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충성맹세
-팔락.
지현석은 눈앞의 청년이 신중한 얼굴로 종이를 넘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의욕이 짙게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지현석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 상황은 말도 안 된다.
동료 검사도 아니고 국세청 소속의 7급 세무 공무원, 그것도 이제 막 3년 경력을 채워 가는 스물여덟짜리 젊은 청년과 이 중대사를 맡고 있다니.
윗선에서도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부분이고, 이번 건에 걸린 목숨은 한둘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지현석과 이 청년의 목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윗선들이 긴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든 검찰청과 국세청의 라인 자체가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 중요한 일이 지금, 이 자그마한 응접실에서 젊은 청년의 손에 맡겨진 것이다.
‘3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네.’
과거의 자신에게 ‘미래의 너는 3년 차 세무공무원과 여야 대권 주자를 칠 거야.’라고 한다면 어떻게 답할까.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각국의 엘리트만 모아서 팀을 꾸려도 시원찮다.
물론 나중에는 그렇게 할 것이다.
대권 주자를 친다는 것은 한마디로 정계 자체를 친다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손발만 자른다고 끝날까?
여당과 제1야당, 두 당 전체를 상대하게 될 수도 있다.
그동안 있었던 꼬리 자르기는 초선 의원이나 정말 감싸줄 수 없을 정도의 중범죄자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하려는 것도 그거고.
아마 대장정이 될 것이고 온갖 방해가 들어올 것이다.
자신조차 이게 성공할지 확신을 가질 수 없는데 이 청년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데.
‘나도 마음이 약해졌네.’
지현석은 숨을 가다듬었다.
그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인데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불안해서인가, 자꾸만 상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청년 이외의 다른 인재가 있느냐?
아니, 지금 상황에서는 이 청년이 최고의 선택지임을 부정할 수 없다.
검찰청 전체와 국세청 전체 직원들 가운데서 한 명을 골라 팀을 꾸려야 한다면 주저 없이 신재현을 고를 것이다.
지현석이 그동안 봐온 신재현은 그랬다.
만약 실패한다 해도 절대 부러지지 않을 사람.
끝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
그러니 윗선에서도 일을 맡겼을 것이다.
‘그게 대단한 거지만.’
지현석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생각할수록 희한했다.
자신 역시 힘겹게 이 자리까지 왔고 막대한 기대를 짊어졌다.
청년은 불과 3년 만에 자신을 따라잡았다.
아니, 앞서나갔다.
본래 계획은 더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두 대권 주자가 대통령이 된 후, 그들 밑에서 숨을 죽이고 몸을 사리며 힘을 키웠다가 그들이 물러나면 그때 증거를 모아 일어서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대선 전에 해치우겠다는 결정이 내려진 것은 다름 아닌 신재현 때문이다.
계획이 무려 5년이나 앞당겨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성장해서.
최소 3년 이상 세무서를 돌며 갖은 경험을 시키겠다는 계획은 초장부터 어그러졌다.
신재현의 성장 속도는 놀라웠다.
도저히 세무서에 놔둘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급하게 서울청장과 협상하여 TF팀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지현석은 처음 신재현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 역시 검찰 쪽 라인에서 공들여 키우고 있는 인재인 만큼 미리 언질은 들었다.
국세 공무원 하나가 올 테니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관찰하며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다.
평검사만 해도 4급부터 시작인데 이제 막 공무원이 된 애송이를 도와주라니.
이해할 수 없는 지시에 당시 지현석은 이렇게 이해했다.
-이번 일에 대처하는 자세를 보겠다. 이것은 시험이다.
윗선에서 대체 그의 무엇을 보고 기대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가만 놔두면 새싹이 채 트기도 전에 밟히겠지.
그러니 검사인 자신이 옆에서 지켜보고 위험할 것 같으면 적당히 개입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실제로는 지시 그대로 ‘도와주라’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후배 검사 하성필을 어떻게 요리하는지 보고 난 후다.
보통 검사가 기를 죽인답시고 공무원을 불러내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다.
검사실에 들어서는 순간 기가 죽으며 검사의 서릿발 같은 호통을 들으면 바로 깨갱하게 된다.
‘검사 앞에서 안 쪼는 놈은 처음이었다, 진짜로.’
물론 같은 공무원이고 동료라면 검사 앞에서 쫄 필요는 없지만, 당시 하성필은 신재현을 끝장내기 위해 부른 것이었다.
횡령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절차 위반을 문제 삼기 위해.
검사가 작정하고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방법이 없다.
그래서 소식을 듣고 구하러 부랴부랴 달려갔다가 본 광경을 잊을 수 없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검사와 맞서는 그의 모습을.
그때부터 느꼈다.
난 놈이라고.
어쩌면 윗선은 그런 모습에 반해 지원하기로 마음먹은 것 아닐까 하고.
-팔락.
다시 신재현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지현석의 잡념을 일깨웠다.
지루한 서류 작업 때문에 자꾸만 잡생각이 머리를 파고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쌓인 자료를 바라보던 지현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밖으로 반출할 수는 없습니다. 당분간은 제 사무실로 오셔야 할 것 같네요.”
조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기밀인데 검사실 밖으로 갖고 나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신재현이 내내 검찰청에 와야 한다는 건데, 어디까지 눈속임으로 넘어갈 수 있을지.
지현석은 경험을 기반으로 계산을 굴렸다.
자신에게 쌓인 업무를 처리하는 것, 그리고 틈틈이 이쪽 자료를 본다고 했을 때의 계산이다.
서울청의 TF팀에서 국회의원 자녀 건으로 시간을 최대한 끌어준다고 했을 때 이쪽에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사람이 더 있다면 편하겠지만 지현석이 지금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은 신재현뿐이었다.
그러니 힘들어도 둘이서 해낸다!
지현석이 각오를 다진 순간이었다.
-팔락.
신재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부터 서류를 들여다보고 검토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점점 그가 파일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더니 한쪽에 무언가가 쭉 쌓였다.
그리고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님, 그렇게 오래 안 걸릴 것 같습니다.”
“네?”
지현석은 멍하니 되물었다.
숙달된 수사관이 여럿이 달라붙어야 할 일에 단 둘뿐이라 절대 금방 끝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나 지현석은 진지하게 되물었다.
신재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뭔가 찾은 겁니까?”
“이게 유진환 파다 나온 사람과 법인들이죠? 이쪽 것들은 깊게 파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현석은 신재현이 내민 파일을 열어보았다.
해외와 연결된 국내 회사, 정부 지원을 받으며 하청이 복잡하게 얽힌 중소기업, 외곽 지역의 호텔 등.
종류도 업종도 다양해서 뭘 기준으로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지현석 역시 딱 보는 순간 어떤 식의 문제가 있는지 짐작이 갔다.
페이퍼 컴퍼니 또는 돈세탁의 냄새가 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많은 것들 중에서 중요도를 따져 분류했다는 것은 무언가 자기만의 기준이나 보는 눈이 있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딱 짚어서 이걸…….”
지현석은 캐물으려다가 마음을 접었다.
어차피 파보면 알 일이다.
지금까지 신재현이 보여준 능력이라면 믿고도 남았다.
“아니, 됐습니다. 해 봅시다.”
신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틀릴 리 없다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마치 경력 3년짜리 세무직이 아닌, 업계에서 수십 년 굴러 본 베테랑과 일하는 기분이다.
‘경력과 나이로 보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진짜 희한하단 말이야.’
지현석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
지현석과 신재현이 서류와 씨름하던 그 시각.
서울지방국세청의 청장실에서는 네 명의 젊은 직원들이 청장과 대면하고 있었다.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는 것은 몰라도 청장실까지 올라와 직접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인지라 이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야근에 주말 근무에 출장까지. 서울청 직원들 대부분이 업무 과다를 호소하지만, 특수조사 2팀은 정도가 심하더군요. 팀장이 의욕이 너무 넘치죠?”
청장은 허허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신재현의 팀원들은 프레임 드랍된 고전 게임처럼 뚜둑거리며 하하하, 하고 경직된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여기까지 따라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입니다. 신재현이 얼마나 바쁘게 달렸는지를 생각하면 말이죠.”
청장은 운을 떼며 차로 입을 적셨다.
그제야 팀원들이 각자 앞에 놓인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청장은 팀원들을 한 명 한 명 살피며 천천히 읊었다.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위험을.
성공한다 해도 팀은 해산되어 쥐 죽은 듯 숨죽이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과장하지도 않고 축소하지도 않으며 설득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객관적인 사실만을 담담히 나열할 뿐이었다.
“그래서 신재현 하나만을 보고 달려준 여러분에게 선택지를 드릴 겁니다. 떠나거나, 남거나. 어느 쪽을 택하든 존중하겠습니다. 떠난다고 해서 치졸하게 지방으로 좌천시키지 않을 겁니다. 가고 싶은 세무서, 가고 싶은 부서로 내년에 바로 발령 조치하겠습니다. 서울청 다른 과로 가도 좋습니다.”
청장의 말이 끝나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공기에 무게가 있을 리 없는데도 그야말로 짓눌릴 것 같은 침묵이었다.
‘역시 그런가.’
청장은 내심 씁쓸함을 느꼈다.
솔직히 가장 좋은 구도는 여기서 각오를 말해주는 것이다.
신재현이 그랬듯이.
그러나 역시 누구나 신재현처럼 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내가 눈이 높아졌군. 원래는 이런 반응이 정상인데.’
청장은 찻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래도 입안의 쓴맛은 사라지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내일 딱 하루, 고민해보고 모레 답을 알려줘요.”
신재현에게 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어조였다.
청장이 일어나려는 순간, 잔뜩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막았다.
“시간 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저희는 지금 당장 대답드릴 수 있습니다.”
장세훈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동자로 청장을 응시했다.
아까까지 긴장으로 굳어 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저는 끝까지 갑니다. 이런 말 부끄러워서 팀장, 아니 신재현한테는 못 했지만, 저희는 신재현이 달려 나가는 그 길에 반한 겁니다. 위험한 거?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삼성 세무서에서도 여기에서도 줄창 겪었어요. 매번 우리가 쳐도 되나? 싶을 정도의 상대 만나면서도 믿었으니 따라온 겁니다. 파국이든 해산이든 이 팀에 들어온 순간 각오했습니다.”
한바탕 쏟아내고는 시원한 얼굴을 한 장세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희는?”
“뭘 물어요. 저도 당연히 할 건데! 전 솔직히 분합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도망갈 선택지를 눈앞에 떡하니 들이밀어서. 저희를 시험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배려하신 거라는 건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 스스로에게 화가 나요. 그만큼 믿음을 드리지 못했나? 도망갈 여지를 남겨 둬야 할 정도였나?”
강혜원은 청장과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씩씩거리는 강혜원을 달랜 것은 황민우였다.
“안 그런 척하면서 누구보다 챙기는 게 팀장님이잖습니까. 못 믿어서가 아닐 겁니다. 팀장님은 이미 믿음을 보여주신 거나 다름없으니 이젠 우리 차례인 것뿐이죠.”
차분하고 나직한 말투의 황민우는 곱씹듯,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말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팀장님은 옆에서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분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 평생을 바치기로 다짐한 겁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안길진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글거려서다.
“앞서서 굉장한 말씀들을 해주셔서 저는 간단히 넘어가겠습니다. 저도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영광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삼성 때 이미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나요?”
저마다 표현 방법이 다르긴 하지만 이것은 충성 맹세였다.
신재현에 대한 충성맹세.
청장은 흡족함을 감추지 못하고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훌륭하군.’
회사 생활이 힘들다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람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매우 힘들며 오래 걸리는 일이다.
동료로서, 그리고 이들의 상사로서 그것을 해냈다는 것은 신재현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좋군요. 저도 더는 긴 말 않겠습니다.”
청장은 팔걸이를 탁, 치고 일어서서 팀원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신재현은 제 소중한 부하직원이자 왼팔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께 믿고 맡기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일이 모두와 악수를 나누며 청장은 이들을 껴안아 주었다.
앞으로 2달 남짓이면 해산할 팀이었지만 그 어느 곳보다 끈끈한 결속을 축하하며, 청장은 진심으로 건투를 빌었다.