어떨까 생각했는데요.”
“내가 누구인지도 알고, 아버지도 알면서 지금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네. 기승평 씨는 국회의원이지만 기호섭 씨는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이시죠. 기승평이라는 후광을 빼면 기호섭 씨에게 뭐가 남나요?”
“뭘 모르나 본데, 그렇게 태어난 것도 다 내 능력이야. 아버지의 힘이 내 힘이라고.”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기호섭 씨는 오늘 조사에 참석하실 필요 없습니다. 소명을 거절하신 걸로 알고 세무대리인과 기승평 씨께 여쭙도록 하죠.”
신재현은 감흥도 없다는 느낌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기호섭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가 아는 국회의원은 절대 권력이었다.
그런 국회의원이 정부 기관에 출두할 때는 범죄혐의로 검찰청에 가거나 시찰로 견학할 때뿐이었다.
“네가 뭔데 국회의원을 오라 가라야?”
기호섭은 신재현이 정말 자신 있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를 꺾고 조사에 유리하기 위한 술수라고 생각했다.
“기호섭 씨가 하려는 거 다 해보세요. 민원도 넣어 보시고 밖에 기자들 많으니까 어디 인터뷰도 해보세요. 그 잘난 국회의원 아버지에게 매달려도 보시고. 그래도 소용없을 겁니다. 저는 나름 계산적인 사람이라 지금 기승평 의원님은 절대 기호섭 씨 편을 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거든요. 모두 세법대로 흘러갈 거라고 확신합니다.”
“대체 무슨 개소리야?”
신재현은 더 볼 일이 없다는 듯 기호섭에게서 몸을 돌렸다.
“야! 어디 가! 야!”
아무리 소리쳐도 신재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떠나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기호섭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치를 떨었다.
모욕감?
아니, 아무리 때려도 흠집조차 나지 않는 벽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가진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 데서 오는 무력감이었다.
“쯧. 그러니까 처신 잘하시지. 아버지까지 수렁에 끌고 들어가시네.”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여성이 혀를 차며 도로 들어갔다.
복도에 나왔던 직원들 역시 잡담과 함께 원래 업무로 돌아갔다.
“오늘은 조용히 끝났네.”
“쥐어박을 수도 없으니까요. 그래도 오늘 자기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요?”
“아들내미가 깨닫기나 하려나 몰라.”
도란도란 목소리가 사라지자 복도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런 방치를 당해본 적 없는 기호섭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그가 붙잡으며 화풀이했던 직원이 손가락으로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나가는 문은 이쪽입니다.”
고개는 꼿꼿하게 든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